•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2. 고종의 황제즉위 과정
  • 1) 황제즉위의 논리

1) 황제즉위의 논리

 대한제국의 등장에서 핵심은 고종의 황제즉위와 국호의 제정이다. 그렇다면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강화하자는 것과 황제즉위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국가체제를 강화하자는 목표가 황제즉위로 연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국민 일반의 인식 때문이다. 당시 다수의 일반 국민들은 여전히 중국 중심의 화이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황제의 나라는 자주독립한 나라이고, 왕의 나라는 자주독립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이 개항한 이래 대한제국이 선포되기까지 고종의 황제즉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조야에서 누차 제기된 것이다.

 최초로 이를 주장한 인물은 金玉均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갑신정변 당시 청국에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선국왕을 청국황제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시켜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015)≪駐韓日本公使館記錄≫ 7,<機密本省往復>(國史編纂委員會, 1989, 明治 30년 10월 25일 機密第71號 皇帝位號ノ起因ニ幷其承諾ニ關スル意見.
黃 玹,≪梅泉野錄≫上(韓國學文獻硏究所編,≪黃玹全集≫下, 亞細亞文化社, 1978), 993∼994쪽.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김옥균 등의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고, 오히려 청국의 내정간섭만 확대시켰다. 그후 1892년 朝墺修好通商條約을 체결·비준할 당시 양국 관계자 사이에 언급된 바 있고, 1894년 일본이 개혁을 명분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당시에는 주한일본공사 오도리 가이스케(大鳥圭介)도 일시 꺼냈다가 유야무야 된 적이 있었다.016)위와 같음.

 이후 을미사변 직후의 살풍경한 분위기 하에서도 이 일은 내각에서 거론되어 ‘일사천리’격으로 가결을 보기까지 하였다(1895. 10. 15). 즉 황제와 군주의 위치는 서구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일반 국민은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생각들이니 황제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017)尹致昊,≪尹致昊日記≫4(國史編纂委員會, 1975), 74∼75쪽. 그러나 러·미·불측의 외교관들이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왔다. 환영해 마지않아야 할 고종도 이를 거부하였고 내각의 인사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자 얼마 후 일본공사는 이 일의 추진을 중지하도록 조선의 대신들에게 ‘권고’하였고, 결국 황제즉위건은 무산되었다.018)≪駐韓日本公使館記錄≫ 4 ,<機密通常和文電報往復>(1988), 1895년 10월 26일발.
≪尹致昊日記≫4, 76∼80쪽.
金允植,≪續陰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66), 379쪽.

 이상을 통해 볼 때 고종의 황제즉위건은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때때로 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조선측 인사들은 자주독립의 인식을 일반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특히나 을미사변 이후에는 왕비를 잃은 고종의 비탄도 위무하자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측의 목적은 달랐다.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조선을 자주독립시켰다’는 선전임과 동시에 을미사변 이후의 사태를 호도하려는 것이었다.019)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編,≪淸季中日韓關係史料≫8(臺北, 1972), No. 3412. 청일전쟁을 ‘조선을 위한 義戰’이라 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이렇게 볼 때 황제즉위건에 대한 고종의 거부는 일본의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열국 외교관의 성토는 일본이 조선에서 마음대로 독주하는 것에 대한 견제였던 것이다.020)Allen to Olney, Nos. 160·161, Seoul, Oct. 17·19, 1895(Despatches from U. S. Ministers to Korea 1883∼1905(이하 DUSMK로 칭함).

 이로부터 얼마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자 황제즉위건은 재등장한다. 이번에는 이를 주장한 쪽이 과거와 달랐다. 김옥균을 암살한 洪鍾宇 등이 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 임시 왕궁시대(아관파천 당시를 말함)에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홍종우는 일찍이 奇計로써 김옥균을 상해에 유인하여 살해하였듯이 기지에 능하였는데, 그는 프랑스(에 다녀온) 선물로 황제즉위식을 거행할 것을 진언하였다. 반역변란당의 화로 과거 일년간 공포와 우울 속에 잠겨있던 국왕에게 제공된 홍종우의 프랑스 선물은 暗夜의 燈火였다(菊池謙讓,≪近代朝鮮史≫下, 京城:鷄鳴社, 1939, 478∼481쪽).

