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4. 대한제국기의 자강·구국교육정책
  • 3) 구국교육정책과 의무교육운동

3) 구국교육정책과 의무교육운동

 자강교육정책과 운동은 러일전쟁과 이에 승리한 일제의 한국식민지화 정책 추진으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지배층의 국가자강주의 교육정책과 운동은 러일전쟁으로 국가적 위기감이 팽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救國敎育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이 전개되자 국가적 위기감을 느낀 인사들은 ‘국가의 흥망이 天命의 거취에 달렸다고 하지만 천명의 거취는 민심의 향배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옛적 聖王의 정치는 민심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고 주장하고 ‘러일간의 교섭전말이 만국에 포고된 것을 보면 한국의 개혁이 일본의 장악에 속한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我韓 臣民이 차마 듣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아한의 개혁을 아한이 능히 자유로이 하지 못하고 일본에 넘긴다면 어찌 독립의 권리가 있다고 하며 천하만국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중추원에 정치개혁을 건의하였다.260)≪皇城新聞≫, 光武 8년 2월 23일, 雜報<前都事 등 百餘人이 中樞院에 獻議>. 이에 이어 황제권력의 강화를 위한 정치개혁과 신교육의 강제적 보급, 신지식인의 등용 등을 주장하는 55개조 獻議가 중추원에 제기되었다.261)≪皇城新聞≫, 光武 8년 3월 19일, 雜報<樞院獻議>.

 이러한 상황에서 러일전쟁 전반기의 학부대신이었던 민영환은 신교육의 보급을 통한 인재양성이 구국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各學校卒業人需用規則262)≪官報≫, 光武 8년 4월 5일, 勅令 제10호 各學校卒業人需用規則. 등을 제정하여 학생들의 학업의욕을 고취하는 한편 관·공립학교 교관·교원들의 사기앙양을 위하여 만찬을 베풀기도 하고,263)≪皇城新聞≫, 光武 8년 4월 5일, 雜報<學相設會>. 학부관리를 파견하여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해이된 교관과 교원들의 근무기강을 바로잡도록 노력하였다.264)≪皇城新聞≫, 光武 8년 4월 9일, 雜報<敎官譴免>. 민영환은 또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었던 외국어학교의 발전과 상공학교 시설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교육시설 확충을 위한 예산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265)≪皇城新聞≫, 光武 8년 4월 25일, 雜報<飭勤漢課> ; 4월 29일, 雜報<商工學校實施> 및 5월 7일, 雜報<學費添表>. 그러나 당시의 국가형편이 관·공립학교의 설립과 교육만으로 신교육의 보급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사립학교의 설립과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266)≪皇城新聞≫, 光武 8년 5월 7일, 雜報<特褒興學>.

 러일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아 교육을 학부대신에게만 맡길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광무황제는 “지금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증설하고 인재를 양성하야 쇠퇴한 운을 만회하고 中興의 業을 建立하고자 하노니 너희 신민들은 짐의 이러한 뜻을 깊이 체득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오늘날 지구상의 각국은 인민의 지식이 개명에 일진하야 극부극강하고 독립웅시하거늘 짐은 君師의 자리에 있어 교육의 성취를 보지 못하니 마음에 숙연하야 하늘 가운데 방황함이라. 너희 신민들은 지금으로부터 더욱 힘써 자제로 하여금 학업을 전심하여 분식과 허위를 버리고 분발을 그치지 말고 國威와 國光을 선양케 하라”고 조칙을 발표하고 국가중흥을 위한 교육을 독려했다.267)≪官報≫, 光武 8년 5월 25일, 詔勅.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학교의 설립이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268)≪皇城新聞≫, 光武 8년 6월 8일, 雜報<政議三件>. 각처의 뜻있는 인사들은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설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서울의 경우 1905년초 私立漢城法學校가 설립되었다.269)≪皇城新聞≫, 光武 9년 1월 16일, 논설<論法學校設立>. 사립한성법학교는 국민교육을 위한 보통교육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에 필요한 인재를 속성으로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는 忠君愛國을 제1로 하는 국가주의자들이 교사로 모여들어270)申一澈,<申海永의 忠君愛國型 國家主義>(≪近代西歐學問의 收容과 普專≫, 고려대, 1986), 38∼63쪽 참조. 111인의 학생들을 선발하고 광무황제의 勅語를 奉讀하는 것을 필두로 입학식을 거행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학교는 상당한 호응을 얻어 개학 1개월 후에는 제2차 모집으로 학생수가 2백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271)≪皇城新聞≫, 光武 9년 1월 26일, 雜報<法校開學> ; 1월 27일, 雜報<法校開學祥報> ; 2월 27일, 雜報<法學校盛況>.

