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1)<대한국국제>의 제정 과정
  • (2) 법규교정소를 통한<대한국국제>의 제정

(2) 법규교정소를 통한<대한국국제>의 제정

 법률제정을 통한 군주권의 확립문제는 그후 稱帝建元으로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초기에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비록 황제국가를 선포하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황제권이 그에 걸맞을 정도로 명실상부하게 확립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황제로서 위치를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1899년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정부는 1898년 12월 강제로 해산시킨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재야민권운동을 통한 황제권에 대한 간섭과 견제를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였다.

 이 기간에는 통치기강의 확립도 강조될 수 있을 만큼 황제권이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만세불변의 법률제정을 통하여 그것을 공고히 할 필요가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선행작업으로 그해 3월 의정부에서는 총무국장 洪鍾宇의 주관아래 건양 연간부터 그해까지 반포된 주요 법규를 모아≪法規類編≫이라는 자료집으로 간행하는 한편 이를 각계에 보급하여 현실 업무에 적용코자 하였다.

 나아가 고종은 같은 해 6월 23일에 조서를 내리기를 “比年 이래 한 생각으로 다스림을 꾀하여 새 시대에 적합한 것을 구하고자 힘써 왔다. 典章과 法度가 아직 중용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政令과 제도의 설치가 미진하여 그러한지 일을 맡은 신하가 그 직을 다하지 못하여 그러한지. 높고 장한 발전을 생각하고 마땅히 일대 更張을 가하고자 정부에 명하여 校正所를 임시로 설치하니, 법률과 사리에 밝은 자를 선정하여 법규를 논의하고 정하여 인민에 신뢰를 세우도록 하라”고 황제 직속의 법률제정 기관인 교정소의 설치를 지시하였다.067)≪秘書院日記≫고종 14책, 光武 3년 5월 16일. 이에 따라 정부회의를 거쳐 7월 2일 새롭게 法規校正所라는 명칭의 기구로 개칭하고 구성원을 선정했다. 이때 정해진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총 재:의정부의정 尹容善 의정관:중추원부의장 徐正淳, 궁내부대신 李載純, 궁내부특진관 趙秉鎬·尹用求, 학부대신 閔丙奭, 의정부찬정 權在衡, 군부협판 朱錫冕, 특명전권공사 成岐運, 한성판윤 金永準

 또한 7월 10일에는 남아 있던 교전소 관원을 모두 해임시키고 아래와 같은 인원들로서 실무자를 다시 선정하였다.

실무위원:법부법무국장 申載永, 중추원의관 金益昇·韓永福, 군부대신관방장 韓鎭昌 주  사:외부주사 崔文鉉, 의정부주사 張鴻植·金重演, 궁내부주사 崔泓俊, 농상공부주사 洪在夏, 법부주사 柳遠聲

 그리고 7월 13일 궁내부특진관 李鍾健, 의정부찬정 李允用, 중추원의관 李根命, 비서원경 朴容大를 의정관으로 추가 선정하였고, 8월 1일에는 과거 교전소의 구성원이었던 의정부贊務 르젠드르, 탁지부고문 브라운,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를 다시 법규교정소 의정관에 임명하였다. 이후부터 법률과 칙령의 제정이나 폐지에 관한 안건은 모두 법규교정소로 넘겨 의견을 거친 후에 법부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상주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법규교정소는 고종황제의 관심도와 그 인원규모에 있어서 과거 교전소에 비해 월등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 고종의 입장은 황제권 강화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이 곧바로 법규교정소 인사에 반영되었다. 법규교정소의 총재와 의정관의 면면을 보아도 의정부찬정 권재형 외에는 대체로 보수적이거나 황실 측근의 인물들로 포진해 있었다.068)1896년 법부협판과 고등재판소 판사, 1897년 농상공부 협판, 교전소 지사원을 역임한 권재형은 대한제국 성립 즈음인 건양 2년(1897) 9월 25일≪公法會通≫제84·85·86조에 기초하여 우리 나라도 서양의 帝國들처럼 帝號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즉위 상소를 올렸다(≪秘書院日記≫고종 13책, 建陽 2년 8월 29일). 이를 통해 볼 때 그는 국제법에 대한 일정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법률과 사리에 명달한 자’는 권재형 및 각부 외국인 고문관에 불과하였다.

