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3. 산업진흥정책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4) 광산

(4) 광산

 광산개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개항 후 비교적 일찍부터 인식되고 있었다. 1880년대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부국강병을 위한 開鑛에 대한 논의가 고조되면서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광업개발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개광지가 증가하면서 1887년에 內務衙門 주관 아래 礦務局을 설치하여 각 감영에서 관장하고 있던 지방의 광산사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206)≪高宗實錄≫, 고종 24년 4월 5일. 이어 1888년에는 최초로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다.207)文一平,≪韓米五十年史≫(조광사, 1945), 170쪽.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는 工務衙門에 礦山局을 두었으며, 農商衙門에 地質局을 두었다. 이후 1895년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통합되어 농상공부가 설립될 때 농상공부 산하의 광산국이 되었다.208)≪高宗實錄≫, 고종 32년 3월 24일.

 농상공부는 1895년 5월 砂金開採條例를 발포하여 체계적인 광세 수취기구를 마련하였다.209)<사금개체조례>에 의하면 광세 수취기구는 농상공부→영파원→세감→덕대→광부(연군, 점군)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 사금개채조례는 광산개채과정을 명문화하였지만 사인에게 채굴권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관리를 임명하여 광산의 개채와 관리를 담당하도록 한 점에서 조선 후기 이래의 設店收稅制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한편 정부는 일본인 광산기사 니시와다(西和田久學)를 고빙하여 광산기술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까지 기본적으로 광산은 농상공부의 관할에 속하였다. 농상공부는 개채할 곳을 정하고, 另派員을 파견하여 개채사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영파원이 보증한 稅監에게 收稅業務를 맡기고 있었다.210)박기주,<개항기 조선인 금광업의 실태>(≪경제사학≫20, 1996). 그러나 영파원을 주축으로 하는 농상공부의 광산관리는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 중단되었는데, 이는 이용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용익은 1896년 궁내부 各鑛監理에 임명되어 종래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던 2∼3개소 광산의 운영을 관장하면서 농상공부의 소관까지 포함하여 전국 각지의 광산에서 세금미납을 엄중히 징수하여 황실재정에 충당하였다.211)高承濟,≪近世韓國産業史硏究≫(大東文化社, 1959), 329∼330쪽. 이후 그는 1897년 4월 西北諸府金鑛監理에서 해임되었다가 12월 전국 각광을 총괄하는 各礦監督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이용익은 정부의 광산관리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정부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1898년 1월 국내 철도·광산의 외국인 합동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공포하였으며212)≪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광무 2년 1월 12일. 이어서 6월 28일에는 유망성이 있는 주요 광산 43개소를 농상공부 관할에서 궁내부로 이속시켰다.213)≪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광무 2년 6월 28일. 한편 같은 시기에 궁내부 관제가 개정되어 內藏司가 소속 광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이용익은 1898년 7월 18일 농상공부 소속의 監督各道各郡金銀銅鐵煤炭各礦事務의 직책을 사직하고 7월 20일 宮內府所管各道各礦監督事務를 맡아 이제 궁내부 소속 광산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214)楊尙弦,≪大韓帝國期 內藏院 財政管理 硏究-人蔘·礦山·庖肆·海稅를 중심으로≫(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92쪽. 그리고 1899년 2월에는 서북 3도 즉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농상공부 소관 광산들이 또 다시 궁내부로 이속되었다.215)≪독립신문≫, 1899년 2월 24일. 그리고 1899년 8월 궁내부 재정담당 부서인 내장사를 내장원으로 개칭하고 업무를 확대하여 광무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이어서 1901년 6월에도 종래 농상공부에 소속되었던 8개소의 광산을 궁내부 소속으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1904년 9월에는 충북 음성과 경남 합천의 금광을 이속하였다.

 광산의 이속과 함께 관제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우선 1900년 광산국내에 鑛務學校를 설립하는 관제가 발포되었다. 1902년 2월 농상공부의 광산국이 폐지되고 宮內府에 鑛務局이 설치되면서 광무학교도 궁내부에 소속되었으며 곧 광무국은 鑛學局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1904년 1월 다시 농상공부로 부속되었다. 1905년에는 농상공부 관제를 개편하여 농광국에 鑛務課를 설치하였다가 1906년 2월 12일 농상공부 분과규정에서 다시 광무과로 개설되었다.216)李培鎔,≪舊韓末 鑛山利權과 列强≫(한국연구원, 1984), 37∼38쪽.

