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2)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 (2) 태프트-가츠라밀약

(2) 태프트-가츠라밀약

 일본은 영일동맹의 개정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상대로 해서 한국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제 전반에 걸쳐 의견을 교환했다. 소위 태프트-가츠라밀약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한국 근대사·외교사에서 잘못 해석되어 내려오고 있는 문제중 하나이다. 여기서는 기존의 연구서들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이에 관한 문제점들을 검토하겠다.

 기존의 해석은 일본이 영일동맹의 개정과 함께 미국으로부터도 한국문제에 관해 영국과 같은 수준의 보장을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1905년 7월 미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award Taft)가 필리핀을 시찰하기 위한 여행을 하는 중 도쿄에 머물게 되었다. 일본수상 가츠라는 이에 태프트와 함께 동아시아 정국 전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가츠라는 ‘한국은 러일전쟁의 직접 원인이므로 일본은 이 전쟁의 당연한 결과로서 한국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동의없이 타국과 어떠한 약정을 체결하지 못하게 하는 정도의 종주권을 일본이 한국에 설정하는 것은 당연한 戰果에 속하고 극동의 영원한 평화에도 공헌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동의를 표했다. 이어 양인은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 침략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미국의 지배를 확인하고, 둘째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영·일 3국이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보하며, 셋째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한다. 이것을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데네트(Tyler Dennett)가 논문에서 상호 대가를 교환한 권력정치적인 비밀조약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이 문제는 아무튼 비판적 검토없이 한국과 필리핀을 교환한 ‘밀약’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408)이에 관한 일반적인 기술은 金景昌,≪동양외교사≫(박문당, 1982), 554∼555쪽;성황용,≪근대동양외교사≫(명지사, 1992), 338∼339쪽 참조.

 그러나 이 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우선 이것은 ‘밀약’이나 협정·조약이 아니다. 단지 가츠라와 태프트 (물론 양인은 양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간의 대화를 기록한 메모에 불과한 것이다. 태프트는 대화 내용을 신임 국무장관 루트(Elihu Root)에게 보고하면서 가츠라가 회견을 열망하여 피하기 어려웠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국무장관이 수정할 것을 권유했다.409)태프트의 전기에는 태프트가 심각한 협상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으며, 일본정부 지도자들의 면담 내용도 육군장관인 자신이 국무성의 업무에 간섭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국무성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Anderson, Donald F., William Howard Taft-A Conservative’s Concept of the Presidency, Ithaca & London:Cornell University Press, 1968, pp.22∼23 및 Pringle, Henry F., The Life and Times of William Howard Taft, New York:Farra & Rinehart, Inc., 1939, Vol. Ⅰ, pp.303∼304). 태프트는 이어 이 회견내용을 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승인받는다. 이 ‘밀약’이 맺어진 2년 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될 정도로 악화되는데, 이때 미국정부는 이 ‘밀약’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두 국가간에 위기상황이 조성될 경우 양측의 정책 입안자들은 양국관계를 규정하는 기존의 조약들을 점검하며 이것을 기준으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이다. 1907년의 위기에서 미국무성이 태프트-가츠라‘밀약’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양국관계에 의무를 규정하는 협정이나 조약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같은 형식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일 것이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결과 필리핀을 소유하게 되었다.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는 국제적으로도 확고한 것이었다. 또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외국의 어떠한 간섭도 독자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이나 다른 열강으로부터 필리핀의 안보에 대해 보장을 받는다는 것은 넌센스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밀약’은 기존의 정세에 대해 상호 의견을 교환하면서 일본의 한국 장악은 일본에게 유익하며 또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미국의 입장을 재천명한 것뿐이라는 해석이다.410)이에 관한 논의는 Esthus, pp.102∼106. Chay, Jongsik, ‘The Taft-Katsura Memorandum Reconsidered’, Pacific Historical Review, 37-3(1968. 8)도 참조.

 태프트-가츠라밀약이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들 양국 지도자간의 대화에서 나타난 태프트의 태도는 당시 서양사회에 팽배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 국제정치를 해석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되었으며, 미국이 한국문제도 동일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생존투쟁 등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적 개념들은 사회집단에 적용시킨 것이다. 종족·민족·사회·국가도 유기체이며 모두 생존투쟁 법칙에 따라 투쟁한다. 여기에서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며 우수한 종족·민족·국가만이 살아 남는다. 투쟁은 진보의 조건이며 역사의 영원한 법칙이다.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민족·국가의 강인함을 보장해 주는 군국주의와, 팽창과 정복이 특정 인종·국가에게 부여되었다는 사명의식을 고양시킨다. 사회진화론이 본 주제에 갖는 의미는 서방 열강들의 식민지 정복과 타민족 지배, 대외팽창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라는 점이다. 즉 문명이란 관점에서 국가나 사회를 평가하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본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권익 확대에 직면한 부르조아지 계급의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이용되면서 유럽과 미국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다.411)사회진화론에 대해서는 Hofstadter, Richard, Social Darwinism in American Thought(Boston:Beacon Press, 1992), 특히 9장 및 전복희,<사회진화론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한국에서의 기능>(≪한국정치학회보≫27-1, 1993) 참조.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 시대정신에 대해서는 Langer, Op. cit., pp. 67∼100 참조.

