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3. 산업진흥정책
  • 1) 광무정권과 궁내부

1) 광무정권과 궁내부

 光武政權 경제정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 ‘改革性’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상공업정책의 관점에서 논쟁이 이루어졌으나 근래에는 量田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근대화정책에 관해 국내외적 정치환경을 포함하여 보다 전면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무정권의 産業振興政策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殖産興業政策과 비교하여 검토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식산흥업은 명치기 일본이 미성숙한 부르주아적 발전을 기초로 근대산업기술의 도입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의 온실적 조장을 의도한 정책을 말한다. 明治政府는 근대기술의 도입과 교육을 실시하고, 광범한 분야에 관영공장을 창설·운영하였으며 각종의 試驗場·種畜場·育種場 등을 설립하여 농업기술이나 신종의 도입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政商을 육성하거나 금융기관과 재정제도를 정비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다.

 광무정권은 일본의 근대화정책과 유사한 다수의 산업진흥정책을 추진하거나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식산흥업정책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명치유신과 같은 정치변혁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근본적인 정치·경제제도의 개혁에 기초한 본격적인 식산흥업을 추진하지는 못하였으며, 그 성과도 미흡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閔妃시해사건 이후 러시아공사관으로 播遷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친일 개화파정권이 무너지고 근 1년이 경과한 1897년 2월 慶運宮으로 환궁하였다. 고종은 같은 해 8월 光武라는 연호를 제정하고,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稱帝建元은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국임과 동시에 전제군주제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고종은 이후 1899년 8월에<大韓國國制>를 마련하여 전제군주제의 기본을 보다 구체화하였다.

 고종은 갑오개혁에 대한 광무정권의 정책방향을 ‘舊本新參’으로 하여, 법과 제도에 있어서 舊法을 기본으로 하되 갑오 이후의 신법을 참작하여 향후 방향을 결정하도록 하였다. 광무정권은 개화파정권의 개혁사업을 그대로 계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개화파정권의 개혁사업은 본래 농민전쟁의 수습책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국내의 지식층에서는 이의 필요성을 누구나가 절감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터였으며, 국왕 자신도 개혁사업 그 자체의 필요성은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개혁사업이 친일정권에 의해서 단행되고 있었다는 이유로 해서 부정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166)金容燮,≪朝鮮近代農業史硏究≫(一潮閣, 1975), 506쪽. 따라서 광무정권은 이런 新舊의 두 입장을 조정하여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광무정권이 기본으로 삼은 구법이란 전통적인 법과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의 구법은 개항 이후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추구하여 온 정책방향과 그 귀결로서의 제도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본신참’이란 동도서기론보다 서양의 근대문명을 보다 전향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의미로 해석167)이헌창,<갑오·을미개혁기의 산업정책>(≪한국사연구≫90), 67쪽.될 수도 있다.

 광무정권은 구법 즉 전통적 정치체제인 군주제를 기본으로 하고, 서양의 기술과 기기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광무정권은 정부내에 농상공부를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사실상 궁내부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황실이 중심이 되는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광무정권은 황실의 위상을 제고하고, 황실재정을 확충하는 것을 바탕으로 근대화사업을 추진하였다. 먼저 황제권력의 강화를 위한 법령을 정비하고, 고종의 직계 가계를 높이는 등 황실 위상의 제고작업을 추진하며, 치안기구를 증강하고,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168)李潤相,≪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용의 변화≫(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55∼70쪽 참조.

