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2. 광무양전·지계사업
  • 2) 양지아문의 설립과 양전시행
  • (1) 양지아문의 토지측량과 광무양안

(1) 양지아문의 토지측량과 광무양안

 量地衙門은 성격상 정부기구 중에서 내부·탁지부·농상공부 등 3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각기 내부의 土木局·版籍局과 탁지부의 司稅局, 농상공부의 農務局·鑛山局 등이 유기적으로 관련되었다. 그래서 양지아문 총재관은 별도의 관료를 임명한 것이 아니라 내부·탁지부·농상공부의 대신을 겸임 발령하여 朴定陽·沈相薰·李道宰 등을 그대로 임명하였으며, 副總裁官도 유관부서로서 한성부와 학부의 장관으로 判尹 李采淵과 協辦 高永喜를 임명하였다.109)勅令 제25호 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定제6조.
≪日省錄≫35책, 1898년 5월 18일(양 7월 6일).
이렇게 범정부적인 유관기구를 포괄하면서 양전을 전담할 독립관청으로서 양지아문이 발족된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정부는 종전의 양전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몇 가지 새로운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토지의 객관적인 측량을 위해 외국인 기사를 고빙하고 있었던 점이다. 1898년 7월 14일 정부는 美國人 技士 크롬(Krumm, 巨廉)의 주도하에 측량견습생을 양성하고 서양의 측량방식을 사용해서 5년 동안 측량에 종사하도록 하였다.110)≪各部請議書存案≫6책, 勅令 제25호 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定 9조.
≪外部量地衙門來去文≫, 大韓政府에셔 美國量地技士 巨廉을 本國量地技師로 雇聘 合同.

 이렇게 양전을 위한 기구와 방식이 확정되었지만 토지측량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서양의 측량기술이나 조사관리들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며 비판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1899년 3월 10일 中樞院에서는 측량사업이 실시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심지어 양지아문의 폐지를 주장하는 논의가 일어날 정도였다.111)왕현종,<대한제국기 量田·地契事業의 추진과정과 성격>(≪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55∼65쪽. 이러한 논의는 근본적으로는 이번 토지조사를 통하여 농촌사회 내부에서 기존의 계급관계가 어떻게 변화될 것이며, 또한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드디어 1899년 4월 5일 量地衙門은 조세수입의 확대라는 명분으로 전국적인 양전의 확대·시행을 결정하였다.112)≪各部請議書存案≫10책, 1899년 4월 5일, 各道量務監理 該道內郡守 중에 諳術著績 者로 擇任야 爲先試可에 關 請議書.
≪奏本≫29책, 1899년 4월 24일, 奏本 72호.
결국 조선 후기 숙종조 경자양전 이래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거의 180여 년 동안 없었는데 비로소 여기에서 실시를 보게 되었다. 이번 양전사업은 측량 방식과 구체적인 목적에서 보아 크게 2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한성부였고, 다른 하나는 전국지역이었다. 우선 한성부에는 서양의 측량기술에 의거하여 측량하되 기존의 家契발급제도의 확대 실시라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던 반면, 나머지 각도 지방에서는 옛 제도인 結負制를 준용하는 방식으로 측량하되, 토지에 관한 여러 사항을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國勢調査의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양지아문은 1899년 4월 1일 한성부 지역의 토지를 측량하기 시작하였다.113)≪皇城新聞≫, 1899년 4월 1일, 잡보<量地開始>. 최초의 측량은 崇禮門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114)≪독립신문≫, 1899년 4월 5일, 잡보<량디아문>. 이어 水標橋에 이르는 道路와 方里 구획을 대상으로 도로의 길이와 넓이, 인가의 집터 그리고 官有·民有의 일체 地段 등을 측량할 예정이었다. 특히 외국 공관, 敎堂, 사택 및 상점인 棧房 등 외국인 거주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전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1899년 한성부의 도로와 5署內의 方里를 측량하고 이후 1년 이내인 1900년 5월경까지 측량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15)≪地契衙門來文≫, 1899년 5월 29일, 公文. 그렇지만 그렇게 빠른 시일안에 양전을 끝마치기는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측량과정에서 측량추를 분실하거나 학도들의 봉급 등의 문제도 많았으나,116)≪황성신문≫1899년 4월 20일, 잡보<學徒退去> 및 4월 29일 측량추 분실 광고. 한성부의 양전에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외국인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00년 3월 9일에서야 외국인 거류지를 측량하기 시작하여, 9일과 10일에는 일본공관, 12일·13일은 竹洞 守備隊營 그리고 14일에는 駱洞 守備隊營을 측량했다. 또한 4월 17일에는 러시아공관을, 19일에는 불란서공사관을 측량하기로 하였다.117)≪皇城新聞≫, 1900년 3월 9일, 잡보<居留地測量>.
≪外部量地衙門來去文≫, 1900년 3월 5일 및 4월 12일, 조회.

