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
  • 2) 정부세입의 축소와 황실수입의 확대
  • (1) 정부세입의 만성적 부족

(1) 정부세입의 만성적 부족

 대한제국기 정부의 세입예산은 1899년부터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1895∼1898년에 400만원대에 머물렀던 세입예산이 1899년 647만원, 1901년 907만원을 거쳐 1904년에는 무려 1,421원에 달하였다(<표 1>참조). 즉 1904년의 세입예산이 1895년의 세배를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동화의 가치하락 등으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세입예산이 오히려 감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311)1896년경에는 액면가격이 같은 백동화와 일본 화폐가 거의 같은 가치로 교환되었으나, 1898년 이후 백동화가 남발되면서 1901년경에는 1.5배의 백동화를 주어야 같은 액면가격의 일본 화폐와 교환할 수 있었고, 1904년경에는 2.2배를 주어야 했다. 한편 서울지역의 쌀값은 1895년에 上米 1되에 6錢이던 것이 1901년에는 1兩 7錢, 1904년에는 2냥 8전까지 급등하였다. 결국 1895년경과 1904년을 비교하면 화폐가치는 약 2.2배 하락하고, 쌀값은 약 4.5배 상승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도면회,<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 문란과 그 영향>(≪한국사론≫21, 서울대, 1989), 410∼412쪽 및 438쪽 참조).

 전체적으로 보면 대한제국기의 세입예산항목은 점차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해서 많은 재원이 황실로 이속되면서 정부의 세입은 地稅와 戶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항목에는 이외에도 雜稅·鑄造貨 등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탁지부의 관할 밖에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수입이 될 수 없었고, 상당한 액수를 기록하고 있는 旣往年度 所屬收入도 대부분 미납된 지세와 호세였다.

 지세는 1896년에 전체 세입예산의 30%를 차지하였지만 점차 그 비중을 높여가서 1903년에는 70%에 이르고 있었다. 이처럼 전체 세입예산에서 지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것은 정부의 세입이 지세로 단순화해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지세 액수도 1895년에 100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01년에는 508만원, 1903년에는 760만원으로 증가하였다. 1901년과 1903년의 급증은 지세율이 1900년에 1결당 최고 30냥에서 50냥으로, 1902년에는 다시 50냥에서 80냥으로 인상된 것을 반영한 것이다.

 호세의 경우에는 세율의 인상이 없었기 때문에 豫算化率(賦課額에 대한 豫算額의 비율)에 의해서 세입예산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예산화율이 높게 책정되었을 때는 46만원 정도, 낮게 책정되었을 때는 22만원 정도의 세입이 예상되고 있었다. 항세(海關稅)는 세입 중 가장 확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으나, 실제 국고 수입액은 예산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312)≪歲入歲出豫算表≫제2책, 광무 3년 및 제3책, 광무 4년, 예산설명서.

 항세의 부과와 징수는 탁지부 관세과에서 담당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항세수입을 총세무사인 브라운이 관리하면서 대부분 항만시설 공사나 등대건설 등에 사용하였고, 탁지부로 들어오는 것은 소액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기 재정수입은 지세와 호세의 징수실적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세의 경우 실제 징수되는 액수(實收額)는 과세액의 40∼50%선에 머물고 있으며 예산액과 비교하면 70∼80%의 수준이었다.313)이윤상,<일제에 의한 식민지재정의 형성과정>(≪한국사론≫14, 1986), 301쪽. 호세의 징수실적은 지세에 비해서도 매우 낮은 편이었다. 세율이 인상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實收額은 대체로 과세액의 20%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314)이윤상, 위의 글, 304쪽. 이처럼 징수실적이 부진하였기 때문에 당해년도에 징수되지 않고 다음해로 미루어지는 미납액이 엄청났다. 당시 정부에서 추산한 것이긴 하지만 미납총액은 해마다 2백만원 이상을 기록하였고 특히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3백만원 이상, 1904년에는 465만원에 달하였다.315)이윤상, 위의 글, 305쪽. 미납세액의 규모는 바로 정부의 재정 관리능력과 상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미납세액이 많았던 것은 당시 정부의 재정 관리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주요한 원인은 稅源에 대한 파악의 부실, 地方官·吏胥·鄕任·戶首 등 징세 담당자들의 중간 수탈과 횡령, 外劃制度의 모순과 세금으로 거둔 화폐(葉錢·白銅貨) 운반의 어려움으로 인한 조세금 상납의 지체 등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호구조사와 양전·지계사업의 실시, 중간 횡령 또는 연체의 방지, 인지세의 부과 등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세원 파악과 함께 농촌사회의 통제라는 목적을 가지고 1896년에 실시되었던 호구조사는 과거의 신분제에서 탈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정을 두는 등 철저한 호구조사를 위한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316)이 시기의 호구조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조석곤,<광무년간의 호정운영체계에 관한 소고>(≪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
이세영,<대한제국기의 호구변동과 계급구조>(≪역사와 현실≫7, 1992).
하지만 호구조사에도 불구하고 호세의 부과와 징수는 여전히 조선 후기 이래의 관행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호구조사의 성과가 반영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고 1899년부터 본격화된 양전·지계사업도 1904년에 중단되었을 뿐 아니라 그 동안의 성과를 구체적인 지세의 부과와 징수에 연결시킬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초에 목적한 지세수입의 증가를 이룰 수 없었다.317)대한제국기의 양전·지계사업에 대해서는 한국역사연구회 근대사분과 토지대장연구반,≪대한제국의 토지조사사업≫(민음사, 1995) 참조.

