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2. 광무양전·지계사업
  • 2) 양지아문의 설립과 양전시행
  • (2) 광무양안과 ‘시주’의 성격

(2) 광무양안과 ‘시주’의 성격

 지금까지 대한제국기 양지아문에서 추진한 양전사업의 결과물인 양안이 갖고 있는 기능과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異論이 제기되었다.127)이영학,<광무양전사업 연구의 동향과 과제>(한국역사연구회,≪역사와 현실≫6, 1991), 327∼343쪽. 초기 연구에서는 양안이 본래 토지에 대한 세를 부과하기 위하여 작성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登記簿의 기능도 있다고 보았다. 특히 광무양안은 토지소유권의 보호를 목적으로 발급되는 地契制度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128)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앞의 책, 1984), 336쪽.

 이에 대한 반론은 광무양전이 국가의 수조 대상지 조사과정에 불과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燕岐郡 東一面의 사례연구의 경우에서는 時主의 실명여부가 추구되었는데, 호적이나 족보와 상호 비교하였지만 실제 양안상의 호와 호적상의 호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동일인으로 확인된 167명 가운데에도 불과 48명만이 정상적으로 기록된 형태이고 나머지는 分錄과 代錄 등으로 형제들이나 사망한 선조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129)李榮薰,<光武量田에 있어서<時主>파악의 실상>(≪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 115∼123쪽.
―――,<光武量田에 있어서<時主>파악의 실상>2(≪省谷論叢≫23, 1992) 참조.
이로써 ‘起主’를 곧바로 ‘農家世帶’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며, 또한 시주와 시작을 토지소유자와 경영자로 단순화하기 어렵다는 점이 제기되었다.130)宮嶋博史,<量案における“主”の性格-1871年 慶尙道彦陽縣量案の事例>(≪論集 朝鮮近現代史≫, 姜在彦先生古稀記念論文集, 明石書店, 1996), 128∼131쪽.

 그런데 양안상의 시주 실체를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광무양전사업에서 추진된 농가 조사방식과 소유자의 파악과정에 보다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양전사업에서는 농촌사회에서 현실의 토지소유자와 경작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실제 量田事目으로 채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吳炳日의 ‘量田條例’에서는 “양전을 실시하기 전에 해당지역에 훈령을 내려 田主가 자기 성명의 표를 세워 境界를 판별하도록 할 것”을 채택하고 있었다.131)吳炳日,≪田案式≫,<量田條例>참조. 이렇게 전주의 자진신고를 기초로 하여 소유자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실제 대부분의 경우에는 地主들이 일일이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경기도 수원과 용인군의 토지조사과정에서 나타났듯이, 指審人이나 頭民·洞長들이 대신 보고했으며, 아니면 學員이 時作의 소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조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132)≪司法稟報≫乙, 42책, 光武 8년 6월 15일자<平理院檢事 洪鍾檍의 法部大臣 李址鎔에 대한 제64호 報告書>.

 양지아문의 양전방식 중에서 특이한 것은 전답주라고 간주되는 시주만 조사하지 않고 作人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작도 조사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 結名·結戶를 조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초기 양전지역의 하나인 온양군 一北面의 일부, 南上面, 西面 등이 해당된다. 여기서 시주와 시작의 기재란에 더불어 표기된 결명과 결호는 특정한 姓에다 奴名이나 戶名類의 이름을 조합시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구분 중초책 양안 정서책 양안 필지수(%) 전답면적:정보(%)
전·답주명-결명-작인명 시주명-시작명
A-a-A A-A 90(27.5) 29.10(21.2)
A-a-B A-B 243(35.2) 54.52(39.8)
a-a-a a-a 1(0.0) 0.13(0.1)
a-a-B a-B 5(0.7) 0.65(0.5)
A-A-A A-A 97(14.2) 14.65(9.8)
A-A-B A-B 141(20.4) 36.85(26.9)
A-B-B A-B 12(2.0) 0.93(0.8)
    690(100) 136.83(100)

<표 2>結名別 時主·時作 기재유형

*출전:최윤오·이세영,<光武量案과 時主의 실상>(≪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341쪽,<표 2>전재.