 홍종우는 일찍이 일본을 방문(1888∼1890)하였고 프랑스에 유학(1890. 12∼1893. 7)한 바 있는 신지식인, 나름대로는 국제상황에 대한 인식과 개화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개화의 모델은 일본이 아니라 서구 유럽, 그 중에서도 제정시대의 프랑스였다.021)洪淳鎬,<韓佛人士交流와 프랑스 顧問官의 來韓>(≪한불수교100년사≫, 韓國史硏究協議會, 1986), 112∼113쪽.
조재곤,<大韓帝國期 洪鍾宇의 近代化 改革論>(≪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論叢≫, 一潮閣, 1992).
이렇게 김옥균과 홍종우 양인의 정치적 입장과 구상은 달랐지만, 황제즉위가 필요하다고 본 점은 같았다. 사실 친일파와 친러파 모두 정파는 다르지만 황제즉위 자체를 필요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였다.022)고종의 칭제건에 대해서는 ‘친일내각’ 인사들뿐 아니라 ‘친로내각’ 인사들도 원했다(≪尹致昊日記≫4, 123쪽;Nelson M. Frederic, Korea and The Old Orders in Eastern Asia, Batom Rouge,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46, p. 235;러시아大藏省編,≪國譯 韓國誌-本文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42쪽).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비정상적 상황에서 역시 이 문제가 구체화되기는 어려웠다.

 결국 고종의 황제즉위건이 정부측에 의해 본격적으로 공론화 되어 간 것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明禮宮(경운궁, 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1897. 2. 20)한 이후이다. 그해 5월(음력 3월) 前郡守 鄭喬와 前承旨 李最榮을 비롯하여 儒學 沈宜承·權達燮·姜懋馨, 議官 任商準 등이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마련하였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구주 각국에서 황제와 군주의 위치가 평행하고 그 높음도 대략 같으니 改號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동서양 국가의 位號와 관습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하필 東亞의 좋은 칭호를 두고 서구의 관습을 따르겠는가. 토지가 넓지 않고 藩屬을 두지 않았으면 거론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망령된 주장으로 족히 번론할 것도 없다.…제국은 구역의 넓고 좁음이나 附屬의 유무에 무관한 것으로 혹자가 支那를 통일한 연후에나 의논할 수 있겠다 하는 것은 俗儒의 어리석은 주장이다. 외국의 인정여부에 관한 의문은 만국통행의 공법을 알지 못하는 자의 말이다. 萬國公法을 보건대 존호는 각국이 자주로 하는 것이며, 타국은 이를 좇아 인정할 뿐이니 타국이 인정하고 아니함은 논할 것이 못된다. 동아의 대국인 청국과 일본은 모두 이런 존호를 쓰는데 오직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어 동양국면에 크게 관계가 있다(鄭喬,≪大韓季年史≫上, 國史編纂委員會, 1957, 161∼162쪽).

 이같은 맥락의 상소는 그해 10월초까지 이어졌다. 그 내용은 대체로 앞서와 같은 내용이었다.

첫째, 皇·帝·王은 비록 글자는 다르지만 한나라를 자주하고 독립하여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 뜻을 지닌다. 帝位에 오르신다 하여도 萬國公法상 조금도 구애됨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의논하여 대책을 세우시고 황제의 尊號를 올림으로서 尊君하는 輿情에 부응하시고 문약·의부하는 습관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둘째, 갑오경장 이후 독립의 이름만 있고 독립의 실이 없다. …우리 나라 국민이 문약한 성품으로 의부하는 성습이 멀리는 이천 년, 가까이는 오백 년으로 이를 떨쳐 버려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나라의 의관문물이 모두 明의 제도를 좇아 그 統을 이었다. 따라서 位號를 바로 세우는 일이 불가할 것이 없다. 청이 우리와 동양에 처해 있는 것은 독일·오스트리아가 로마와 인접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네째, 우리 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은 만국이 공인하고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하지 못하는가. 우리 나라 강토는 한·당의 옛 땅과 관계있고 의관문물은 송·명의 제도를 모두 좇았으니 그 계통을 접수하여 그 존호를 쓴다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다섯째, 혹자는 말하기를 왕이나 군은 한 나라를 다스림을 말하고 황제는 여러 나라를 다스림을 말한다 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백성을 늘려 여러 나라를 통합한 상태가 아니면 황제칭호의 사용이 불가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三韓을 통합한 것이고 육지강토는 4천리요 인구는 2천만에 모자라지 않는다. 오늘날 폐하의 신민된 자가 지존한 존호를 씀에 누가 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9월에서 10월초 참조).

 이상에서 보듯이 ‘황제의 존호를 씀으로써 문약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습관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 갑오경장 당시 밝힌 자주독립의 이름을 황제즉위를 통해 보다 구체화하자는 것, 우리 나라가 漢·唐·宋의 계통을 이은 明나라의 문물을 좇았으니 그 정통을 이은 나라로서 황제의 존호 사용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023)≪高宗實錄≫권 35, 건양 2년 5월 1·9·16·26일.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도 없지 않았다. 보수유생과 서구지향적인 신지식인들의 논리가 그러하였다. 먼저 崔益鉉·柳麟錫 등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던 보수유생들은 尊華攘夷의 관념에 근거하여 고종의 황제즉위건에 대해 비판하였다. 즉 중화의 문명을 이은 우리의 의관문물제도를 바꾸는 것은 불가하며, ‘서구의 의례에 따라 존호를 바꾸는 것’은 짐승의 제도를 취하는 것으로서, 소중화의 나라에서 황제즉위를 한다는 것은 망령되이 스스로를 높이는 행위라는 것이었다.024)崔益鉉,≪勉菴集≫(麗江出版社, 1990), 89∼91쪽.
柳麟錫,≪昭義新編≫(國史編纂委員會, 1975), 62∼65·83∼84·278쪽.

