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1. 러일전쟁의 배경
  • 3) 의화단사건과 열강관계

3) 의화단사건과 열강관계

 청일전쟁 이후 열강간의 갈등은 1900년 중국의 義和團사건으로 더욱 깊어졌다. 이 사건은 서방제품의 수입으로 농촌경제의 파탄과 실업자의 양산, 외세의 침탈 앞에 무기력한 정부관료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 그리고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들 간에 소위 敎案이라는 분쟁 등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山東省·直隷省에서 의화권 교도들이 반기독교를 내세운 仇敎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전후 가속화되는 열강의 침탈에 의해 팽배된 반외세적 분위기 속에서 扶淸滅洋의 배외운동으로 성격이 바뀌어졌다. 더욱이 중국 정부내에도 보수·배외파인 端郡王(Prince Tuan)이 總理衙門 수석대신과 軍機大臣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의화단을 義民化하고 정부의 정책을 攘夷라는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중국정부의 정책과 의화단운동을 동일시하는 방향으로 급회전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중국과 서양열강(일본을 포함하여)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365)서태후의 칙서는 ‘서양 열강들이 중국영토를 호랑이 같이 탐욕스럽게 침탈하며 중국이 돈도 군대도 없어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침략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인민과 지방관리들은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Langer, Op. cit., p.693). 러일전쟁 전 한국 신문들도 서태후의 칙서를 인용하면서 반외세적 분위기를 조성했다(구대열,≪제국주의와 언론-배설. 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 이화여대출판부, 1986), 116쪽.

 의화단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시대 유럽국가들의 침탈 대상 지역에서 일어난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사건에 대해 제국주의 열강들이 단결하여 대응하였던 유일한 사건이다. 그러나 열강들은 의화단 민중들이 포위한 북경공사관의 구조라는 목적에서만 일치했을 뿐 그 이상의 공동목표는 없었다. 따라서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부터 곧 과거의 경쟁관계로 되돌아갔다. 의화단사건에 임하는 열강들의 입장은 이같은 의미에서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저지한 3국간섭과 같이 일회적인 것으로 영속성을 갖는 동맹관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의 진행 및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각국의 정책 차이는 러일전쟁으로 연결되었다고 하겠다.

 의화단사건 후 동아시아 열강관계의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사건의 초기부터 西太后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의심받을 정도로 의화단사건을 러시아의 권익을 극대화하는 데 이용했다. 의화단의 세력이 만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중국을 단호히 응징하려는 열강과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만주의 철도보호라는 명목아래 만주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이같은 만주우선정책은 겨우 500여 명의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며 상업적 이해도 희박했던 북경지역에 비해 철도 등 그들의 이해가 집중되었던 만주가 중요했다는 점에서 정당한 것이었다.366)Nish, Op. cit.(1985), p.83. 그러나 러시아의 정책은 만주에 대한 기존의 이해 보호로 끝나지 않고 중국정부의 환심을 사면서 만주점령을 영구화하고 나아가서 북경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특히 시베리아철도의 건설로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적·물적자원의 빈곤이 해결될 것으로 예상됨으로써 러시아의 위협은 과거 일시적이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만주점령을 둘러싼 열강과의 갈등이 곧 러일전쟁의 원인이며, 이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곧 만주가 러일전쟁의 주요 대상이었다는 견해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일본의 관점에서는 의화단사건은 반외세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반서양적이며 반일적인 성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은 일단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만이 지리적으로 북경공사관의 구출에 필요한 대규모 군대를 단시일 내에 파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따라서 열강들은, 특히 1899년 이후 남아프리카전쟁에 매여 있던 영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력히 요망했다. 당시 유럽에서 영국과 해군력 경쟁을 벌이던 독일은 이를 두고 영국은 중국에서 다른 국가가 ‘화로에서 영국의 밤을 꺼내 주기를 원한다’고 평했다. 여기에서 말한 ‘밤’이란 중국에서 열강 중 최대 규모인 영국의 이권을 말한다.367)Nish, Op. cit.(1966), p.81. 일본은 열강들로부터 일본군의 출병에 대한 동의를 확보한 후 1개 사단을 동원, 의화단을 진압했다. ‘북경의 55일’로 알려진 공사관 구출작전을 통해 일본은 유럽 열강들과 처음으로 공동작전을 전개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고 또 열강의 방침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열강들과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작전을 통해 일본은 영국에게 잠재적 동맹국으로서 능력을 충분히 인식시켰다. 양국은 모두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했으며, 영국으로서는 이 지역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태에 시의적절하게 지원해 줄 수 있는 세력으로 일본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의화단사건은 이같이 영·일관계가 청일전쟁 후 단순한 이해의 불충돌이라는 상태에서 우호관계로, 이제는 협력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영일동맹이 체결된 후 영국이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공사급에서 대사급으로 승격시킨 후 초대 대사로 부임한 맥도날드(Claude MacDonald)경은 “북경 공사관 구출작전은 東西의 島嶼帝國간에 공식 동맹의 씨앗을 심었다”고 평하였다.368)Nish, Op. cit.(1966), p.91. 반면 일본은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청일전쟁 후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방해한 러시아와 독일이 여전히 일본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동경주재 러시아 무관은 인종적인 관점에서 일본군은 유럽에서 가장 약한 군대의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도 수백년이 걸릴 것이라는 모욕적인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독일 역시 케텔러(Klemens von Ketteler)공사의 피살을 구실로 발데르제(Alfred von Waldersee) 원수를 연합군 총사령관직에 임명하지만 그는 공사관 구출을 위한 군사작전이 끝난 후인 9월 27일 천진의 大沽에 도착했다. 일본은 이를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하나의 모욕으로 간주하게 된다.369)Langer, Op. cit., p.748.
Nish, Op. cit.(1966), p.89.

