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1. 러일전쟁의 배경
  • 4) 영일동맹과 러일협상

4) 영일동맹과 러일협상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정책은 결국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일본 양국이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동맹이란 국제정치상 갈등·협조로 이루어지는 연장선상에서 협조의 최고 형태이다. 동맹국들은 공통된 이익을 위협하는 가상적국을 상정하고 이에 공동으로 대항한다. 따라서 영일동맹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최대의 해군국이며 또 상업세력인 영국과 이 지역에서 새로이 대두한 일본이란 지역세력이 러시아에 대항한다는 공통된 이익기반을 발견하고 협조관계를 공식화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일동맹은 이후 20년 동안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게 된다. 본장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영일동맹의 결성 자체와 양국간에 동맹이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러일전쟁의 발발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영일동맹은 동아시아 국제정치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일동맹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에게는 여전히 유럽의 열강관계에서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즉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가 동아시아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해상세력에의 야망을 영원히 포기할 것’을 기대했다.376)Nish, Op. cit.(1966), p.245. 영국의 의도는 1907년 8월 영·러협정과 연이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협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유럽우선주의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영국이 동아시아 문제에 계속 개입하게 만들었다.

 둘째, 영국이 일본을 동반자로 선택한 것은 청일전쟁 이후 이 지역에서 양국간의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지만, 그 기초가 된 것은 일본의 군사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국은 의화단사건 등을 통해 일본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의 군비증강은 청일전쟁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어 육군 병력은 평상시는 17만, 전시 60만으로, 군사예산은 1895년 11,000,000엔에서 1900년에는 60,000,000엔으로, 그리고 해군은 1896년∼1904년까지 4배 증강하여 당시 최대인 15,000톤급 전함 4척 및 수 척의 순양함·구축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군사력 전반의 증강만이 아니라 독자적인 해군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국은 일본의 해군능력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만이 아니라 프랑스·독일 등 모든 잠재적 적대국들로부터 영제국의 안전를 보장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시한다.377)특히 이 지역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호하는 영국해군은 일본해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됨에 따라 이 지역 해군정책을 지배할 것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다(Ibid., pp.174∼177·213;Langer, Op. cit., pp.405·690).

 그러나 양국간의 협력 가능성은 구체적 사안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익은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20세기초 영국은 동아시아 무역에서 과거와 같은 절대적인 지위는 잃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다른 열강들을 압도할 만한 능력을 보유했으며, 청일전쟁 후 러시아와의 대결 과정에서 중국정부가 양자강 유역의 불양도 선언을 하게 만들음으로써 중국의 경제적 중심부를 영국의 영향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청일전쟁으로 요동반도·대만을 획득했지만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반환하고 대만만을 보유할 뿐이었다.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영향력, 특히 경제적 영향력은 증대되고 있었으나 국제적으로 어떠한 지위도 승인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만주는 일본의 ‘영향권’ 밖에 존재했다.

 이것은 일본이 그들의 이익범위와 혹은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의 기존 영향권을 인정할 때에만 동맹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동아시아에서 잠재적인 팽창세력인 일본이 이 범위를 벗어나 팽창하려 할 경우에도 영국이 과연 양국의 협력기반이 존재한다고 평가할 것인지는 의문시되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팽창이 영국의 영향권과 충돌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영국이 이같은 공간으로 일본의 세력을 유도할 수 있다면, 또 이 지역에서 일본이 영국의 이익, 특히 상업상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영국이 일본을 관리할 수 있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이같은 공간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제정치적으로 힘이란 비어 있거나 약한 곳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만약 영국의 영향권에서 영국의 장악력이 약화되고, 따라서 영국의 일본 관리능력이 쇠퇴한다면 아무리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팽창은 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것은 러일전쟁 후 현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02년이란 시점에서 양국은 이같은 이론적인 문제는 접어두고 당시 전개되고 있던 범세계·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군사동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영일동맹을 평가할 때 일본과 영국 중 어느 쪽이 더 적극적이었느냐 혹은 어느 쪽이 이득을 보게 되었느냐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국가든지 타국과 동맹관계에 들어갈 때는 자국에게 유리한 면에 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한다. 당시 양국은 모두 안보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독일은 1898년부터 1차해군계획(연안 경비용)과 2차계획(1899, 대양 작전용)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해군력 건설에 착수했다.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거의 전적으로 해군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계획은 위협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관점에서 더욱 불안했던 것은 독일이 단독으로 영국의 해군에 대항한다는 전략이 아니라 영국이 유럽 대륙국가들을 상대로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세력균형 전략을 독일이 해군력 경쟁에서 재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독일은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핵심 해군력을 일단 건설하면 지난 수세기 동안 영국의 해양지배에 반대해 온 다른 대륙국가들이 협력하여 영국해군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대륙국가들의 해군동맹이 성립될 것으로 보았다. 독일의 적대국인 프랑스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의 위협은 해군력이 아니라 육군이라는 점에서 독일의 전략은 공허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의 계획에 대항하여 세계 도처에 산재한 영국해군을 본국 주변해역으로 재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영일동맹에 힘입어 동아시아 지역에서 동맹 직전인 1901년 전함과 순양함을 합쳐 38척이었던 것을 1910년에는 그 절반으로 축소하였으며378)Lowe, Peter, Great Britain and Japan 1911∼15, A Study of British Far Eastern Policy(London:Macmillan, 1969), pp.17∼18. 1905년 이후에는 태평양에서 영국의 해군력을 완전히 철수하면서 이 해역을 미국에게 맡겨버렸다.379)Nish, Ian H., Alliance in Decline-a Study in Anglo-Japanese Relations 1908∼23(London:Athlone, 1972), pp.22∼27·45∼47.