 한편 尹致昊와 같은 서구지향적인 신지식인의 논조도 비판적이었다. 다만 보수유생들과는 논리가 달랐다. 윤치호는 황제즉위란 서구의 열강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유명무실’한 조치이며, ‘외국 군대가 왕궁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하는 마당에 서구 열강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같은 행사에 재정을 낭비하기보다는 국정의 개선과 효율적 운영을 통해 자주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었다. 즉 빈약한 정부의 재정을 낭비하는 ‘외화내빈’의 행사보다는 내정에 충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025)≪尹致昊日記≫4, 72∼75쪽·5, 88∼120쪽.

 ≪독립신문≫에서도 비슷한 논조가 우회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즉 ‘나라가 자주독립 되는 데는 꼭 대황제가 계셔야 자주독립 되는 것은 아니다. 왕국이라도 황국과 같이 대접을 받으며 권리가 있는 것이다. 지금 조선에 제일 긴요한 것은 자주독립의 권리를 잃지 아니하여야 할 터인즉, 관민이 대군주폐하가 황제 되시는 것을 힘쓰는 것도 옳거니와 제일 자주독립권리를 찾으며 지탱할 도리를 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다.026)≪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2일, 논설. 이것 역시 황제즉위식과 같은 행사보다는 자주독립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반론이 제기되었다. 張志淵·鄭喬 등 ‘동도서기’적 입장을 가진 지식인들의 논리가 그러하였다. 이들은 보수유생들의 논리는 너무 고루하고, 윤치호 등의 논리는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다고 보았다. 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망령된 주장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하였고, 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청·일 모두 황제·천황을 칭하는데 우리만이 왕(당시 대군주폐하)을 칭하여 비하할 이유가 없으며,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일반인의 인식을 고려할 때, 우리 군주의 존호도 황제로 높여 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027)張志淵,<辨贊正崔益鉉論皇禮疏>(≪韋庵文稿≫3, 國史編纂委員會, 1971), 90∼91쪽.
鄭喬,≪大韓季年史≫上, 160∼162쪽.

 고종이나 정부측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 것은 장지연·정교와 같은 지식인들의 논리였다. 그럼에도 정부측에서는 한동안 황제즉위건을 보류해 두고 있는 듯하였다.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도 5월 이후로는 한동안 뜸하였다. 여론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정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열국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탐문하였다.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각국은 ‘이 일이 조선의 자주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굳이 이를 저지하거나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었다.028)≪淸季中日韓關係史料≫8, No. 3439, 5050쪽. 이후 정부측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상의 전과정을 놓고 볼 때 고종의 황제즉위건은 조야의 여론을 바탕으로 정부측이 추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핵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고종의 생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고종은 일찍이 황제즉위건에 대해 관심이 적지 않았다. 고종으로서는 청국과 일본 등 외세의 압제에서 시달리면서 거듭 국가적 위기와 신변의 위협을 경험한 바 있었으며, 게다가 2년 전 왕비를 비명에 잃은 슬픔을 지워버리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 고종으로 하여금 황제로의 즉위를 모색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황제즉위건에는 그동안 위축되어 온 군권의 회복, 비명에 간 왕비를 위무하려는 소박한 열망, 그리고 나라의 총력을 모아 내외의 위기에 대응하자는 구상 등이 두루 용해된 것이었다.029)위와 같음.
≪尹致昊日記≫5, 98∼99쪽.
Allen to Sherman, No. 18, Seoul, Oct. 14, 1897, DUSMK.

 이상에서 보듯이 황제즉위에 관한 주장은 초기의 몇몇 인사들로부터 전현직관료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에 관한 논의는 고종이 환궁한 한두 달 뒤부터 수개월간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황제즉위의 필요성이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하나 하나 비판하는 등 대체로 여론수렴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국가적 위기를 타개해 보자는 고종과 정부측의 구상이 깊게 배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8월 연호가 제정되고, 10월초에 정부백관의 상소가 이어지면서 마침내 고종도 황제즉위건에 대해 재가를 하였다(10. 3). 황제즉위식 거행일도 그달 12일(음력 9월 17일)로 확정되어 이 문제는 최종 결말을 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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