 러시아의 만주정책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정책 담당자의 성향이다. 일반적으로 외교정책은 담당자의 성향에 관계없이 국가적 목표와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수단을 고려하여 추진되기 때문에 일관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시기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은 그 담당자에게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은 재무상 위테(Sergei I. Witte), 외상 람스돌프(Vladimir V. N. Lamsdorff) 등 온건파와 육군상 쿠로파트킨(Alexei N. Kuropatkin)장군, 국무담당 고문 베조브라조프(Alexander M. Bezobrazoff), 극동총독 겸 육해군 총사령관 알렉세에프(Evgenii Ivanovich Alekseiev) 등 강경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간의 대립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방법론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테는 세계전략적 차원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의 팽창에 대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도 상업적 목적의 항구가 필요한데 이것은 아시아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같은 목표는 중국과의 우호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경제적 침투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건파들도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 특히 만주의 점령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와, 의화단사건 이후 경제적 침투의 핵심인 철도의 보호라는 단기적 목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서 강경파와 일치하고 있다. 반면 온건파들은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만 여순항 점령 등 적극적인 팽창은 관련국들의 반발을 유발할 것이라는 점에서 반대했다. 특히 한국을 두고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러시아의 잠재적 적대국들을 단결시킴으로써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러시아의 목표를 만주로 한정시킬 것을 주장했다. 만주의 군사적 점령은 이 지역 중국인들을 러시아로부터 등을 돌리게 할 것이며 열강도 동일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특히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가 안보상 취약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이라는 약한 이웃 대신 일본이라는 강력한 세력과 대치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였으며, 이 결과 러시아는 거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370)당시 러시아의 극동정책, 특히 위테의 만주경영에 대해서는 White, Op. cit., 2∼4장 참조.

 반면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총신인 쿠로파트킨 육군상은 소위 전진정책을 내세우면서 의화단사건은 만주점령은 물론 러시아의 영향력을 화북지방까지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평가했다. 또 현실적으로 의화단사건으로 러시아는 다른 열강의 반대가 없는 가운데 군대를 만주와 중국본토에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의화단사건은 강경파들이 득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한반도에서의 성공은 강경파들이 위테의 점진적 접근법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북경공사관의 포위나 해방을 위한 군사작전보다는 만주에 관심을 기울인다. 즉 강경파들은 의화단사건을 만주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라는 수준을 넘어 군사적으로 이를 장악, 중국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의화단의 북경공사관 포위공격이 절정을 이루던 1900년 7월 이후 10월까지 철도보호라는 명목으로 대병력을 파견,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물론 러시아는 공식 성명을 통해 ‘군대파견에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으며’, 상황이 정상으로 회복되면 만주를 중국에게 돌려주고 철병할 것이며, 또 만주에서 열강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시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변경하고 철도와 관계없는 도시도 공격하는 등 만주의 영구점령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었다.371)강경파는 이제 만주가 ‘제2의 부하라’(a second Bukhara, Turkistan 지역으로 러시아령)가 될 것이라는 공언을 서슴치 않았다(Langer, Op. cit., p.695 및 金景昌,≪동양 외교사≫, 박문당, 1982, 500쪽).