 반면 영국은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 정책의 동반자라는 필요성과 함께 불신·불안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래 국내적 성장과 대외적 팽창에 주력하고 있어 언제인가는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지위에 도전할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또 일본 국내에 반외감정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이것이 부활될 우려도 있었다. 영국의 대일본정책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조약에 의해 획득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데,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일본의 요구에 따라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것도 반영감정의 무마를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900년이 되면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유럽에서 동맹관계에 들어간 러시아·프랑스의 해군력과 영국·일본의 해군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황이었으므로 일본과의 동맹은 필연적인 귀결로 보았다. 이것은 영국에게 관한 한 동맹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국의 해군력에 대한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점이며, 대러시아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 외에도 일본의 근대화는 당시 영국사회를 지배하던 실용주의,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정신의 성공적인 적용이라는 일종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분위기도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영국에 비해 일본의 입장은 단순한 것이었다. 일본에게는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한 후 유럽 열강들과의 관계에서 ‘고립’의 탈피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일본외교의 지속적인 관심사인 이 문제는 백인국가들이 단결하여 일본에 대항할 때 일본의 안보 딜렘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소극적인 문제에서부터 백인국가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적극적인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3국간섭과 같은 사례 이외에도 미국과 유럽 열강들이 대중국 무역에서도 단결하면 일본은 제외될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유럽 열강 중 일국, 특히 동아시아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국가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은 이 딜렘마를 궁극적으로 해상세력인 동시에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정치의 주요 세력인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은 영국이 산업혁명의 선도국으로 철도·해군함정의 설계 등에서 선진기술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고 있었다.380)영일동맹에 임하는 양국의 입장에 관해서는, Nish, Op. cit.(1966), pp.8ff, 특히 p.36. 일본 역시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친중국적이며, 도서국가인 일본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북방의 러시아와 함께 해상세력인 영국이라는 점 등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양국은 1901년 4월 동맹체결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하여 다음해 1월 30일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381)여기에서 ‘공식적’을 강조한 것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열강들간에는 동아시아 문제를 두고 각종 동맹의 가능성이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과 중국의 동맹은 세계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가들간의 동맹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러시아에 대항하여 영국·중국·독일간의 동맹, 혹은 미국을 포함하는 안, 그리고 일본이 원했던 영국·독일·일본간의 동맹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논의들은 이를 제기한 각국에게는 일종의 정책건의(policy recommendation)에 해당하겠지만, 각국의 정책목표나 정책수행 능력, 그리고 동아시아 정책에서 나타나는 전통 등을 무시한 것으로서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다. 영일동맹도 초기에는 이같은 탐색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 주역은 런던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타다수(林董)와 영국외상 랜즈다운(Henry, fifth Marquess Lansdowne, 1900년∼1905년간 외상 역임)이었다.382)하야시의 동맹교섭에 관해서는 Pooley, A. M.(ed.), The Secret Memoirs of Count Tadasu Hayashi(London:G. P. Putnam’s Sons, 1915 ; 申福龍·羅洪柱 역주,≪林董 비밀회고록≫, 건국대 출판부, 1989) 참조. 그러나 영일동맹은 양국만의 쌍무적인 문제로 한정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동맹이 최종적으로 타결되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양국의 이해 범위 및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일본의 관점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이해가 영국에 비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영국이 보유한 이해는 주로 상업적 성격인데 비해 일본의 이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정치적·전략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동맹이 실제로 논의되는 과정에서 한국 문제의 처리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러시아 문제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양국은 모두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지중해(흑해 해협) 문제에서부터 중동, 인도 국경, 동아시아에 걸쳐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일동맹은, 성사된다면, 동아시아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이해가 동아시아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또 러·일간의 문제도 이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일동맹에 임하는 양국의 입장은 국제정치에서 루소(J. J. Rousseau)의 사슴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굶주린 사람 몇 명이 서로 ‘협력’하여 사슴 한 마리를 잡아먹자는 데 ‘합의’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슴을 잡기 위해 협력하는 도중에 지나가는 토끼 한 마리를 잡아 굶주림을 메운다. 이 사람이 토끼를 잡는 사이 사슴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해 버린다. 이 우화는 국제정치에서 국가들이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지만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협력이 어렵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383)Lieber, Robert J., Theory and World Politics(구대열 역,≪현대 국제정치 이론≫, 학문과 사상사, 1987, 153쪽).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두고 ‘협력’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국은 러시아와의 분쟁지역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양해에 도달하면 협력의 필요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가 특히 이에 해당하였다. 즉 영국은 세계 도처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지만 러·일간의 대립지역은 만주와 한국 등 동아시아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불만을 야기시킬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영·일 양국이 동맹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마지막까지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게 되었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양국간의 협상과정을 그 중요 쟁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협상과정에서 제기되는 일본의 원로, 특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의 간여에 관한 것이다. 명치시대 일본정치의 특수한 형태인 원로들은 천황과 수상의 자문에 응하는 일종의 초헌법적인 기관으로 영일동맹과 같은 중대한 외교적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은 1901년 동경정부가 런던주재대사 하야시에게 영국 외무성을 상대로 동맹교섭을 시작할 것을 승인하는 시기부터 이 문제에 간여했다. 이토는 런던과 동경간에 협의가 본궤도에 오른 이후에도 러시아와의 타협 가능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2월 페트로그라드를 방문하여 러시아 지도자들과 한국과 만주를 교환한다는 소위 韓滿교환으로 알려진 협상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한국에서 일본의 권익을 제한하려는 입장을 견지함에 따라 러시아와의 타협은 실패하였고 영국과의 동맹이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384)당시 이토의 개인적 외교행위에 대해서는 Nish, Op. cit.(1966), pp.185∼203 및 金景昌, 앞의 책, 525∼528쪽 참조. 이토의 개인적 외교행각은 성과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러시아에 제기한 문제들은 러일전쟁 직전 양국간에 진행된 한만교환, 포츠머스조약의 한국조항의 주요 쟁점 등이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의 핵심적인 쟁점들이 이미 표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토의 외교는 또 곧 서술하는 바와 같이, 한국문제에 있어 일본의 요구가 완강한 것이라는 점을 영국정부에 인식시킴으로써 영일동맹 협상과정에서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할 것이다.