 같은 무렵 李容翊에 의해 普成專門學校가 설립되었다.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자272)≪皇城新聞≫, 光武 8년 12월 27일, 雜報<李氏回國>.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의 개화문물을 견문하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외에 구국의 길이 남아 있지 않음을 통감하였다.273)申一澈,<李容翊의 歸國과 普專開校>(≪近代西歐學問의 收容과 普專≫), 4∼9쪽. 그는 일본교육제도를 시찰하고 귀국하면서 3천원 가치의 각종 서적을 사 가지고 돌아와 한성 내외에 보성학교 7개소를 세울 계획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74)≪皇城新聞≫, 光武 9년 1월 23일, 雜報<學校廣設>. 그는 우선 幼·少年 교육기관으로 보성학교를 설립한 데275)≪皇城新聞≫, 光武 9년 1월 28일,<學員募集廣告>. 이어 광무황제의 내탕전을 받아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王立學校의 성격을 지닌 학교였다. 즉 이용익의 건의에 따라 광무황제는 국가경영에 필요한 인재를 速成·速需하고자 내탕전을 하사하여 도서관을 제대로 구비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서구의 신교육을 이수한 인재들을 특별대우하여 강사로 채용해서 학생들을 교육할 주간전문대학을 창립하였던 것이다.276)≪皇城新聞≫, 光武 9년 4월 1일, 雜報<創設專門>. 이용익은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국가가 위기에 놓인 상황을 절감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뒤 광무황제에게 그의 학교설립계획을 보고하였다. 이에 광무황제는 ‘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하고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학교의 강사들은 대체적으로 일본유학을 통해 서구의 신학문을 이수한 제1대 신진 엘리트들로서 존왕의식과 국가주의의식이 강한 인물들이었다.277)申一澈, 앞의 글. 이들은 앞에서 본 한성법학교 강사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또한 같은 무렵 황실의 적극적 지원으로 설립된 양정의숙 강사로도 초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78)申一澈, 위의 글,
≪皇城新聞≫, 光武 9년 1월 27일, 雜報<法學校詳報>; 光武 9년 4월 1일, 養正義塾 學員募集廣告.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될 무렵인 1904년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군부협판 嚴柱益이 嚴貴妃로부터 구 황실재산과 내탕금의 지원을 받아 養正義塾을 설립했다. 양정의숙은 보통과 졸업장이 있는 17세 이상의 학생들을 선발해 3년과정으로 국가학·법학통론·경제원론·민법총론·형법총론·만국역사·산술·일어(1학년), 형법각론·민법(물권·채권)·행정법(총론·각론)·상법(총론·각론)·재정학·일어(2학년), 국제공법·국제사법·화폐론·은행론·近時外交史·일어(3학년) 등을 교육하였다.279)≪皇城新聞≫, 光武 9년 4월 1일, 養正義塾學員募集廣告. 즉 교과목으로 볼 때 양정의숙의 교육목표는 국가경영에 참여할 인재를 기르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국가적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이 요구되고 있는 가운데 존왕적 국가주의 입장에서 국가자강을 위해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보성학교와 같은 교육기관들은 사회의 적극적 호응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280)≪皇城新聞≫, 光武 9년 3월 24일, 논설<賀學校之蔚興> ; 5월 31일, 雜報<普校漸旺>. 이는 한국사회 전래의 관료지향적 성향과도 관련되어 보다 빨리 신진관료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신학문 특히 법률 경제 등과 관련된 교육기관들이 사회와 학생들의 호응 속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근대적 국민국가를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우선 되어야 할 국민보통교육은 오히려 부진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281)≪皇城新聞≫, 光武 9년 5월 31일, 6월 1일·3일·8일, 雜報<設學請願> ; 6월 16일, 雜報<請撥增學費>.

