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1)<대한국국제>의 제정 과정
  • (1) 교전소의 설치

(1) 교전소의 설치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법률체계는 1899년 8월 17일 반포된<大韓國國制>이다. 따라서 이<국제>를 제정 반포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입법기구 설치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돌아온 직후인 건양 2년(1897) 3월 16일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 이들로부터 정치현황과 민심의 동향 및 제반 時弊와 그 해결책에 관한 의견을 청취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신법과 구법을 절충하면서 법전을 편찬하자는 건의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고종은 당시의 상황을 國政을 새롭게 운영할 ‘更張의 기회’로 생각하고, 신구 관제와 제반 법규 정비를 위한 기관을 특설하고 인원을 선정하라는 조칙을 내렸다.064)≪秘書院日記≫고종 13책, 건양 2년 2월 14일. 이에 따라 그것을 담당할 기구로 중추원에 校典所가 설치되었고, 같은 달 23일 의정 金炳始, 궁내부특진관 趙秉世·鄭範朝를 교전소 총재대원에 임명한 것을 비롯하여, 찬정 金永壽·朴定陽·尹容善, 외부대신 李完用을 부총재대원에, 각 부 고문관인 미국인 르젠드르(李善得;Charles W. LeGendre)·그레이트하우스(具禮;Clarens R. Greathouse), 영국인 브라운(柏卓安;John M. Brown)과 徐載弼을 교전소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4월 12일 제1차 회의를 열어<校典所議事規則>(전문 16조, 부칙 3조)을 제정하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정례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4월 15일의 제2차 회의에서는 金嘉鎭·權在衡·李采淵·成岐運·尹致昊·李商在·高永喜 등과 같은 개화 행정관료를 知事員으로 선정하여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같은 달 19일의 제3차 회의에서 참서관과 관제조사위원·형률조사위원 및 보조원을 두었으며 국한문기록위원(金重煥)·영문기록위원(朴鎔圭)도 임명하였다.

 교전소는 대한제국 성립에 즈음하여 보수적인 분위기가 점증하는 가운데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여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조야의 여론을 바탕으로 하여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향후 정국을 국왕 중심의 구도로 재편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구성원을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교전소는 어느 특정 세력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즉,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김병시·조병세·정범조·김영수 등 정부내의 원로 관료세력,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친러·친미내각을 형성시킨 이완용·박정양 등 이른바 정동구락부 세력, 외국인 고문관 그룹이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국제법과 세계대세에 밝은 외국인 고문관 등을 참여시킨 데에는 서양의 근대적 법체계를 도입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의도로 설립한 교전소는 그 본래의 사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교전소가 이렇다할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위원들 간의 정치적 이해와 입장 차이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쟁점이 된 것은 군주권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였다.

 고종이 애초 의도한 바와 달리 중추원고문 서재필은 교전소를 의회정치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입법기관으로 삼아, 박정양 및 개화파 소장관료를 중심으로 교전소의 작업을 통해 법률과 규례 제정의 체계화를 이루어 오히려 군주권을 제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방향을 달리하는 르젠드르 등 다른 위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갈등을 일으켰다.065)尹致昊,≪尹致昊日記≫5, 1897년 7월 2일(國史編纂委員會, 1975), 71∼72쪽. 급기야 위원들 중 사직한 자들도 많았고 또한 회의에 참석치 않는 자도 있게 되었다. 고종 역시 서재필이 교전소를 주도하는 것을 기피하여 4월말의 회의를 끝으로 교전소의 활동은 별다른 성과없이 흐지부지 되었다.066)≪독립신문≫, 건양 2년 5월 11일.
愼鏞廈,≪獨立協會硏究≫(一潮閣, 1976), 56쪽 참조. 그렇지만 교전소는 명목상 계속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법규교정소 설립 직후인 1899년 7월 10일 法規校正所 총재 尹容善의 奏에 의해서였다. 이때까지 교전소 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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