 러시아 정책 담당자들 간의 분열은 의화단사건의 처리에서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일본과의 전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의화단사건의 처리를 위해 1900년 8월 25일 제1차 통첩문이 북경의 각국 공사관에 전달했다. 그 내용은 연합국들 간에 공동행동을 유지하고 중국의 政體를 보존함으로써 중국의 분할를 배제한다는 온건한 내용이었다. 또 러시아 군대의 철수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 통첩문은 러시아 정부내에서 위테와 람스돌프외상 등 온건파의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만주 주둔 러시아군이 만주점령을 기정사실화 하는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외교 역시 이같은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해 11월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세에프는 奉天 장군 增祺(Tseng Chi)에게 중국군의 무장해제, 러시아군의 봉천 주둔, 중국이 러시아군을 위한 식사 및 식량 공급, 러시아 판무관의 봉천 주재 허용 등, 러시아가 만주에서 군사, 행정적 실권을 갖는 내용인 ‘여순협정’을 제시했다. 이어 다음해 2월에는 중국에게 12개조 요구를 제시했다. 이것은 사실상 러시아가 만주를 보호령화 하려는 것으로,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중국 원세개 정부에 제시한 21개조 요구와 같이 악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러시아는 12개조 요구에서 만주를 중국에 반환, 행정을 회복시킨다는 전제를 제시하지만, 러시아가 만주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중국이 군비 배상만이 아니라 철도·인명·재산 손실을 보상하고 동만주철도와 북경을 연결하는 철도부설권을 허용할 때까지 군대를 주둔한다는 것 등 중국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는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외상 람스돌프가 중국공사에게 이 문제가 3월 16일까지 타결되지 않으면 러시아는 이 제안을 철회하고 자유행동을 취하겠다는 최후통첩적인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372)이 시기 만주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중국 및 열강들의 협상에 관해서는 金景昌, 위의 책, 505∼519쪽;Nish, Op. cit.(1985), 5∼7장 참조.

 러시아의 정책은 이후 ‘극동위기’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로 전개되었으며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러시아의 요구가 강압적이고 지나친 것이며, 또 열강들이 러시아의 요구에 반대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여순협정은 지방관리가 중앙의 승인없이 조인한 것이라는 구실아래 비준을 거부했다. 영국·일본·미국·독일 등 열강들은 러시아의 만주점령을 의화단사건으로 야기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정부와 열강간에 의화단사건을 종결하는 ‘의화단 의정서’에 포괄적으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며 개별 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러시아의 제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더구나 러시아의 요구는 서방국가들이 중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문호개방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열강들은 또 철군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러시아의 선언과도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 군대를 만주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열강들의 반러시아 전선은 이같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특히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요구가 자국의 이해를 직접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주도했다. 일본이 1901년 1월 러시아의 만주철병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중국에게도 만주를 러시아에 할양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01년 10월 이홍장이 러시아와의 협정안에 조속히 동의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일본은 ‘조인전에 반드시 일본정부와 협의’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또 러시아정부에 대해서는 러·중협정이 ‘타국의 조상상 권리나 이익을 훼손하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증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해 2월에는 중국이 러시아에 양보하면 열강도 중국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할 것이라는 점을 중국에 경고했다. 영국·미국·독일도 일본과 보조를 맞추어 중국에게 러시아와의 협정에 조인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열강들의 이같은 반러시아 전선은 1902년 1월 30일 영·일 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만주문제가 중·러간의 쌍무적인 성격이며, 또 중국이 독립국이므로 타국과의 조약은 자유라는 점을 들어 국제적 압력에 대응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구조적 관점에서 중국대륙에서 열강들 간의 세력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상황이므로 러시아 세력의 신장은 곧바로 다른 열강들의 권익을 침해로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즉 열강들은 일차적으로 러시아가 새로운 권익을 획득하는 데 반대할 것이며, 중국이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면 동일한 권익을 중국에 요구할 것이다. 중국은 열강들의 지원을 확신하고 1901년 4월 5일 러시아와의 교섭을 중단하며, 러시아도 결국 요구를 철회, 1902년 4월 8일 양국은 만주환부에 관한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그 내용은 만주에 대한 통치와 행정을 중국에 반환할 것과 러시아 군대의 철군 기한을 원래 3년에서 1년 반으로, 그리고 6개월 이내에 봉천성 서남부 요하에 이르는 지방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철도를 반환하며, 각 성의 군대는 그 다음 6개월마다 단계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373)金景昌, 위의 책, 514쪽. 그동안 친러시아 정책을 취해온 이홍장이 1901년 11월 17일 사망한 것도 러시아의 입장을 약화시킨 한 요인이었다.