 이는 일차적으로 황제가 조칙을 내려 교육이 국가 중흥의 요체임을 밝히기까지 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保皇主義에 그치고 있어서 열심히 확보한 황실재정으로 황실 측근들이 세운 학교에 대한 재정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민교육·보통교육기관인 공립학교의 재원에 대한 收稅는 오히려 황실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내장원이 장악함으로써 공립학교 운영을 어렵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282)≪各司謄錄≫41, 平安道 篇 13,<訓練謄錄>1책, 光武 10년 5월 31일, 訓令 제97호 및<訓令謄錄>4책, 光武 11년 4월 25일, 道訓令 제69호(國史編纂委員會, 1990), 27·116쪽.

 즉 국가가 위기에 놓인 1905년경에 이르기까지 국민보통교육은 기대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육은 入仕를 위한 수단이라는 재래의 사상이 아직 불식되지 않은 채 보통교육기관인 소학교에는 지배층의 자제들이 입학을 꺼리는 가운데 빈천가 자제들로 채워지고 있었으며, 재래의 서당교육이 왕성하여 신교육의 보급을 방해할 뿐 아니라 정부가 소학교 교육에 재정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보통교육인 소학교 교육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幼學 李京壽는 국민보통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21개조에 이르는 사립소학교 확장방침을 제안하고 있다.283)≪皇城新聞≫, 光武 9년 5월 31일, 6월 1일·3일, 雜報<設學請願>.

 이 무렵 국민보통교육을 발전시키려는 조직적 운동은 독립협회 계열의 민권자강파에 의해 다시 전개되었다.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고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키려고 활동하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광무황제의 조칙으로 광무 2년(1898) 12월 25일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군주주권을 부정하고 국민주권에 입각한 공화정치를 획책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여 이를 탄압하고 해산을 명하였던 것이다.284)鄭喬,≪大韓季年史≫上, 402∼403쪽. 이로써 조직적인 민권자강운동 즉 국민주의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운동과 민권자강을 이룩하려는 조직적인 국민교육운동도 일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잠시 정돈상태에 빠졌던 조직적인 정치활동은 러일전쟁 이후 다시 재개되었다. 광무 8년(1904) 6월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동 7월 보안회가 조직된 것을 계기로 애국계몽운동세력은 協同會·共進會·進明會 등의 단체를 거쳐 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285)李光麟,≪韓國史講座≫V(一潮閣, 1982), 478∼482쪽. 광무 9년 5월 조직된 헌정연구회는 그 설치 강령에서 왕실이나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되고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로이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사업계획 중에 ‘의회준비에 당한 제반 방계를 연구할 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입헌정치를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286)≪皇城新聞≫, 光武 9년 5월 6일, 雜報<憲政硏究會>.