 루즈벨트 대통령을 포함하여 당시 상당수의 毆美 지식인들은 구한말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후진적이며, 한국은 국제경쟁에서 패퇴하는 열성민족·국가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1880년대 한국의 개국에서 합방에 이르기까지 정치지도자의 부패와 무능, 근대국가로 향한 개혁의지와 독립 능력의 결여, 일반 대중에 대한 착취, 이로 인한 대중의 무지와 경제적 빈곤, 사회적 혼란, 이에 편승한 주변 열강들의 침탈 등을 끊임없이 목격해 왔다. 열강들은 이같은 관점에서 한국정부나 군주를 유럽의 근대국가와 대비되는 동방 이슬람문화권 군주들처럼 근대적 국가의 통치술은 없으면서 궁중 음모적 수법에만 익숙하다고 평가했다. 구한말의 상황은 전근대적 전통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외세의 침탈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중국 등 여러 국가에서 목격되는 것이지만, 한국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은 당시 서방 열강들의 한국관계 외교문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흐름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면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서방의 기술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 중국’에 대비되는 ‘진보적 일본’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일본의 한국정책은 침략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문제삼기보다는 한국에 정치-제도적 개혁과 선진문명의 전파를 위해 노력한다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412)미국의 한국관은 Esthus, Op. cit., pp.7·39·96∼100·110∼111;Harrington, Fred H., God, Mammon and the Japanese-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ican Relations, 1884∼1905(Madison: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 pp.96∼98·326;Dennett, Tyler, Roosevelt and the Russo- Japanese War(Garden City, N. Y.:Doubleday, Page & Co., 1925), pp.108∼111 등 참조. 친일적인 미국인 학자 Ladd는 고종을 ‘최고 음모꾼(a master of intrigue)’이라고 묘사했다(Ladd, George Trumbull, In Korea with Marquis Ito,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08, pp.151∼152). 당시 영국의 한국관에 대해서는 구대열, 앞의 책, 77∼80쪽 참조. 영국은 한일관계를 강한 종족과 약한 종족간의 투쟁이라 보았으며(Jordan to Lansdowne, 1904. 6. 30, FO/17/1660(144)), 한국에 대해 국민은 어리석고 나라는 망해 가고 있어 일본이나 중국·러시아 등 한반도에 야심을 가진 주변 강대국에게 병합될 운명이라고 진단하고 있다(Jordan to Lansdowne, 1904. 1. 20, FO/17/1659(17) 및 그 첨부물). 반면 일본은 영국이 자랑하는 이집트 지배 모델을 한반도에서 실험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러일전쟁 초기 일본이 한국정부를 장악, 각종 개혁 조치를 발표하자 ‘옳은 방향을 향한 일보’라고 찬양하고 있다(Minute on Cockburn to Grey, 1906. 5. 15, FO/371/179 (22706/306);Lansdowne to MacDonald, 1905. 9. 26, FO/46/590(151)). 한국 군주와 그리스나 아프간 등 동방 제국의 군주들의 비교는 구대열, 앞의 책, 25쪽 참조.

 한국과 일본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당시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던 미국 지도자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특히 전형적인 사회진화론자인 루즈벨트는 쇠퇴한 민족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팽창을 지지하면서, 한국은 독립을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단정, 러일전쟁 후 일본의 보호권을 간단히 인정해 버렸다. 동일한 논리에서 미국이 파산한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파나마 지역을 빼앗아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 세계문명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413)Esthus, Op. cit., p.101.
Combs, Jerald A., American Diplomatic History-Two Centuries of Changing Interpretations(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p.67.
Dougherty, James E. & Pfaltzgraff Jr., Robert L., American Foreign Policy -FDR to Reagan(New York:Harper & Row, 1986), pp.9∼10.

 태프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 방문 중 연설을 통해 문명국(강대국)이 후진국(약소국)에 간섭하여 이를 개혁하는 행위를 당연한 권한이며 이것은 강대국들에게 전략적 필요성에 의한 간섭과 동일한 수준의 정당한 이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한일관계를 이같은 관점에서 평가하면서, ‘일본은 15세기적 방법으로 잘못 통치하고 있는 가까운 이웃인 고대 왕국을 개혁하고 소생시키기 위하여 정당한 이해를 갖고 이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414)Taft to Theodore Roosevelt, 1907. 10. 5, M862, R. 191, 1797/380/383의 첨부물(M은 Microfilm, R은 Roll의 약어). 즉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배는 열강들이 지역평화를 수호한다는 차원에서 약소국에 대한 개입과 동일하게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미국의(영국도 포함해서) 한국문제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정치적·전략적 이해와 합쳐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지지하는 기초가 되었다. 일본도 이 논리를 충실히 추종하여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태프트-가츠라밀약은 이같은 상황에서 미육군장관 태프트가 가벼운 기분으로 일본 수상과 동아시아 정세에 관해 환담하면서 미국정부의 기존 입장을 재천명한 정도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415)가츠라-태프트 밀약에 관한 국내의 기존 해석에 주의를 환기시킨 연구로는 李愚振,<러일전쟁과 한국문제>(한국 정치외교사학회 편,≪한국외교사≫1, 집문당, 1993), 346∼348쪽. 이 논문은 그러나 일본이 루즈벨트 개인의 대일본관 변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Okamoto도 일본 지도층이 Roosevelt의 대일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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