 러시아는 이 협정에 따라 1902년 10월 8일 1차철병은 이행했으나 6개월 후인 다음해 4월 8일로 예정된 2차철병은 이행하지 않고 러시아군을 오히려 압록강 대안, 봉황성, 안동 지역으로 남하시켰다. 더구나 만주의 중심 도시인 奉天에서는 러시아군이 거짓 철수시켰다가 회군하고, 牛莊에서는 道臺(군수)를 억류해두고 행정 책임자가 없다는 구실로 철수를 거부하는 등 협정을 이행할 의도가 없음을 보였다. 이어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독점권과 몽고에 대한 간섭권을 의미하는 새로운 요구를 7개조(4월)·4개조·5개조(9월) 등의 형식으로 중국측에 제시했다. 문제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러시아의 요구조건이 아니라 이 시기 소위 ‘신노선’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이 결정적으로 강경 방향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국무상 베조브라조프와 니콜라이황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 노선은 만주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에서 러시아 기업을 지원하며 외국기업은 제거할 것, 이 지역의 방어능력을 재정부담에 관계없이 정치적·경제적 이해를 보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증대함으로써 다른 열강에게 만주를 영향권으로 만들겠다는 (따라서 열강들의 이해를 제거하겠다는) 러시아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신로선의 대두는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중요시되지 않는 압록강 유역의 이권과 관련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문제가 최소한 러일전쟁의 촉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374)Malozemoff, Op. cit., pp.177ff. 러시아 황제는 이같은 내용은 1903년 5월 15일 동아시아 문제를 총괄하는 알렉세에프장군에게 지시했다.

 이어 7월에는 여순항에서 알렉세에프를 비롯하여 베조프라조프, 육군상 쿠로파트킨, 중국주재공사 레사르(Paval M. Lessar), 주한공사 파블로프(A. I. Pavlov) 등 현지관리들이 참석하여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을 논의했다. 놀랍게도 이 회의는 온건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한국의 전부는 물론이고 북부지방의 점령도, 압록강 유역에서 전개하는 활발한 활동도 러시아가 한반도 북부를 탈취하려는 의구심을 일본에게 줄 것이며, 북만주 지역의 병탄도 난관이 많을 뿐만 아니라 행정비용도 막대하다는 점에서 기본정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는 동아시아 정책을 담당하는 인사들이 모였지만 이들간의 견해 차이가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종결됨으로써 앞으로 정책목표와 이를 추진하는 방식에서 불확실성과 혼란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375)베조프라조프의 등장과 위테의 권력 약화, 그리고 ‘신노선’에 대해서는 Ibid., pp.177∼227;Nish(1985), pp.170∼174;金景昌, 앞의 책, 516∼517쪽 참조.

 여순회의 후 러시아는 만주에서 3차철병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시아측의 설명은 철병문제는 외교부의 권한이 아니라 새로이 임명된 알렉세에프 극동총독의 권한이며, 극동총독은 황제에 직속되기 때문에 외교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한국에서 龍岩浦사건을 유발했다. 러시아는 한국정부와 벌목 계약이란 명목으로 러시아군을 벌목공으로, 병기를 벌목장비로 가장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주시키고 한국정부에 용암포의 租借를 요구했다(러시아는 결국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1903년 8월 23일 용암포 조차에 성공한다). 일본은 영국의 지원아래 한국정부에 대해 러시아가 용암포를 조차하면 일본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정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적합한 의주의 개항을 요구했다. 극동위기는 이같이 만주와 한반도를 포괄하여 일본·러시아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심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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