 러일전쟁을 계기로 조직적인 정치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한편에서 조직적인 국민교육운동이 다시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국민교육회의 조직과 활동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287)邊勝雄, 앞의 책, 110∼123쪽. 1904년 8월 조직된 국민교육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권자강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국민교육회는 게일(Gale)목사의 후원 속에 東署 蓮洞의 그리스도신문사를 임시사무소로 하여 발기하고 7장 29조로 된<국민교육회규칙>을 마련하였다. 국민교육회는 그 규칙에서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논의하지 않고 ① 학교를 광설하는 일, ② 서적을 편찬하거나 번역 간행하는 일, ③ 국민의 애국심과 원기를 배양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지 그리고 훌륭한 인물에 대한 기록들을 수집하여 널리 알리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하였다. 국민교육회는 토요일마다 통상회를 개최하고 회보를 발행하여 국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하여 진력하였다.288)≪대한매일신보≫, 1904년 9월 9일·10일·12일, 잡보<국민교육회규측의 대요>. 그리고 국민교육회는 국민교육을 위한 교과서 개발에도 착수하였다.289)≪皇城新聞≫, 光武 9년 6월 15일, 雜報·廣告<刊書請廳>·<國民敎育會>. 또한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국민교육운동의 확산을 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290)≪皇城新聞≫, 光武 9년 5월 15일, 雜報<全州敎育支會>.

 국민교육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할 무렵 국민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움직임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재미교포 姜天明이 5원을 교육에 써달라고 보내온 것을 계기로 1904년 10월경 한인목사 全德基는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7백여원의 기금을 확보하고 尙洞靑年學院을 설립하였다.291)韓圭茂,≪舊韓末 尙洞靑年會의 설립과 활동≫(서강대 석사학위논문, 1988).
≪신학월보≫ 1904년 11월호,<샹동쳥년회의 학교를 셜시함>.
≪상동교회일백년사≫(1988), 102쪽.
≪皇城新聞≫, 光武 9년 2월 13일,<尙洞靑年學院 捐助金廣告>.
상동청년학원의 교육목적은 외세의 침탈로 도탄에 빠지고 있었던 일반국민의 개명에 있었다.292)≪皇城新聞≫, 光武 9년 2월 13일, 雜報<學院趣旨>. 상동청년학원의 교육목표는 국민교육회와 상통하고 있었으며, 보황주의·국가주의 교육을 추구했던 다른 중등교육기관과는 교육과정에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교육운동은 이동휘와 같이 일찍이 독립협회운동과 국민교육회 및 상동청년회 등에 관여했던 인물들에 의해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교육운동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 비해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서북지방과 관북지방을 중심으로 기독교 보급과 비례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293)邊勝雄, 앞의 책.
李松姬,≪大韓帝國末期 愛國啓蒙學會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5) 참조.

 대한제국정부는 1906년 3월에 이르러 본격적인 국민교육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갑오개혁기에 정부가 이미 국민교육제도를 법제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보통교육을 위한 관·공립소학교의 설치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즉 정부는 1895년에 4곳, 1896년에 2곳의 관립소학교를 서울에 설치토록 하였고, 1896년에 지방공립소학교를 설립할 곳으로 서울을 비롯하여 각도의 관찰부 소재지와 개항장 등 38곳을 지정한 정도였다.294)≪官報≫, 開國 504년(1895) 9월 30일,<學部告示> ; 建陽 원년(1896) 8월 5일,<學部廣告>·9월 21일,<學部令>. 이런 정도로는 일찍이 朴泳孝가 주장한 6세 이상의 아동들을 전부 교육하는 국민교육을 실현하려면 요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 정부가 補助公立小學校規則을 제정하여 유생의 교육권을 인정함으로써 유생들이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교육에 참여하고 요호·부민·상인·시민 등이 사립소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점진적 발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독립협회 등의 활동으로 국민보통교육은 그 이념적 기반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국민교육회를 비롯하여 뜻있는 인사들이 국민교육의 실현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광무황제는 1906년 3월 26일 국민교육실현을 위한 조칙을 발표하였다.