 이렇게 양지아문의 측량사업이 진행되면서 한성주재 각국 공사와 외국인들은 이 사업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 미국공사는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들은 양지아문의 설립 초기부터 장차 한성내의 家屋 地基를 측량하고 별도로 立案을 나누어주는 사업을 하는 기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인에게 契案을 발급하는 법을 세울 기회로 파악하고 家契制度를 개항장에서 쓰이는 地契와 같은 제도로 만들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1899년 3월에 한성부내 토지·가옥의 위치와 면적을 측량하되 不動産의 原簿를 작성하고 이에 의거하여 地券과 家券을 발급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118)≪舊韓國外交文書≫4,<日案>4, 5040호, 1899년 3월 23일, 漢城府家券制度改正實施要望(일본공사 加藤增雄→외부대신 朴齊純), 252∼254쪽. 이는 외국인의 토지가옥의 소유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공인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외국인 토지소유의 합법화를 기도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이러한 외국인 토지소유의 무제한적인 개방과 합법화 요구는 결국 대한제국의 토지주권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국민의 토지소유권의 해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이나 한성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성부의 토지조사가 쉽게 마무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1901년초에 이르러서는 서울 주민의 家戶에 대한 조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으므로,119)≪황성신문≫, 1901년 1월 12일, 잡보<當懸門牌>. 향후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제도수립에 대한 방침이 가능한 한 빨리 내려져야 했다.

 이렇게 한성부의 토지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와는 별도로 전국적으로 각도를 단위로 하여 양전사업이 실시되고 있었다. 1899년 6월 양지아문에서는 충청남도 牙山郡에서 시범적인 양전을 실시했다. 전의군수 鄭道永이 충청남도 量務監理를 맡아 李鍾大·李沂·李喬赫·宋遠燮 등 4인의 量務委員을 비롯한 學員 22명을 대동하고 6월 20일부터 약 3개월간 양전을 실시하였다.

 이곳의 양전에서는 매필지마다 실지에 나아가 민간의 斗落이나 舊結負도 조사하였으며 특히 농지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전답도형을 그렸고 실적수를 정밀하게 표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지의 소유자인 田主·畓主 이외에도 作人도 빠짐없이 조사하였으며 심지어 垈主 이외에 여러 명의 家主도 조사하였다.120)宮嶋博史,<光武量案의 역사적 성격>(≪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 60∼69쪽. 비록 양무위원에 따라 각기 다른 양식으로 조사되기는 했으나, 이후 양안의 정리과정에서 이기가 도입한 양안의 기재양식에 따라 통일적으로 정연하게 정리되었다.121)왕현종, 앞의 글(1995), 65∼75쪽.

 무엇보다도 아산군 양전을 거쳐서 토지조사 방법과 양안작성 원칙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즉 전답도형도의 도입, 절대면적인 실적수 표기, 토지의 소유와 경영관계를 나타내주는 ‘時主와 時作’의 병기로 확정되었다. 이후 아산군 양전을 담당한 양무위원들이 양전의 확대와 더불어 경기·충청·전라도의 양전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산군 양전은 이후 전국적인 양전사업의 확대실시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양지아문에서는 전국적으로 양무감리와 위원을 파견하면서 양전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시키게 되었다.

지역 전임자 전임관직 임명일자 후임자 전임관직 임명일자
경기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경남
경북
황해
평남
李鍾大
鄭道永

李啓弼

金星圭


李台珽

南萬里
朴準成
全秉薰
彭翰周
양무위원
전의군수

옥천군수

장성군수


남원군수

거창군수
신녕군수
전의관
평양감리
1899.11.11
1899. 5.29

1899.11.11

1899. 3.18∼
1900.10.30

1899. 5.29

1899. 3.18
1899.11.11
1901. 4. 9
1901.10.22

李勝宇
閔致純
李德夏
李弼榮
李祐珪
全秉薰
韓龍源
李承淵
吳宖黙
崔斗文
金滋善
 

종 2품
정 3품
  6품
  3품
  4품
전의관
  4품

익산군수
양무위원
정 3품
 

1900. 4.27
1900. 5.21
1900. 4.27
1901. 4. 9
1900.11. 6
1901. 3.21
1901. 4. 9
1900. 5.30
1901. 3.21
1900. 4. 5
1900. 4. 5
 

<표 1>전국 양무감리 명단

*출전:≪官報≫·≪日省錄≫해당 일자 인사기록 참조.

 양지아문에서의 측량사업은 토지조사 방식에서 구래의 양전방식을 준용하면서도 새로이 몇 가지 원칙을 추가로 설정하고 있었다. 우선 양지아문의 양전은 모든 부동산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경작지는 지목이 크게 田·畓으로 나뉘는데, 전의 경우에도 작물재배 여부에 따라 자세히 구분하였다. 家舍는 용도에 따라 公廨·寺刹·書院 등으로 표기하였으며, 水舂·防築·堤堰·土器店·鹽田·火田 등도 상세히 조사 기록하였다.

