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3. 산업진흥정책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3) 상공업

(3) 상공업

 개항 이후 개화파들은 근대화를 위한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전에는 대체로 ‘상업의 발흥을 통하여 국가재정의 기틀을 튼튼히 하며 나아가서는 산업자금의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럽의 중상주의 사상을 연상케 하리만큼 상업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강조’197)崔泰鎬,≪近代韓國經濟史硏究序說≫(국민대출판부, 1991), 312쪽.하였다. 이에 반해 90년대 이후의 개화파는 ‘상업보다는 근대공업의 진흥문제, 즉 적극적인 공업화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198)위의 글.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들은 공산품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국내에 퇴적된 유휴노동력을 흡수할 수가 있어 이른바 고용효과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수입해서 소비하는 공산품을 국내생산품으로 대체하여, 즉 수입대체산업을 국내에서 육성하게 된다면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게 되어 국내의 재보가 해외로 유출되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개화파는 민간인의 근대적인 공장설립을 권장하는 한편 가장 유망한 민간공업부문으로서 직조업·양잠업·연초제조업 등을 제시하였다.

 정부는 1880년대에 이미 典圜局·製紙局·火藥局·機器局 등을 설립하여 공업부문에 관심을 나타낸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당초 관리의 口腹을 살찌우는 데 그치고 혹은 業이 비로소 이루어져도 그것을 계속하는 것이 없고 공연히 國資를 들여 정부에 繁累를 남김에 지나지 않는”199)<二十六年中仁川港商況年報>(≪通商彙纂≫8 부록, 1894. 8). 상황이었다. 이후에도 정부에서는 근대산업기술의 도입과 민간인의 근대공업을 유발하기 위하여 각종의 관영모범공장을 설립하였으며 특히 갑오개혁 이후에는 계속적인 관제개편, 또는 신기구의 창설 등을 통하여 산업정책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정부는 1899년에는 민간인의 농공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농상공부에 勸業委員會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매주 토요일 하오 1시에 동위원회를 개최하였고, 또 1900년에는 양잠진흥정책의 주무관청으로 농상공부에 잠업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상공업 부문의 근대적인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각종의 교육기관을 설치·운영하고자 하였다.

 또한 정부는 1899년에 농사개량과 製鹽法의 보급·지도 등을 목적으로 農事 및 水産試驗所를 설치하고, 1901년에는 일본에서 제지기술자를 초빙하여 전환국·洋紙製造工場의 설립을 계획·추진하였으나 도중에 중단되었다가 1905년에 이르러 다시 공장건설을 추진하였다. 1903년에는 도량형의 제조와 검사 등을 목적으로 平式院에 度量衡工場을 설립하였으며 1905년에는 각종의 銅版과 活版印刷 등을 목적으로 度支部 印刷局을 설치하였다.200)崔泰鎬, 앞의 책, 316쪽.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라 민간에서도 근대적인 생산공장이 설립되었다. 근대공업을 지향하는 민간의 상공업은 이미 1870년대 말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201)1877년의 김동원의 제지공장, 1881년의 장상국의 製陶工場, 1882년의 해룡상회(피혁공장), 1883년의 김문삼 제지공장 및 洪城製釜工場 등이 있었다(조선대 역사연구실편,≪朝鮮史≫, 253쪽). 이들은 순탄한 발전과정을 걷지 못하고 대부분이 곧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에는 賦稅의 金納化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 일층 심화된 가운데 민간에서도 상공업이 새롭게 싹트고 있었다. 시장의 확대 과정에서 민간기업들이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결과 광무년간에 근대적 상회사가 설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적 산업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광무정권은 갑오개혁기의 자유주의적 상업정책과 달리 특히 상업회사에 관해서는 특정 도고에게 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영업의 특권과 독점권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영업세를 징수하여 궁내부에 바치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인천의 紳商會社, 평안도 麴子會社, 무안의 士商會社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상회사가 일종의 收稅都賈로서 설립된 것이 많고 정부의 보호와 함께 침탈의 방지가 존립의 중요 조건이었으므로 이에는 관료들의 참여가 많았다.