 그 다음, 영일동맹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핵심적인 논쟁점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일 양국의 기본 외교정책 목표를 반영하는 것으로 한국의 장래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양측은 1901년 11∼12월 간 동맹조약 초안을 상호 교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동맹의 범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요구, 동아시아에서 해군력 수준 등의 문제를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양측은 동맹의 성격을 방어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데는 쉽게 합의했다. 즉 동맹 일국이 전쟁에 돌입하면 다른 동맹국은 중립을 지키며, 제3국이 적국을 지원할 때는 다른 동맹국도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영국이 양자강 유역에서 보유한 이해에 비해 일본이 한국에서 보유한 이해는 훨씬 높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동맹의 범위를 동남아 지역까지 확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양자강 유역의 영국 이권은 공동적이고 또 다른 열강에게도 어느 정도 열려 있던 것이지만 한국에서 일본의 이해는 구체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공동의 이해를 두고 일본의 보장을 받는 대신 일본의 구체적 이해를 보장한다는 것은 손해가 되는 거래라는 것이다. 일본과의 동맹으로 영국이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면 영국의 적국은 러시아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될 것이다. 전쟁 지역은 주로 동아시아가 되겠지만 영국의 戰域은 영불해협·지중해, 그리고 인도국경 지역까지 확대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 비해 영국의 부담이 훨씬 크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동맹의 범위를 동아시아 외부로 확대하는 것이 불합리한 주장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특히 육군성과 인도 담당성은 내각에서 영국측 초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페르샤와 아프간 국경에서 러시아의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양자강 유역이 한국에 대한 대가로서 충분한 것이며, 이 지역이 당시로서는 안정되어 있지만 언제 난관이 제기될지 모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영국이 일본의 양보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동맹의 범위는 ‘극동’으로 한정되었다.