 또한 양안에 등록하는 방식에서는 종래 國朝舊典에 의거하여 천자문 순서에 따른 자호체계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일정한 생산량을 기준으로 토지를 파악하는 방식인 結負制, 田品 6等에 따른 同積異稅制를 그대로 준수하였다.122)≪增補文獻備考≫中, 田賦考 2, 645쪽. 이렇게 토지조사 방식에 있어 구래의 양전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객관적인 토지면적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방식을 채택했다. 첫째, 每筆地의 면적을 기록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었는데, 종래에는 長廣尺만을 기록한 데 대해 이것 이외에도 總實績數를 기입하여 절대면적을 표시하였다. 둘째, 개별 필지의 형상을 단순화했던 다섯 가지 圖形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等邊, 不等邊形을 표기하여 세분화된 토지의 형상을 파악하려고 했다. 셋째, 田畓圖形圖를 처음으로 도입함으로써 이전의 양전에서 파악된 토지형상의 파악에서 한 단계 진전시켜 地籍圖制로 이행하려는 중간과정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양지아문의 양전사업은 종래 소출 중심으로 토지를 평가하던 단계에서 객관적인 면적과 토지 가치를 평가하는 단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다.123)崔元奎,<대한제국기 量田과 官契發給事業>(≪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222∼229쪽.

 양지아문은 전국적으로 측량사업을 실시하면서, 대개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 양안을 작성·정리하고 있었다. 우선 각 지방에서 면 단위로 실제 들에 나가 측량하고 관련사항을 기록하는 단계이다. 초기 양전과정에서 작성되는 장부를 ‘野草’라 하였다.124)전라도 구례군 오미동의 사례연구에서 실지 토지조사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紀語≫권 2, 1900년 3월;李鍾範,<韓末 日帝初 土地調査와 地稅問題>,≪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546쪽). 경상북도 義城郡 北部面의 野草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각 필지별로 전답과 草家·瓦家의 구별, 배미(夜味)의 기재, 양전방향, 토지형상, 四標, 실적수, 등급, 결부수, 전답주 및 작인 등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실지조사를 통해 실적수와 등급, 결부수를 계산하여 기록하고 사표명과 전답주명이 양전방향과 반드시 일치하도록 표기하였다.125)이영호,<光武量案의 기능과 성격>(≪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128∼131쪽. 야초의 말미에는 하루 측량한 토지면적을 마무리하면서 총실적수와 결부수를 표기하였다. 대개 하루의 측량 필지수와 결부수는 88필지에서 128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평균적으로는 121필지, 8結餘를 측량하였다. 이는 이전의 경자양전에서는 하루당 3결이 조사되었음에 비추어 광무양전은 보다 짧은 기간에 많은 토지를 조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126)宮嶋博史,<광무양안과 토지대장의 비교분석>(≪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민음사, 1997), 204쪽. 이렇게 작성된 야초 장부에는 아직 자호와 지번이 부여되어 있지 않으나 각 필지의 사표가 나란히 연속되어 있어서 양전을 거쳐간 동리나 평의 순서 그대로 표기되었으며 이후 양안의 정리과정에서도 그대로 준수되었다. 초기 양전과정에서 기록의 정확성 여부가 전체 양전 및 양안작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광무양전의 두 번째 단계는 각 도별로 ‘中草冊 量案’을 작성·정리하는 단계이다. 이는 군별로 양무위원과 학원들이 한데 모여 각 면별로 측량된 야초를 수집해서 전체 군단위로 새로 정리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들은 우선 일정한 면의 순서에 따라 각 필지별로 字號와 地番을 부여하였으며, 면적과 결부, 시주와 시작기재의 정확성, 사표와 시주의 일치 등을 수정하였다. 일부 지역의 중초책 양안에는 조사형식과 내용이 달리 기재된 것도 보인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 양안에서는 面 總目에 이전의 舊結數 및 戶數 총액을 조사한다든지, 충청남도 남부지역 양안에서는 家戶를 조사하면서 元戶뿐만 아니라 挾戶도 조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각 군별로 정리된 중초책 양안을 양지아문에서 모아 놓고 재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正書冊 量案’을 완성하는 단계를 밟는다. 양지아문의 조사위원들은 중초책 양안의 표지에 初査·再査를 붙여가면서 각 면별로 전답의 실적통계 및 결부수, 시주와 시작 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각 군현이나 도 단위에서 量田官吏가 나름대로 파악하여 중초책 양안에 기재된 구결총이나 전답주와 소작인의 표기 등은 삭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전국적인 광무양안은 통일적인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광무양안은 野草의 작성단계에서 대개 3개월 정도의 측량과정을 거치고, 중초책 양안에서 정서책 양안의 정리단계에서 거의 1년 이상 기간을 거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시 광무양안에서는 國家收稅地의 확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제 경작농지의 면적을 파악하여 종래의 結總보다 많은 新結을 찾아냈으며, 家屋稅나 戶口調査와 연계하여 垈地의 규모와 가옥 상태, 현거주자의 家戶구성여부 등을 정밀하게 파악하였다. 이는 광무양전이 지닌 목적 중의 하나였던 대한제국의 國勢調査로서의 성격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완성된 광무양안은 비로소 토지의 위치와 면적 및 토지소유자를 기재한 ‘土地調査簿’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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