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1) 러일전쟁의 경과

1) 러일전쟁의 경과

 러일전쟁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 이후 비서양 국가가 서양 열강 중 하나를 상대로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이다. 일본은 이 전쟁이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것이라는 각오 아래 나고야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정치지도자들과 국민이 단결하여 총력전 태세로 이에 임했다. 러시아는 국내적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정치·경제의 중심부인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극동’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에 대해 제한적인 군사·경제적 자원을 동원하여 대응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절대적 이해와 러시아의 부차적인 이해가 충돌한 전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양국의 임전태세는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며 러시아는 저녁식사를 위해 싸운다’고 비유되었다.391)Okamoto, Shumpei, The Japanese Oligarchy and the Russo-Japanese War(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1970), p.105. 그러나 대륙세력인 러시아는 그들의 능기라고 할 수 있는 육상전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발틱함대를 극동戰域에 동원하는 무리수를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지난 수백년간 지속된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가 그 절정을 지나 쇠퇴하는 전주곡으로서 식민지 해방운동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전쟁행위는 일본에 의해 개시되었다. 일본 연합함대는 1904년 2월 6일 사세보항을 출발, 러시아 함대가 머물고 있는 인천과, 황해에서 러시아 해군의 거점인 요동반도의 여순으로 향했다. 인천으로 향한 제4전대는 육군 운송선 3척을 호송, 이들을 한반도에 상륙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2월 8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순양함 2척을 공격, 침몰시키고 수송선은 상륙작전을 완료했다. 러일전쟁은 이같이 인천 앞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여순으로 향한 연합함대는 2월 9일 심야에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여 전함 2척, 순양함 1척을 좌초시켰다. 이어 2월 10일 일본이 먼저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러시아도 같은 날 일본에 전쟁을 선언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이 예상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러시아의 전쟁준비는 충분치 못했으며 더구나 군수품 보급은 5,0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모스크바로부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철도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먼저 여순항에서 러시아 함대가 전멸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역에서 러시아는 해군으로 일본 본토를 위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여순항은 발해만과 만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전략적 요지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게는 청일전쟁 후 3국간섭으로 일본으로부터 빼앗은 극동경영의 본거지로, 일본에게는 3국간섭의 치욕을 씻는 복수전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육지에서의 첫 전투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의주와 중국의 안동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도강을 저지하려는 러시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4월 30일 압록강 북안에 도달하였다. 유럽 열강들은 이 전투를 보불전쟁 중 프랑스가 참패한 바에센부르그(Weissenburg)전투에 비교하면서 러시아의 자신감이 위축되었다고 평했다.392)White, John Albert, The Diplomacy of the Russo-Japanese War(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4), p.151. 이로써 일본은 한반도에서 만주로의 진격로를 확보, 러시아군을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향해 진격하면서 9월초에는 遼陽, 10월 중순에는 사호(Shaho)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며, 드디어 여순항을 포위, 러일전쟁 중 가장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월 1일 여순항의 러시아 수비대가 항복함으로써 전쟁의 명암이 일본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었다.393)육상전투에 관해서는 Ibid, pp.149∼154 및 Okamoto, Op. cit., pp.105∼111 참조. 이후 전선은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3월 10일 만주의 전략적 거점인 奉天(오늘날 심양)대회전에서 전사 2만, 포로 4만 등 10여만 명의 희생을 내면서 패배하였다. 러시아는 육상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발틱함대를 극동해역으로 파견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아프리카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에 진입한 러시아 함대는 5월 27일∼28일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전멸 당하였다.

 이로써 전선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해가 집결된 하얼빈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일본은 전쟁 전 추구했던 한반도에서 이해의 확보라는 범위를 넘어 남만주에서 러시아를 축출하고 북만주마저 석권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완전히 일본에게로 기울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의 유지를 통해 상업적 이해를 확보하려는 영국이나 미국 등 구미열강들의 이해와도 상반되는 것이었다. 평화협상은 이같은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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