 두번째 문제점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데 영국이 동의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관한 것이다. 영국은 앞서 언급한 이유에서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영국측 초안에서 ‘한국의 독립’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일본은 수정안에서 ‘일본은 제3국이 한국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것을 방지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영국은 이 조항은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침탈을 문제삼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재량권을 주는 것’이며, 또 이로 인하여 일본의 자의대로 개시한, 특히 영국에게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분쟁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랜즈다운은 일본이 ‘매우 충분한 이유가 없으면 가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하야시의 보장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영국은 일본의 앞잡이가 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청일전쟁 때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의 팽창주의를 인지하기 시작한 영국으로서는 일본의 요구는 어떠한 명분을 붙이든 팽창주의일 뿐이며 영국이 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즉 한반도 문제를 두고 일본에게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재량권을 주는 것은 일본이 침략자인 경우에도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공동으로 논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혼란은 항상 갑자기 일어난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영국과 상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영국은 한국에서 일본의 재량권을 승인한다고 해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침략적 성향을 고무한다는 우려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일본의 요지였다. 영국은 물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요구는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침략적 의도가 없음을 천명한다.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상공업상 특별한 이해를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영국은 또 일본이 제3국의 침략적 행위로 인하여 한국에서 일본의 이해가 위협받을 경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로써 영국은 한반도에서 분쟁으로 인하여 전쟁에 불필요하게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논쟁점은 동아시아에서 해군력 수준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군사력이란 주로 해군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문제는 영국의 관점에서는 동맹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1902년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보유한 전함 9척에 비해 전함 12척을 유지하며, 그 외 순양함도 수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영해군성은 일본과의 동맹은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해군력을 증강하지 않으면서 장기적으로는 영국함대를 철수시켜 유럽에서 독일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평화시 양 해군간의 협조와 전시 해군시설의 상호이용’은 영국이 홍콩에 새로운 해군선착장이나 석탄저장소를 건설할 필요도 줄어드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같은 계산에서 동맹 양국이 유지해야 할 함정의 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평화시 함정의 수리와 석탄보급 등 상호협조만을 규정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함정의 수를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원했다. 일본 해군성은 영국이 이 조약을 이용하여 해군력을 동아시아에서 철수시킬 경우 일본은 러시아만이 아니라 프랑스·독일의 해군력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초안은 이 조항을 더욱 엄격하게 ‘각 동맹국은 극동에서 3국의 극동함대 중 가장 강력한 함대보다 더 강력한 함대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다. 즉 영국과 일본 모두 러시아의 극동함대보다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자신의 해군력을 어느 지역에 어느 수준으로 배치할 것을 강요하는 조항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또 남아프리카·유럽 등에 수많은 공약을 하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중국해에 일정한 해군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동맹 체결후 일본이 영국의 해군력 지원이 불만이라고 판단하면 5년이 지난후 언제든지 동맹을 종결시켜도 좋다고 통고했다. 이에 일본은 ‘동맹 양국이 가능한 한 제3국의 해군력에 비해 우월한 해군력을 유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선으로 양보한다. 영해군성은 ‘가능한 한’이라는 구절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우월한 해군력’이란 중국해에 주둔한 모든 종류의 함정을 총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본은 영국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 조항은 비밀로 남겨졌기 때문에 이후 공개적 논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385)Nish, Op. cit.(1966), pp.181∼183·211∼219.