 광산 官署가 소속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광산개발 노력은 지속되었다. 원칙적으로 한국정부는 독자적인 개발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자본과 기술부족 및 외압으로 인하여 여전히 중요 광산들이 외국에 양여되고 있었다. 특히 1895년 이후 외국의 광산이권 획득 요구가 강렬하여 1895년 7월에 운산금광이 미국에 개채 허락되었으며, 1898년에는 강원도 金城郡 堂峴金鑛採掘權을 독일의 世昌洋行에 허용하였다. 그리고 1900년 3월에는 평안도 殷山金鑛을 그리고 1905년에는 遂安金鑛의 특허권을 영국에 허용하였다. 한편 일본에게도 1900년 稷山金鑛 채굴권을 허용하였다.

 이권을 탈취 당하는 다른 한편에서 국내적으로 궁내부는 각도에 감리를 임명하여 도내의 광업을 관리케 하였으며 각 광산에는 별장을 파견하여 광세의 징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종래의 국고에 수입되었던 광세의 대부분이 궁내부로 귀속되었다.217)李培鎔, 위의 책, 30쪽. 한편 일제는 1906년 6월 자기들 주도의 광업법을 공포하면서 帝室鑛山規程을 폐지하여 궁내부 광산도 자유롭게 외국인의 이권획득의 목표물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광무년대의 내장원의 광산관리는 광산이권의 보호나 수세권의 장악에 그치지 않고 광산개발에 대한 지원을 하거나 혹은 직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장원은 공전을 대여하거나 광산기계를 구입하여 광산경영을 지원하기도 하였고 광산에 필요한 식량조달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장원은 1903년 9월부터 1904년 12월까지 황해도 수안금광을 직영하였으며, 1903년 10월에서 12월까지 順安금광을 직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01년 5월부터 1907년 8월까지는 平壤煤礦을 직영하였으며,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 鏡城煤礦을 직영하였다. 내장원은 수안금광과 평양매광에 근대적인 광산기계를 동원하는 등 광산경영의 근대화에 노력하였다.218)楊尙弦, 앞의 책, 116·126∼127쪽.

 그러나 내장원의 광산개발에 대한 각별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에 의해서 사금이 아닌 금광 등의 광산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정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국민의 반대여론이 고조되면서, 동년 7월 한국인 민간실업가에 의해 개간사업과 광업전반을 담당할 農鑛會社가 설립되었다. 이 농광회사는 우선 외국인에 양여한 이권관계를 일일이 조사하여 내외상민의 각기 소유한 권리를 밝혀내고 단계적으로 국내인의 상업에 흡수하여 민족자본의 확립을 도모하겠다고 기약하였다. 그러나 취약한 정부 아래서 이것이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광무정권의 광산개발에 대한 관심은 민족자본에 의한 실질적 광업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다만 收稅의 증대와 황실로의 집중을 가져온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광무정권의 경제정책이 개혁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광무년간에 황실이 중심이 되어 교통운수, 화폐금융, 상공업 그리고 광산 등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약간의 발전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외에도 교육제도의 마련이나 서울의 도시정비 등에서도 새로운 면모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문물의 도입에 그쳤던 것이고 강력한 주체의 형성 위에 한국의 자주적 발전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질적인 전환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광무정권의 근대화 정책의 특징은 정책 자체의 내용에 있다기보다는 그것들을 황실 중심으로 추진한 데에 있었다. 물론 정책 내용이나 현실에의 집행과정에서 광무정책은 이전에 비해 새로운 것도 있었지만, 때로는 갑오개혁기에 비해 후퇴한 것으로 평가되는 내용도 있었다. 광무정권은 大韓이 전제군주제임을 내외에 선언하고, 내장원을 중심으로 황실재정을 강화하면서 황실을 중심으로 경제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와 함께 제 부문의 근대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내각을 중심으로 한 재정기관의 통일과 이를 주체로 하는 근대화와 달리 황실 중심의 방식은 과연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구현하고 있는 개혁적인 성격의 것이었는가.

 개항으로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된 한국이 성공적인 공업발전 그리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입대체나 수출지향의 어느 쪽에선가의 성공적인 공업발전이 이루어져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자주적이며 일관성 있는 상공업 보호·육성책이 절실하였다. 정부는 전면적인 국정 및 재정의 개혁을 통해 재정의 수입을 증가하고 지출을 절약하여야 했으며, 동시에 외상에 대한 통제를 통해 민족자본을 육성하여야 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그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정권수립 과정이 외세의존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광무정권도 높은 자주의식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할 내외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광무정권은 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되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내적으로도 국내의 모든 정치세력을 통괄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민중적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되지 못하였다. 상대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 황실의 활동반경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광무정권이 절대왕정에 걸맞는 강력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포괄적 근대화의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광무정권은 적극적으로 포괄적 개혁을 추구했다기보다는 민족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위기의식하의 방어적 입장에서 왕권을 국권과 동일시하여 황실의 재정확충과 전제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하였으며 그런 전제 위에서 근대적 기술과 기기의 도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이 막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러한 소극적 전제주의의 강화만으로 식민지화로의 길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吳斗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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