 위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결명은 전답주와 작인 사이에 위치하면서 다양한 관련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결명은 대부분의 경우(Ⅰ∼Ⅵ)에서 전주·답주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토지의 소유자가 결명을 借名하여 代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133)최윤오·이세영,<光武量案과 時主의 실상-충청남도 온양군 양안을 중심으로>(앞의 책), 340∼355쪽. 이렇게 결명도 기록한 것은 시주·시작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즉 종래 서로 분리되었던 수세장부와 양안을 일치시키는 동시에 조세납부자를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양안의 기재양식상으로는 현실의 조세납부의 대상자가 곧 토지의 소유자인 시주로 귀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사된 시주의 규정은 일반적으로 ‘양전조사 당시의 시점에서의 토지소유자’라는 의미로 간주되었다. 또한 ‘시주’의 표기방식은 초기 아산군 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양전관리인 李沂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특히 시주는 광무양전과정에서 양전관리에 의해, 곧 국가에 의해 일률적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실제로 충청남도 아산·온양·연기군 일부, 경기도 광주군 일부 및 수원과 용인군 전체의 중초책 양안에서 토지소유자를 전주와 답주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이후 정서책 양안에서는 모두 일률적으로 ‘시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여 양안상의 시주규정 자체를 토지소유자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대론도 제기되었다. 조선은 당초 國田制 이념을 大韓國國制의 기본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주는 단지 ‘인민의 임시적 내지 한시적 존재’임을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34)李榮薰,<量案上의 主 規程과 主名 記載方式의 推移>(≪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 민음사, 1997), 196∼197쪽. 이는 인민의 토지소유보다 상위에 위치한 국가적 토지지배의 우위성을 전제하고 있는 논의였다.

 이러한 時主의 기재방식과 관련해서 양안상에 기록된 토지소유자의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광무양안에는 전답주가 實名을 사용하든 代錄名을 사용하든 자신의 토지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행사하는 데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향촌에서는 해당 토지의 소유자명이 비실명이라해도 그 토지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대록이 문제시되지 않았다.135)최윤오·이세영, 앞의 글, 355쪽. 이는 당시 철도용지의 보상을 위해 지급된 명세서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토지소유자의 이름형태와 관계없이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국가에서 이들 戶名이나 假名으로 기재된 토지의 소유자와 그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136)이영호, 앞의 글, 179∼187쪽.

 또한 ‘시주’의 규정이 등장한 배경에는 당시 대한제국이 토지주권 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정책을 추진하려는 목적도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시주의 자격에는 조약상으로 허용된 지역 이외에 불법적으로 토지를 취득한 외국인의 소유권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地契量案에서는 비록 민유지에만 시주라는 규정이 적용되고 국유지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나 田畓官契에서는 민유지와 국유지를 막론하고 모든 토지의 소유자를 시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한편 양안상의 ‘시작’규정은 단순히 조세납부자로서 조사된 것이 아니라 소작인의 경작권을 보호하고 일정하게 보장해주려는 의도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37)최원규,<대한제국기 量田과 官契發給事業>(위의 책), 211∼212쪽. 따라서 조선 후기 이래 사적 토지소유권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독특한 재산상속과 권리의식이 형성되고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대한제국은 이러한 토지소유권과 더불어 농민의 경작권도 일정하게 보호하려는 정책방향을 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광무양안 자체를 ‘虛簿’로 규정하고 현실의 토지소유관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시의 토지소유관행을 고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의 시대적 전진성을 고려하지 않는 견해라고 하겠다. 양안상의 시주는 대한제국의 국가적 지배가 관철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이후 전개될 지계사업을 통해 관계 발급과정에서 재확인되고 수정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시주는 최종적으로 관계 발급과정을 통해서 ‘原始取得’의 소유권자로 사정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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