 양국은 이상의 문제들에 대해 약 2개월간 힘든 협상을 끝내고 1902년 1월 30일 동맹조약에 서명했다. 영국으로서는 당시 가장 절실한 해군력 협조를 일본을 통해 확보하며, 일본은 영국의 완전한 동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더욱 중요한 점은 동맹조약에 힘입어 일본이 만주 및 한국문제를 두고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주와 한국문제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간의 마지막 협상은 1903년 7월 이후 전개되었다.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강경책으로 이 지역에서 그들의 지위를 공고화함에 따라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긴박감으로 느꼈던 것이다.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쿠로니(栗野愼一郞)는 8월 12일 람스돌프 외상에게 다음과 같은 6개항의 협상 기초안을 제시한다. 중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 그리고 상공업상의 기회균등(1조),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승인하고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경영에 대한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승인할 것(2조), 한국의 철도를 만주 남부로 연장하는 일본의 권리를 러시아가 방해하지 않을 것(3조), 양국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또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은 한국에,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필요 이상 초과하지 않으며 이 군대는 임무가 끝나는 대로 즉시 소환한다(2·4조), 한국의 개혁을 위해 일본은 군사원조를 포함한 지원과 조언을 줄 수 있는 전권을 보유하고 있음을 러시아가 승인한다(5조).

 흔히들 ‘韓滿교환’으로 알려진 일본안은 그 내용상 일본은 한국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지만 만주에서 러시아의 권익은 상업상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1903년의 한만교환은 영일동맹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1년 12월 이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 지도자들에게 제시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당시 이토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인 권리를 러시아가 인정하면 만주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보장했다. 그는 위테에게 러시아가 한국에서 상업·정치·군사상의 권리를 일본에게 일임한다면 일본은 러시아가 우려하는 한국의 독립과 대한해협의 통행 등을 보장하고 한국을 러시아에 대한 전략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즉 1903년의 협상안은 그 동안 일본이 영일동맹과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물론 러시아는 일본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10월 3일에 로젠(Romanivich R. Rosen)공사를 통해 고무라(小村壽太郞)외상에게 러시아의 대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약속한다(1조)는 전제 아래,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월한 이익을 승인하고 한국의 民政을 개량하는 조언과 원조의 권리를 승인하며 일본의 상공업적 기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승인한다(2·3조).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러시아측에 알릴 것이며 군대는 임무가 끝나는 대로 즉시 소환하며(4조), 한국 영토의 일부라도 군사상 목적에 사용하지 않을 것과 대한해협의 자유통행을 방해하는 시설을 한국해안에 설치하지 않을 것(5조), 북위 39도 이북의 한국영토는 중립지대로 설정하여 러·일 양국이 모두 군대를 넣지 않으며(6조), 만주 및 그 연안은 전혀 일본의 이익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일본이 승인한다(7조). 이것은 일본안과는 정반대 되는 입장에서 만주는 러시아의 독점적인 권익 범위내에 넣는 대신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제한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이같이 한국과 만주를 양국의 이익범위로 인정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은 절대적인 것으로, 상대방의 이익은 제한적인 것으로 설정하려했다. 양측은 1903년말까지 협상을 계속하지만 타협의 여지는 줄어들었다. 1904년 1월 6일 전달된 러시아의 최종안도 별다른 양보를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조약으로 러시아가 만주에서 획득한 권익을 일본이 방해하지 않을 것, 그리고 일본의 거류지 설치 금지를 요구하는 등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일본의 권익을 여전히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행동권을 행정개혁을 위한 조언과 원조로 한정하며 군사적인 것은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협상에 의한 타협의 여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고무라외상도 1월 13일 로젠공사에게 일본의 최종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일본은 만주와 그 연안이 일본의 이익범위 밖이며, 한국과 그 연안이 러시아의 이익범위 밖이라는 점을 상호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그 다음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의 영토보전을 존중하고 일본 및 열강들이 중국과 맺은 조약으로 만주에서 획득한 권익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러시아가 요구한 한국에서 군사적 시설의 설치금지, 39도 이북의 중립지대 설치, 만주 거류지 설치금지 등을 삭제해 버렸다. 일본은 2월 2일까지 러시아 정부의 회답을 요구했으나 러시아가 이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2월 6일 국교단절과 독자행동을 통첩하기에 이른다.386)러일간의 협상과정에 관해서는 Kajima, Morinosuke, The Diplomacy of Japan 1894∼1922(Tokyo:Kajima Institute of International Peace, 1976), Vol. Ⅱ, pp.97∼117;Nish, Op. cit.(1985), 12∼14장;White, Op. cit., 6장;金景昌, 앞의 책, 531∼533쪽 등 참조.