 광무황제는 신교육 수용에 의한 인재양성을 열망하며 기회있을 때마다 교육에 관한 조칙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칙은 과거의 조칙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칙은 ‘국가에서 敎人하는 법을 크게 갖추면 閭巷小民들이 배우지 않음이 없어 三代보다 문명이 彬彬할 것이다’라 하고 ‘人家에 子弟가 있으되 능히 교육하지 않는 자는 그 父兄을 論罪할 것이며, 혹은 그 자제를 率敎치 않고 유희하여 業이 없는 자는 또한 論罪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295)≪高宗實錄≫, 光武 3년 3월 26일. 즉 여항소민의 교육 즉 모든 국민의 교육과 교육강제 즉 의무교육을 지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조칙은 봉상시 부제조 李苾和의 상소에 이어 공포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필화는 상소문에서 ‘오늘날 國勢民命이 이와 같이 극한 지경에 이른 것은 교육이 없기 때문입니다’라 밝히고 ‘급히 교육을 실시하여 우리 나라를 저 列邦들과 동등한 국가가 되도록 해야 하며, 敎育一事가 이후 來復의 기틀이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학교설립과 교육진흥 방안을 건의하였다. 즉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시급히 국민교육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광무황제는 위와 같은 이필화의 상소에 접하자, 관할 부서에 즉각 시행토록 지시하였고, 그의 상소문은≪대한매일신보≫에 그 전문이 게재되어 계몽운동계에도 널리 반영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96)柳漢喆,<1906년 光武皇帝의 私學設立 詔勅과 文明學敎 設立 事例>(≪韓國民族運動史硏究≫, 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II, 나남출판, 1997), 136∼138쪽.

 광무황제의 조칙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교육정책의 추진으로 받아들여져서 곧≪대한매일신보≫와≪황성신문≫등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대한매일신보≫는 그 논설에서 ‘오직 대한인사는 모름지기 백배분발하여…국운을 만회하고 인권을 신장하라’고 역설하였고,297)≪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30일, 논설<恭讀大詔>.≪황성신문≫은 ‘이천만 민중이 모두 취학하여 지식을 발달 개명하고 애국정신을 관철시키면 우리 한국의 국권회복이 여기에 있다’고 강조하여 국민교육의 실행으로 구국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298)≪皇城新聞≫, 光武 10년 3월 28일,<興學大詔煥發> ; 3월 29일, 논설<興學勅詔亟宜實行>. 이러한 언론의 적극적 호응에 이어 각 지방 수령들은 흥학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고, 각계 인사들도 기금을 모으고 향교와 같은 재래 교육시설 등을 이용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신교육에 소극적이었던 영남지방을 비롯한 삼남지방에서도 구국을 위한 신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299)柳漢喆, 앞의 글, 138∼160쪽.

 이 시기에 광무황제와 대한제국정부의 구국교육정책은 사립학교의 설립과 그 교육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재정지원 방식으로 추진되었다.300)柳漢喆은 위의 글에서 여러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교육의 식민지화 작업이 관·공립학교를 통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俄語(러시아어)學校를 폐쇄하고, 漢語(중국어)學校의 폐쇄를 시도하는 한편, 1901년 이래 중학교 교사로 고빙되어 있던 일본인 시데하라(幣原坦)를 학부참여관으로 승격시켜 학부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시데하라는 일어교육의 강화 등을 비롯한 각종의 교육식민지화 작업을 전개하였고, 한국재정고문이 된 메가타(目賀田種太郞)는 교사에 대한 월급 지급을 거부함으로써 小學校停廢문제를 야기하는 등 한국교육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전개하였다.301)邊勝雄, 앞의 책, 129∼139쪽.