 중간 횡령과 연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계속된 조세납부 독촉과 지방관에 대한 감독의 강화로 나타났다. 우선 기한을 넘겨 조세를 愆滯한 지방관을 징계할 수 있도록 수취규정을 개정하거나 지방관에 대한 解由規則을 제정하여 각 도마다 상납기한을 정하고 상납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조치를 취했다.318)≪詔勅≫제3책, 1896년 8월 4일, 詔勅 租稅 督納에 관한 건, 74쪽
≪法律≫제2책, 1899년 6월 28일, 法律 제4호 各府尹牧使郡守解由規則, 606∼607쪽.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結戶錢(地稅·戶稅)의 징수실적이 개선되지 않자 탁지부는 公錢상납이 적체된 군수를 法部로 넘겨 미납세액을 督刷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충청·경상·전라 3도에 시찰어사를 파견하거나 의정부회의에서 미납이 심한 군수의 파면을 여러 차례 건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세납부를 독촉했다.319)≪皇城新聞≫, 1899년 10월 2일·24일, 雜報. 그래도 결호전의 미납이 줄어들지 않자 1900년에 들어와서는 결호전을 상납하지 않은 관찰사·군수·서리·상인들을 경무청으로 하여금 체포하게 하거나 平理院으로 압송하는 방법을 동원했고, 1901년 12월에는 공전을 많이 건체한 지방관들을 법부에 넘겨 교수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강경책까지 상주하여 허락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320)≪皇城新聞≫, 1900년 3월 28일, 4월 3일, 1901년 12월 4일·18일, 雜報.

 탁지부의 이러한 조치들은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미납세액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는 성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세·호세 징수실적의 부진에는 징수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지방관이 지세·호세로 거둔 화폐를 중앙정부(탁지부)로 직접 상납하지 않고 상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내는 外劃의 보편화라는 구조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획은 화폐·금융제도가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상인들에게 자본축적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지만 재정운영의 측면에서는 대단히 많은 문제점을 낳는 제도였다. 조세금 상납을 담당한 상인들이 이것을 상업자본으로 轉用하는 과정에서 연체, 혹은 횡령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관·서리·상인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 고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징세기구와 금융기관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획을 이용한 지세·호세 상납구조는 쉽사리 깨어질 수 없었다. 황실재정을 담당한 내장원에서조차 이러한 외획을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321)내장원에서 빌려온 자금을 갚기 위해 탁지부에서 내장원에 외획한 結戶錢은 1902년도 소속이 535만냥, 1903년도 소속이 1천만냥이었다고 한다(이영호,<대한제국시기 내장원의 외획운영과 상업활동>,≪역사와 현실≫15, 214쪽). 따라서 징수실적 부진과 이에 따른 만성적인 세입의 부족은 독립된 징세기구의 설치, 재정수입과 지출을 담당할 國庫銀行의 설립, 本位貨의 鑄造 등 재정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