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부터 1904년까지 7여 년 동안 추진한 광무양전·지계사업은 근대적인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 목표 아래 전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양지아문이 주도한 양전사업과 지계아문의 양전·관계발급사업으로 전개되었다.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은 무엇보다도 ‘토지소유권의 법인’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160)왕현종,<광무양전사업의 다양한 성격과 좁은 시각>(≪역사와 현실≫5, 1991).
근대사분과 토지대장연구반,<‘내재적 발전론’을 가장한 또 하나의 식민주의 역사인식>(≪역사와 현실≫7, 1992).
이윤갑,<대한제국의 양전 지계발급사업을 둘러싼 제2단계 광무개혁 논쟁>(≪역사와 현실≫16, 1995). 이전의 양전사업과 달리 토지소유자에게 관계를 발급하였다. 즉 대한제국기에는 양전사업을 통하여 개별토지와 토지소유자를 조사하고, 그 토지소유자가 매매문기 등을 제출하여 현실의 토지소유자임을 확인하는 査定과정을 거쳐 토지소유권자로 확정되었다. 이 관계사업은 주도면밀하게 양전과정과 결합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私的 土地所有에 대한 근대적 法認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조선 후기 이래 지배적 소유관계인 지주적 토지소유를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그것을 토대로 하여 근대적 제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결국 이들 지주 부르주아 계층의 입장에서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을 추구한 것이었다.161)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앞의 책, 1984).
―――,<近代化過程에서의 農業改革의 두 方向>(≪한국자본주의 성격논쟁≫, 대왕사, 1988).
이에 대한 반론에서는 국가적 토지소유의 지배적 규정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양전이란 어디까지나 국가적 수취의 입장에서 그 수조지와 수조대상자를 확정하는 과정이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토지소유권의 조사의 측면에서는 추진주체의 의도가 있었을 지 모르지만 근대법적인 소유권 확정과 관리체계를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전사업이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파악하였다.162)宮嶋博史,≪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金鴻植 외,≪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민음사, 1990). 따라서 광무양전사업에서는 소유권 조사사업으로서의 성격은 하나의 擬制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163)李榮薰,<光武量田의 歷史的 性格-忠淸南道 燕岐郡 光武量田에 관한 事例分析>(안병직 외,≪近代朝鮮의 經濟構造≫, 비봉출판사, 1989) 참조. 그러한 사업은 도리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과 일본제국주의의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적 토지소유의 법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업의 목표와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토지조사와 관계발급에서도 이전의 모든 매매문기를 강제적으로 거둬들이고 새로이 관계로 환급함으로써 국가가 토지소유권을 공인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부동산의 소유권 등록과 이전 및 관련사항을 통제하도록 하는 강제규정이었다. 이렇게 구권과 관계의 교환과정을 통하여 그 시점 이후로는 관계가 소유권의 법적·실재적 權原簿로서 사적 토지소유권을 행사하는 문서가 됨을 의미했다. 양전사업에서 잠정적으로 조사되고 인정받았던 토지의 소유자인 時主가 관계발급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査定 이후에 확정된 토지소유권자가 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계발급으로 취득한 소유권은 어떤 이유로도 취소할 수 없는 국가로부터 추인받은 一地一主의 배타적 소유권으로서 ‘原始取得’한 소유권이었다.164)崔元奎,<대한제국기 量田과 官契發給事業>(≪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 민음사, 1995), 308∼309쪽.
양 사업의 중요한 차이점은 외국인에게 토지소유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사업에서는 당시 외국인들의 침탈이 빈번해짐에 따라 증대된 토지의 매매 혹은 양여의 경우뿐만 아니라 전당의 경우에도 관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165)≪田畓官契≫뒷면 발급조항 참조. 또한 대한제국에서는 일정하게 소작농의 제권리를 보호하려는 정책이 취해졌던 점이다.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농민적 토지소유나 소작권 등 농업에 대한 제권리는 배제되고 농민수탈을 통해 식민지농업체제를 갖추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사업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이 정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한제국 고유의 양전·관계발급사업에 의해 형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말 대한제국의 토지개혁정책은 양지아문과 지계아문의 단계적 발전을 거치면서 본래 의도한 바대로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의 확립과 외국인의 토지침탈 방지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전·지계사업은 한국의 토지제도 발전과정에서 볼 때 한국 중세사회의 최종적인 해체를 이룸과 동시에 근대국가의 형성에 경제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王賢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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