 한편 甲午年(1894) 이래 여러 정치적 사변을 겪으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君權의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皇權의 안정과 정착화의 필요는 통치권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절실한 문제로 작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법규교정소에서는 구법을 버리고 새로운 제도를 많이 채용하여 법률을 제정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國制>를 반포함으로써 완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시기 법규교정소 창설의 가장 큰 목적은<국제>의 제정에 있었다.069)왜냐하면 모든 법령의 제정과 폐지를 담당한다는 그 초기의 거대한 목적과는 달리 법규교정소는 몇 가지 법령제정을 제하면<국제>의 제정외에 주목할만 한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법규교정소와 관련된≪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899년 7월 17일<성균관관제>개정, 7월 18일의 奏·判任官 시험 및 임명규칙 개정에 관해 강구하라는 詔書를 받았고, 10월 6일 의정부에서 법규교정소 수리비 및 廳費 1,827元 8錢 2釐을 재가받았다. 1900년 3월 무관 및 사법관 임명규칙을 제정하였고, 6월 4일 한성판윤 이채연을, 그해 9월 15일 내부대신 李乾夏, 협판 閔景植, 법부 법률교사 프랑스인 크레마지(金雅始;Laurent Crémazy)를 의정관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달 18일 교정소로 하여금 ‘服食器用’과 관련된 條例를 詳定하여 재가를 받아 시행토록 하라는 조칙이 있었지만 그 실행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어 그해 11월 7일 특진관 趙秉式을 부총재로 임명하였고, 이듬해인 1901년 1월 19일 궁내부협판 李址鎔을 의정관으로 임명된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의 인사기록은 없다. 법규교정소 기구와 관련된 마지막 기록은 1902년 3월 의정 윤용선이 상주하여 법규교정소를 잠시 정부에 合設하자고 하여 황제가 이를 따른 것이었다. 이후 명목만 남은 법규교정소는 1904년 1월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의 기구개편시 해체되었다.
이상으로 보아 실제 제반 법률제정과 집행은 일찍부터 법부의 소관으로 넘어간 듯하다. 건양 2년 교전소에서 담당하고자 하였던 형률제정도 1902년 1월 에 가서야 그 기초가 끝나 정부회의에 상정될 수 있었다(≪皇城新聞≫, 光武 6년 1월 14일).
따라서 주로 실무위원들과 고문관을 중심으로 이를 뒷받침할 작업이 곧바로 추진되었고 그것은 그해 8월 중순 완성되었다.

 고종은 1899년 8월 17일 조서에서 “나라는 반드시 국제를 頒示하여 정치와 군권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힌 연후에 가히 臣民으로 하여금 꼭 지키고 행하여 어김이 없게 하는 것인 바 본국에서는 오히려 일정한 법을 반시한 적이 없어 모자라는 典例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니 법규교정소로 하여금 국제를 의논하여 登聞 取旨하라”070)≪秘書院日記≫고종 14책, 光武 3년 7월 12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그날 법규교정소 총재 尹用善 이하 임원이 황제를 알현하면서 미리 준비된<대한국국제>의 주본을 제출함으로써 그 내용이 공표되었다. 윤용선은 “뭇 의논을 취하고 公法을 원용 참조하여 國制 一編을 擬定하여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떤 정치가 되며 군권이 어떤 군권이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진실로 법규의 큰 두뇌요 큰 관건입니다”071)위와 같음.라고 하면서 황제에게<대한국국제>가 법규교정소의 회의를 거쳐 가결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곧바로 고종은 이 주본이 衆議와 같고 외국인 또한 옳다고 말하였는가를 물었고 윤용선이 그렇다고 답하였다. 이에 재가하여 당일 반포되므로써<대한국국제>는 비로소 법률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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