 이 시기 러·일간의 협상과 함께 전쟁을 피하기 위한 관련 열강들의 외교적 노력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양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영국은 러·일 양국에게 조정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일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903년 10월 람스돌프 러시아 외상이 파리를 방문한 후 프랑스의 델까세(Theophile Delcassé) 외상은 러·일간에 거중조정이나 중재를 담당하려는 의사가 있음을 영국과 일본에게 표명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지연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도움을 줄뿐이라는 관점에서 거부했다. 영국은 일본의 요구 중 일부는 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모든 결정을 동맹국인 일본에게 일임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요구하지 않는 중재에 나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더구나 일본이 영국의 압력으로 요구조건을 수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약 1개월 전인 1904년 1월 13일에도 델까세는 프랑스가 러시아에 엄청난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으므로 평화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들어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일본대사를 설득했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일본의 전략적 목표에 이용하는 데 러시아가 억제력을 행사하는 조건을 내세우는 한 타협의 여지는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387)White, Op. cit., pp.124∼126.
Nish, Op. cit.(1966), p.281.
즉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은 프랑스의 설득이나 영국의 관리범위에서 벗어나 독자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 다음 일본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하게 된 이유를 간단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추구한 목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간의 관계는 주로 한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만주는 사실상 일본의 이해 영역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의화단사건 이후 러시아의 만주점령을 계기로 일본은 러시아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열강들의 연대에서 선봉을 담당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만약 1901년 이토가 추진했던 한만교환이 이루어졌다면 일본은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만으로 만족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1903년 후반기에 러시아에 제시한 협상 기초안 중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제한한 조항들은 양보에 대비한 협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권익, 특히 정치적 의미를 갖는 권익은 집요하게 제한하려 했다. 만주에서 중국의 주권을 승인하며 러시아의 권익을 철도 등 상업적인 것으로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화단사건 이후 만주문제가 전략적인 관점에서 한국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을 일본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승인 받는 대신 (이 점에 있어서도 러시아는 일본의 이익을 상업적인 것 이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러시아의 재량권을 모든 분야에서 승인한다면 만주는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가 될 것이며, 이 결과 수년 내에 러시아는 한반도를 대상으로 팽창을 시도하여 한국은 또다시 러·일간에 분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즉 일본의 관점에서는 만주와 한국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만주로부터 완전한 이익의 철회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한만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러시아가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만주에 있어서도 일정한 이익의 확보와 러시아의 축출 혹은 행동제한이었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전쟁을 촉발할 때 승리를 확신했느냐 하는 점이다. 1903년 후반기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상황이 조성되면서 일본 군부는 이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였다. 결론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조기에 치르는 것이 일본에게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영국 및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만주에서 철수시켜야 하며, 이것이 실패할 경우는 일본 단독으로 러시아와 타협에 들어가야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무력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것은 빠를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즉 러시아군에 비해 일본군이 우세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영일동맹이 존재하며, 또 러시아의 만주점령으로 중국에서 반러시아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 놓치면 이같은 호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88)Nish, Op. cit.(1972), pp.157∼161.

 반대로 러시아는 국내적으로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원했다. 이것은 유럽에서 1848년 혁명 이후 유럽의 절대왕정들이 국내적으로 산업화와 민족자결의 확산에 따른 정치적 불안과 대외적 행위, 특히 전쟁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독일은 3차례의 전쟁을 통해 민족통일을 완성하면서 사회혁명을 피하고 이후 과격파들을 제국체제내에 흡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혁명을 피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실패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오스트로-항가리 이중왕조로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전쟁에서 패배하면 혁명이 일어난다고 믿게 된 것이다. 러시아 역시 20세기초 대외적 전쟁만이 국내혁명을 저지하는 수단이라고 믿고 손쉬운 상대라고 평가한 일본과의 전쟁을 결행하게 된 것이다.389)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국가들이 전쟁과 혁명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Taylor, A. J. P.,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1986), xxxiii∼xxxv 참조. 러시아의 여론은 물론 동아시아에 주둔한 러시아의 육군과 해군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폴레옹도 이겨낸 러시아가 일본을 겁낼 이유가 없으며, 전쟁은 러시아군의 일본상륙으로 끝날 것이라고 호언했다. 오히려 일본의 외교적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 ‘제2의 세바스토폴’이 될 것이라고 일본과의 전쟁을 원했던 것이다.390)Kajima, Op. cit., Vol. Ⅱ, pp.114∼115.
세바스토폴은 크리미아 전쟁중 영국 등 연합군에 함락된 흑해 크리미아반도에 있는 러시아 군항이다.
이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국내외적 정책 및 상황과의 연계에서 러일전쟁을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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