 시데하라가 1905년부터 학부참여관으로 한국교육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일제의 한국교육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은 같은 해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요한 데 이어 1906년 2월 통감부의 설치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06년 2월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데하라를 三土忠造로 교체한 뒤 그로 하여금 교과서 편찬업무를 담당케 하고, 다시 통감부 서기관 타와라(俵孫一)를 학부에 파견하여 학제의 개혁업무를 장악케 하였다. 1907년 7월의 한일신협약으로 타와라는 학부차관이 되어 한국교육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학부는 일본인 사무관과 주사들이 장악하여, 각종의 학교관계법령을 개정하고 식민교육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법개정으로 자연히 식민교육은 우선적으로 관·공립학교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302)邊勝雄 위의 책, 140∼144쪽.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광무황제는 앞에서 보았듯이 신민된 자는 자제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논죄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하여 의무교육을 강제하고, 사립학교의 설립과 교육을 적극 지원하였다. 전국민을 하루 속히 교육시키려면 의무교육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광무황제의 이러한 조칙에 부응하여 1906년 4월부터 1907년 8월 21일 통감부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대한자강회는 의무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303)邊勝雄, 위의 책, 152∼167쪽.

 대한자강회가 정부에 건의한 의무교육안은 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어 국민교육의 보급이 어려우므로 국가차원에서 의무교육령을 반포하고 국민이 경비를 분담하여 의무교육을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즉 이 의무교육안은 ① 적당한 행정구역을 단위로 학구를 정하여 구립소학교를 설치하고, ② 구립소학교의 설비와 유지비용은 구내 주민이 부담하며, ③ 구내 주민은 학무위원을 선출하여 교과서의 선정 등 학무 일체를 담당시키며, ④ 의무교육의 연한은 5년간으로 한다304)≪大韓自强會月報≫제8호, 義務敎育條例大要, 41∼42쪽. 의무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이미 러일전쟁기에 전 교원 李康浩가 개인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皇城新聞≫, 光武 8년 5월 7일, 雜報<私學設議>; 5월 11일, 雜報<設學條規>)..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한자강회는≪萬歲報≫·≪皇城新聞≫등 언론의 지지 속에 總代를 선출하여 의무교육안을 정부에 건의했고, 중추원회의는 1907년 1월 9일 이 의안을 통과시키고 의무교육의 실시를 정부에 촉구하였다. 같은 무렵 표훈원 총재 閔泳徽도 의무교육의 실시와 우등졸업생의 수용을 광무황제에게 상소하였다. 또한 한성 각 구의 대표들도 정부가 우선 의무교육령을 반포하고 실시 가능지역부터 시작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광무황제는 학부로 하여금 의무교육원안을 검토케 하고 문구를 가다듬어 都下 및 각 府部郡의 坊曲에 布諭토록 지시하였다.305)≪高宗實錄≫, 光武 11년 1월 15일.

 그런데 이 의무교육안은 일제의 식민지화 교육정책에 대항하여 교육권을 한국의 민간인이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즉 정부가 교육재정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구실 아래 지역 주민이 교육비를 부담하여 학무위원을 선출하고, 학무위원이 교과서의 선정 등 학무 일체를 장악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일제의 수중에 장악된 학부의 간섭을 피하고 한국인이 자주적으로 교육을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학부대신은 ‘아직은 실시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의무교육안의 법제화를 거부하였다.306)柳永烈,<大韓自强會의 愛國啓蒙運動>(≪韓國近代民族主義運動史硏究≫, 一潮閣, 1987), 9∼91쪽 참조. 이와 같이 광무황제의 명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의 법제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西友學會를 비롯한 여러 계몽단체와 각지의 유지·신사들은 법에 관계없이 자금을 모아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아 의무교육운동을 통한 구국교육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307)李松姬,≪大韓帝國末期 愛國啓蒙學會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85). 이러한 운동에 대하여 광무황제는 재정지원을 전개하였고, 이에 일제 통감부는 황실재정을 감축하고, 재래 교육시설이나 재원이 사립학교 재원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제적 조치를 취하는 한편 私立學校令을 제정 발표하여 구국 국민교육운동을 탄압하였다.308)柳漢喆,<韓末 私立學校令 以後 日帝의 私學彈壓과 그 特徵>(≪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65∼103쪽.

<邊勝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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