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3. 산업진흥정책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2) 화폐·금융

(2) 화폐·금융

 금융업 분야는 한국정부가 관심을 가진 대표적 분야의 하나였다. 개항에 따라 외국계 은행들이 무역에 따른 금융의 편의와 한국에 진출한 外商의 자금조달을 위해, 나아가서는 한국의 재정자금을 이용하는 이권과 화폐발행권을 장악하기 위해 진출하였다. 일본의 第一銀行·第十八銀行·第五十八銀行을 비롯하여 香港上海銀行·露韓銀行 등의 외국계 은행이 한국에 진출하였다.

 한국정부는 비교적 일찍부터 금융의 편의를 이해하고, 나아가서 화폐발행에 따른 주조이익을 얻고자 은행을 설립하고 본위화제도를 마련하여 이를 기초로 지폐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한국정부의 노력은 이미 80년대 중반 무렵에는 시작되었지만 이후 갑오년간에 이르기까지 한국계 은행의 설립을 위한 노력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賦稅의 金納化가 실시되면서 稅穀換金과 貿穀의 편의를 위한 금융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였다. 이에 따라 갑오년에 米商會社·共同會社 등이 설립된 바 있었지만 은행은 1896년 이래 정부관료와 황실의 적극적인 참여와 출자에 힘입어 비로소 출현하였다. 당시에 설립된 은행으로서 지금도 어떠한 연계로든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는 漢城銀行·大韓天一銀行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한성은행은 1897년 설립되었으나 1900년에 파산하였으며 이후 公立漢城銀行으로 재출발하였으나 경영권이 일본인에 장악되어 민족계 은행으로서의 명맥을 충분히 이어받지 못하였다.195)高嶋雅明,≪朝鮮における植民地金融政策史の硏究≫(大原新生社, 1978), 118쪽. 그러나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 光武政府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설립되었으며, 국고금대여 등의 도움을 받아 화폐정리사업시까지 순조롭게 영업을 지속하였다. 다만 대한천일은행도 한국 독자의 중앙은행제도나 화폐제도가 설립되지 못한 가운데 지점망도 인천지점이 있는데 그쳤다.

 한국정부는 금융제도의 수립 노력과 함께 화폐제도의 근대화와 이를 토대로 한 지폐의 발행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무정권의 근대화 노력과 그 한계는 화폐제도의 개혁 노력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정부가 화폐제도 및 금융의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개항 직후부터였다. 1880년대에 이미 금융제도 정비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1891년에는 은본위제도의 수립을 위한 조치가 있었지만 실효는 없었다. 그리고 1894년 甲午改革時 賦稅의「金納化」와 함께 근대적 은본위화제도의 마련을 위한<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하였지만, 이것마저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地金의 준비가 부족한 가운데 주조이익을 얻기 위해 보조화인 백동화를 남발하게 되었다. 특히 광무정권은 황실재정강화책의 일환으로 백동화를 남발함으로써 화폐유통권의 분할과 인플레라는 폐제문란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독자의 근대적 본위화제도나 금융기관이 정비되지 못한 가운데 외국계 금융기관의 침투는 계속되었다. 개항 직후 한국에 제일 먼저 진출한 일본의 제일은행은 특히 금융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하였다. 제일은행은 일찍부터 일본정부의 국고금 취급,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의 제공, 朝鮮産金의 흡수 등 특수업무를 수행하면서 총세무사 묄렌도르프(P. G. Möllendorff, 穆麟德)의 환심을 얻어 한국의 관세금 취급은행이 되어 한국 재정자금의 큰 부분을 예금으로 흡수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제일은행은 청일전쟁 후 시부자와(澁澤英一)가 중심이 되어 한국의 중앙은행이 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는 한국이 幣制紊亂한 상태임을 기화로 일본정부의 허가를 얻어 화폐적 성질을 가진 一覽拂於音인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실질적으로 한국의 중앙은행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정부가 존속하고 한국 상민들의 반대운동이 활발하였으므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외국계 금융기관의 침략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정부는 독자적으로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은행권을 발행하고자 하였다. 광무정권은 백동화 남발로 인한 폐제문란을 해결하면서 또 다른 화폐발행 이익을 얻기 위해 1901년 금본위제도의<貨幣條例>를 공포하였다.<화폐조례>에는 화폐의 단위를 圜으로 하고, 본위금화·보조은화·보조백동화·보조적동화 등의 화폐를 발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地金準備를 위한 프랑스 등으로부터의 차관 도입계획이 실패하고 본위화는 주조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03년에는<中央銀行條例>와<兌換金券條例>를 제정하여 중앙은행제도를 마련하고 금본위지폐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르면 300만환의 자본금으로 설립되는 중앙은행은 해관세를 포함한 모든 세금과 국고금의 수납을 담당하며 兌換金券의 발행을 전담하도록 하였으며, 태환금권은 금화와 금괴를 지불준비금으로 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에서 발행한 증권과 상업어음도 지불준비금으로 하여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중앙은행의 설립, 본위화제도의 수립, 금융기관의 정비라는 비교적 일관된 구상을 가지고 한국정부로서는 독자적으로 추진한 마지막의 금융근대화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용익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러시아 및 벨기에와의 차관교섭을 재개하고 일본 大阪製銅會社의 마스다(增田信之)에게도 차관을 요청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광무정권의 금융근대화정책은 당시 한국내에서 많이 유통하던 일본화폐의 통용을 금지하고 화폐발행권을 정부에 통일시킬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금본위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것이 성공한다면 민족자본의 젖줄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정부의 노력은 금준비를 위한 차관도입의 실패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196)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吳斗煥,<白銅貨 인플레이션과 幣制危機의 深化>(앞의 책) 및<韓末 借款問題의 展開過程>(≪한국민족운동사연구≫8, 1993) 참조.

 그러나 본위화제도의 수립은 차관도입으로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화폐발행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지폐발행을 포함한 화폐제도의 근대화는 위험한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식산흥업과 그에 기초한 산업의 발달로 국제수지가 개선될 수 있어야 본위화제도는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舊本’을 토대로 한 광무정권은 민권·민부의 성장을 위한 근본적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으며 황권과 황실재정을 강화하는 방향에서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 점이 광무개혁의 특징이자 주된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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