 그러나 다수의 근대적 상회사들이 싹트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공업발전은 미약하고 민족공업은 쇠퇴하고 있었다. 당시의 관찬사료는 한국에 수공업적 가내공업 이외의 공장제 생산이 존재하지 않고, 생산기술이나 생산량의 수준이 낮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공업이 부진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으나 ‘최근 2세기는 외국과의 교통이 없는 것, 행정이 가혹하여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고 분기심을 소멸시킨 것, 가혹한 세금징수가 빈번하여 국민생활의 질서를 파괴한 것, 교통이 불편하여 수출의 길이 두절된 것 등’202)러시아大藏省,≪韓國誌≫(1907), 63쪽.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비록 자급적 성격이 강하였지만 직물을 비롯한 다양한 품목의 공산품이 생산되었으며 한국의 공업은 미숙한 채로 질박하고 견고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전통적 농업과 결합되어 있었다. 당시의 공업 중에서 중요한 것은 직물업·제지업·철공업 및 도자기 등이었고 이 중에서도 직물업 특히 면직물업이 중요하였다.

 개항기 면직물업의 변천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에는 특히 청일전쟁 이후 토포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지적이 있다.203)梶村秀樹,<李朝末期の綿業の流通および生産構造>(≪朝鮮における資本主義の形成と展開≫, 龍溪書舍, 1977). 면직물 이외의 麻布·絹布 등의 직물업도 수입이 증가하는 가운데 그 생산이 증가할 수는 없었다. 다만 토포의 전반적인 생산위축에도 불구하고 방적사의 수입이 증가하고 이를 이용한 방적토포의 생산이 증대되고 있었던 만큼 이를 통한 근대 직물업의 발전을 추적하여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선 도시에서는 전업적인 생산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청일전쟁 이후 서울에서는 직물업 분야에 자본주의적 경영이 소수나마 성립되어 있었다.204)權泰檍,<朝鮮後期 織物業의 變動>;<日帝時期 韓國의 織物業>(≪韓國近代綿業史硏究≫, 一潮閣, 1989). 그리하여 당시의 직물업소로는 漢城 南署 藝洞 織造緞布株式會社, 鐘路織造社, 南竹洞組織所, 東嶺洞 漢城製織會社, 中谷染織工所, 淳昌號, 美洞織造會社, 朴承稷染織會社, 京城織紐合名會社 등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직물업도 정부의 보호가 미흡한 가운데에서 경영이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수공업 직물생산이 위축되어 있는 속에서 부분적으로 근대적 商·工會社들이 설립되고 있었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토포생산의 위축으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개항기 한국의 공업은 쇠퇴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산업발전을 위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근대화를 위한 정치변혁을 토대로 전면적인 체제개혁과 시장보호를 통해 식산흥업을 추진할 수 없었던 만큼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이 결과 식산흥업을 위한 노력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한 가운데 직물 이외 분야의 공산품들도 수입상품이나 거류지공업의 경쟁 속에 쇠퇴하였다. 종이·도자기·금속제품 등 직물에 다음가는 주요한 공업들도 수입상품의 증대과정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205)개항기 공업의 변천에 관해서는 吳斗煥,<개항기 토착공업과 이식공업>(≪工業化의 諸類型 Ⅱ-韓國의 歷史的 經驗≫, 經文社, 1996) 참조.

 개항으로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된 한국이 성공적인 공업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입대체나 수출지향의 어느 쪽에선가의 성공적인 공업발전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자주적이며 일관성 있는 보호·육성책이 절실하였다. 그러나 무방비로 개방된 시장에서 한국의 면직물업이 면포 주도의 면직물 수입구조 속에서 기계제 공산품과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다른 한편 수출상품의 개발과 공업화 그리고 그 분야로의 노동의 이동 등은 일어나지 못하고 과잉노동력의 농촌퇴적과 지주제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화폐화의 진전에 따라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조건인 시장의 확대는 이루어지고 있었던 만큼 광무년간에는 한국의 민간기업들이 다수 싹트고 있었다. 광무년간에 설립된 근대적 상회사들은 직조업 이외에도 은행·해운회사·방직회사·철도회사·전기회사·보험회사·광산회사 등 다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회사의 설립은 전반적인 상공업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토착공업의 쇠퇴 위에 형성된 근대적 상공업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토착공업의 쇠퇴의 다른 한편에서 일본인 거류지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제국주의적 이식공업이 발전하고 있었고 이것은 점차 근대적 공장제 형태로 발전하면서 식민지적 공업발전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항기 근대적 상회사들의 발전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이 바로 민족자본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 근대적 상회사의 설립을 위한 근대화 정책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추구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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