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2. 고종의 황제즉위 과정
  • 2) 고종의 황제즉위식

2) 고종의 황제즉위식

 고종의 황제즉위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연호의 제정과 圜丘壇030)환구단은 원구단이라고도 읽는다. 그러나 1897년 당시의≪독립신문≫에서는 환구단으로 거듭 쓰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당시의 표현을 따라 환구단으로 표기하였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2일, 논설).의 설치 그리고 환구단에서의 황제즉위식 행사 등이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대 왕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중국의 연호를 썼다. 중국의 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래 중국은 동양의 중심적 역할을 상실해 가기 시작하였고, 청일전쟁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 결과 조선도 1896년에는 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 점에서 조선은 청국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선의 독립’이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청국의 간섭은 벗어났다 하여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양이란 연호의 채택도 일본의 간섭하에서 진행되었고, 主上殿下를 大君主陛下로, 王妃殿下를 王后陛下로, 王世子低下를 王太子殿下 등으로 변경한 것도 그러하였다.031)≪官報≫, 개국 503년 12월 12일. 이를 두고 ‘우리 역사상에 등장한 적이 없는 기이한 명칭’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032)≪淸季中日韓關係史料≫8, No. 3430, 5040쪽. 결국 아관파천과 환궁 등을 거치면서 조선이 일본의 구속을 잠시 벗어난 사이에 문제의 연호와 존호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沈舜澤이 議政에 임명되어 황제즉위식에 관한 의례와 그때까지 장례를 미루어 두었던 왕비의 장례식 준비에 착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가 光武와 慶德 두 개의 안을 놓고 建元건을 상주하자, 광무가 새 연호로 확정되었다(1897. 8. 16).033)≪官報≫, 건양 2년 8월 14·17일. 광무라는 새 연호에는 모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의미가 있었다.

 연호를 제정한 뒤 9월에 들어서면서 정부관료들이 고종의 황제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관료·유생들의 상소를 바탕으로 심순택과 趙秉世·朴定陽·南廷哲 등이 고종을 알현하여 거듭 황제로 즉위할 것을 진언하였고, 李秀丙 등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이어졌다. 아홉 번의 사양 끝에 고종은 마침내 이를 재가하였다. 아홉이란 숫자는 동양적 의미로는 가장 큰 수, 사양할 만큼 사양했다는 뜻이니 다분히 의식적이었다.034)≪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9월 25∼30일.
≪大韓季年史≫上, 162쪽.

 즉위식 행사는 11일에서 12일에 걸쳐 행해졌다. 황제즉위를 경축하는 태극기가 장안에 물결치는 가운데 치러졌다. 장소는 ‘환구단’, 서울의 南署 會賢坊 小公洞契였다.035)현재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조선호텔(Westin Chosun Hotel) 자리이다. 환구단의 조성 경위에 대해서는≪高宗實錄≫36, 광무 원년 9월 21일·29일, 10월 1일·12일조 및≪官報≫, 광무 원년 9월 21일·10월 4일<宮廷錄事> 등을 참조.

 원래 환구단은 천하를 다스리는 지상의 황제가 천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니 원칙적으로는 황제의 나라에만 존재한다.036)그의 원형은 현재 북경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방대하고도 웅장한 규모의 天壇에서 잘 느껴볼 수 있다(望天星·曲維波編,≪天壇≫, 北京:中國世界語出版社, 1996).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서 ‘圜丘祭’가 제도화된 것은 고려 성종대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 행해졌던 환구단에서의 제천행사는 고려 말기에 와서 背元親明策을 취한 이후 명나라 사신의 혁파종용과 당시 신진사류층의 성리학적 명분론 등에 의해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로도 태종 및 세조 때 기우제 등의 경우에 방편적으로만 거행된 것 외에는 환구제를 국가적 행사로 거행할 수 없었다.037)韓佑劤,<朝鮮王朝時代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韓國史論≫3, 1976).
金泰永,<圜丘壇>(서울市史編纂委員會,≪서울市六百年史-文化史蹟篇≫, 1987), 201∼204쪽.
平木實,<朝鮮半島における王權-朝鮮王朝時代を中心に>(松原正毅編,≪王權의 位相≫, 弘文堂, 1991).

 이처럼 중국을 의식하여, 혹은 주자학적인 명분론에 입각한 중화사상에 의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행해지지 못했던 제천행사를, 이제 황제즉위식과 함께 환구단에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완성된 환구단의 모습을≪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전 남별궁 터전에 단을 모았는데 이름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 역군과 장색 천여 명이 한달이 못되어 거의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삼층이라. 맨 밑층은 장광이 영척으로 일백 사십 사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로 쌓아 석자 길이 높이를 쌓았고, 제이층은 장광이 칠십 이척인데 밑층과 같이 석자 높이를 쌓았고, 맨 윗측은 장광이 삼십 육척인데 석자 길이로 둥글게 높이를 쌓아서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고 맨 밑층 가으로는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하여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라. 이 단은 금월 십이일에 황제폐하께서 친행하시어 거기서 백관을 거느리시고 황제위에 나아가심을 하느님께 고하시는 예식을 행하실 터이라(≪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2일, 논설).

 이상으로 보아 이때의 환구단은 규모는 작았지만, 대체로 명대와 청대에 걸쳐 중국 천자의 제천행사에 쓰였던 북경의 환구단 형태를 따른 것이었다.038)북경의 天壇은 북쪽에 위치한 祈年殿과 皇乾殿, 남쪽에 위치한 환구단과 皇穹宇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望天星·曲維波編, 앞의 책 참조) 황제즉위식 광경은 서울의 내외국인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다. 먼저 즉위식 전날의 광경에 대해≪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십일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쳤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만일에 대비하여 절도있게 파수하였다. 길에 다니던 사람들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십이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왔다. 의복들이 젖고 찬기운이 성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에 젖은 옷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직무를 착실히 하였다. 십일일 오후 두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등물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다. 총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도를 찼다. 옛 풍속으로 조선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다.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둘러보고 오후 네시쯤 환어하였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이어 황제즉위식은 다음날 새벽에 고종이 다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에게 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십이일 오전 두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황단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하고 황제위에 나아감을 고했다. 황제는 오전 네시반에 환어했다.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폐하께와 황태후폐하께와, 황태자전하께와 황태비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환구단에서의 황제즉위식 행사는 동양의 전통적인 양식에 서양의 양식이 일부 혼합된 모습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한·당·송·명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우리 나라가 직접 계승하여 衣冠文物과 典章制度를 모두 皇明의 遺制를 따랐다고 주장하던 관료와 일부 유생들의 주장과도 부합하는 내용이었다.039)≪高宗實錄≫권 35, 광무 원년 10월 10일. 즉 한편으로는 만국공법 질서하의 자주독립한 나라라는 근대적 의식,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정통을 우리 스스로가 이었다는 ‘주체적 중화의식’이 뒤섞여 있었다.

 이로써 비록 취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국사상 초유의 황제국이 탄생하였다.≪독립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사기에서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조선이 몇 천년을 왕국으로 지내어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더니…이달 십이일에 대군주폐하께서 조선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는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어찌 조선인민이 되어…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오(≪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4일,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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