 고종이 무엇보다 궁내부 및 여타 직속기구를 강화·신설한 것은 전제군주제의 추구라는 요인 외에 의정부에 대한 장악력이 약하였던 것도 그 원인이었다. 당시 의정부에 소속된 각부 대신들은 대부분 외세와 연결되어 있거나 외세의 압력을 막아낼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종이 자신의 의지대로 국정을 운영하기에 적합하지 않아169)위의 책, 71쪽. 황제 직속기구를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의 직속기구인 궁내부를 크게 확대하고 여기에서 주요 정무와 사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신설된 황제의 직속기구는 元帥府·扈衛隊·表勳院·耆老所 등 황제와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과 通信院·量地衙門·地契衙門·典圜局 등 근대화사업과 관련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궁내부에 설치된 근대화사업을 위한 기구들로는 通信司·鐵道院·西北鐵道局·礦學局·博文院·綏民院·平式院 등이 있었다. 사실 광무년간에 근대화를 추진하는 정부기관으로 농상공부가 존재하였지만170)농상공부 예산은 1900년까지 급속한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농상공부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사업비(주로는 우체·전신사업비이고 기타 인쇄·제언수축·제염·철도·잠업사업비 등이 있다)중 우체·전신사업비가 황제직속으로 설치된 통신원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농상공부 예산의 감축은 근대화사업에 있어서 황실직속 기구의 역할 증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李潤相, 위의 책, 148∼150쪽 참조). 사실상의 주요 사업은 거의 모두가 황제 직속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광무정권은 궁내부를 확대하면서 황실재정의 확충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李容翊이었다. 이용익은 1897년 4월에 典圜局長 그리고 12월에 各道各郡金銀銅鐵煤炭各礦監督이 되었고, 1898년 7월에는 鐵道司監督을 겸임하게 되고 곧 이어 宮內府所管各道各礦監督으로 임명되었다.171)金載昊,≪甲午改革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관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132쪽. 그는 1899년 2월에는 內藏司長이 되었으며 이후 내장사가 內藏院으로 개편된 다음 內藏院卿이 되어 1904년까지 재임하고 일관되게 황실의 재정수입을 증대하고자 하였다.

 광무정권은 우선 1898년 내장사의 업무에 ‘蔘政과 所屬各礦’을 첨입하여 광산과 삼포를 내장원에서 전관하도록 하였다. 내장원은 홍삼을 전매하고 또한 삼세를 징수하였다. 그리고 광산에서는 礦軍의 수에 따라 礦稅를 징수하였다. 또한 황실은 1899년에 屯·牧土를, 그리고 1900년에 驛土를 내장원에 이속하였다. 둔토는 궁내부 각 아문 소속의 屯田과 度支部 소속의 정부 各司의 둔전이 내장원의 관할로 들어온 것이다. 역토는 갑오개혁 이후 농상공부·군부를 거쳐 1898년 11월 이후 탁지부 소속으로 있던 것을 내장원으로 이관한 것이다. 또한 광무정권은 광무사검사업에 의해 역토·아문둔토의 강권적 확대를 도모하였다. 내장원은 이들 토지에서 도조를 징수하였다.

 이밖에 내장원은 각종의 잡세를 징수하였는데 1899년에 沿江稅를 이속하는 등으로 다양한 통상세(旅閣主人稅·客主口文稅·浦口稅·沿江稅 등)를 징수하였다. 내장원은 1900년에 漁稅·鹽稅·船稅를 이속시켜 그 징수를 강화하였다. 또한 仁川紳商會社 등의 각종 특권회사의 독점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일정한 상납금을 징수하였다. 이외에도 내장원은 고리대 활동을 통한 殖利錢, 도축업자로부터의 包肆稅 등을 징수하였다. 내장원은 또한 외획을 통해 공전을 이용한 貿米활동에 종사하였으며, 그밖에도 각종의 잡세 징수권을 장악하고 그 징수를 강화하였다.

 황실의 재정강화 과정에서 특히 이용익은 거의 언제나 전환국을 장악하여 주조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전환국은 갑오 이후 수차례에 걸쳐서 관제가 바뀌면서 어느 때는 탁지부 소속의 一官衙로서 혹은 독립관아로서 주조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주조사업에서 기대되는 주조이익은 정부의 예산에 계상되었지만 사실상 그 주조이익의 주된 흡수자는 내장원이었다. 특히 전환국이 독립관아인 경우에 전환국은 직제상 황실에 직속되어 있었다.

 다양한 방법에 의한 황실재정의 강화책은 확실히 갑오개혁이 추구했던 자유시장·자유상업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소생산자 및 상인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독립협회는 이용익의 황실재정 강화책을 비판하였다. 독립협회는 이용익이 관장하는 금광개발과 삼정의 독점 및 주전사업 등이 모두 전국에 폐만 되는 것이며 이용익을 그대로 두면 백성이 치부를 못하고 백성이 치부를 못하면 나라가 진보를 못하는 법이니 이용익을 해임하고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다.172)≪독립신문≫, 1898년 8월 2일. 갑오개화파의 한 사람인 김윤식도 이용익이 光武査檢을 통해 도조징수를 강화함으로써 민정이 소요하게 되고, 이용익은 답주로부터 문권을 빼앗고 있다고 비판하였다.173)金允植,≪續陰晴史≫권 10, 1901년 8월.

 광무정권은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다양한 근대화사업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광무정권은 철도·운수·광산 등의 분야에서의 이권을 지키고 근대화를 추진하며 기업을 육성하는 이외에, 근대적 화폐금융제도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도시를 정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1899년에 시전과 보부상단을 통합한 商務社를 설립하여 외국상인으로부터 상권을 보호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1900년에는 상공학교의 관제를 발표하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였으며, 농상공부에 잠업과를 설치하고 잠업을 장려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나아가 다른 한편에는 光武量田을 실시하고 地契를 발행하여 私的土地所有를 강화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나름대로 부분적으로 한국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무정권의 산업진흥정책이 일본의 식산흥업정책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유보가 필요하다.

 광무정권의 경제정책의 특징은 갑오개혁기의 경제정책과의 비교를 통하여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된다.174)갑오개혁기의 경제정책의 구조에 대해서는 吳斗煥,<甲午經濟改革의 構造와 性格>(≪社會科學論文集≫3, 인하대 사회과학연구소, 1985) 참조. 무엇보다도 광무정권은 정치체제에 있어서 갑오정권의 입헌군주제와 달리 전제군주제를 추구함으로써 경제정책에서도 상이점을 초래하였다. 첫째로 갑오개혁이 농업부문에서 賦稅의 金納化를 통해 吏胥輩의 수탈체계를 해체하고 역둔토의 불하 등을 통해 서민지주의 발전을 꾀한 반면 광무정권은 국유지를 확충하고 도조징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둘째로, 갑오개혁은 재정면에서 재정기관의 통일을 기한 반면 광무정권은 황실의 재정권을 강화하였다. 셋째로, 상업정책에서 갑오개혁이 봉건적 도고를 혁파하고 민영기업을 장려하며 상품유통의 자유를 추진한 반면, 광무정권은 개항장 객주회사에 대한 봉건적 수취체계를 재편하고 각 포구에서의 잡세징수를 강화하는 등의 상반된 정책을 취하였다.

 광무정권은 왕권을 국권과 동일시하여 황실의 재정확충과 전제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근대적 기술과 기기의 도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책은 근대화정책이 근본적으로 민권의 신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국부가 아닌 민부의 형성을 위한 방향의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배치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광무정권은 다양한 근대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추구했다기보다는 민족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위기의식하의 방어적 입장에서 왕권을 국권과 동일시하여 황실의 재정확충과 전제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전제위에서 근대적 기술과 기기의 도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175)吳斗煥,≪韓國近代貨幣史≫(한국연구원, 1991), 187쪽.

 따라서 광무정책은 외형적인 근대화정책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추진의 새로운 정치주체가 형성되지 못하였고, 또한 국제환경이 청일전쟁 이후의 제국주의적인 것이어서 성공의 조건을 결여한 것이었던 점에서 명치정부의 식산흥업과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는 가운데 다양한 분야에서 산업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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