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3) 러일전쟁과 한국

3) 러일전쟁과 한국

 러일전쟁과 戰後 열강간에 체결된 조약들을 통해 이루어진 이해관계 조정은 한국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열강들은 전쟁 초기에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들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기정사실로 간단히 승인해 버림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보호화 하고 이어 합방으로 나아갔다. 그러면 당시 한국정부나 국민들은 러일전쟁이 한국의 장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충분히 인식하고 대비했던가.

 한국사회는 1903년 후반기부터 러일전쟁에 관한 풍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는 반외세적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러일전쟁 직전≪帝國新聞≫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외세배격을 선동하고 있었다.

최근 여러 외국공사들은 소위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뻔뻔스럽게도 수천 명의 군대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오늘날 소위 개화된 세계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과거의 시대보다 더욱 악랄하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행위는 똑같이 일어나며, 과거에 비해 신뢰·율법·수치심이 더욱 없다… 약소국에 대해서는 공인된 법도 없는 상태이다… 오늘날 각국들이 大韓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들의 깊은 분노와 근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의 후안무치는 한계가 없다. 이들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의 눈에는 한국이란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우리 나라는 여전히 독자적인 정부와 (외세에) 대해 정당한 저항을 할 수 있는 힘을 갖은 위엄있는 독립국이다. 왜 너희 신민들은 이들 후안무치한 외국군인들을 몰아내려 하지 않느냐 ! … 국가가 편안해야 나의 생명과 재산이 편안하다는 것이 만고의 법칙이다(≪帝國新聞≫, 1904년 1월 22일).419)Jordan to Lansdowne, 1904. 1. 22, FO/17/1659(20)의 첨부물.

 한국정부는 러·일간의 전쟁은 한국의 독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고 1903년 후반기부터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을 중립지대로 교전국들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은 1903년 8월 영국인 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McLeavy Brown)에게 이에 관한 문서를 작성케 한 다음 일본과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양국은 전쟁발발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420)Jordan to Lansdowne, 1903. 8. 26, FO/405/139(6).
≪日本外交文書≫ 36-1, 719·721∼722쪽.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2주일 전인 1904년 1월 21일에도 고종은 왕실의 안위를 위해 서울과 인근 지역만이라도 중립지대로 보장받으려 했다. 고종은 벨기에 출신 고문인 델꼬뉴(M. Delcoigne)의 도움으로 중립선언을 작성, 밀사를 중국 개항장 芝罘(Chefoo)에 파견하여 이곳에서 한국의 이해를 대리하고 있는 프랑스 영사를 통해 러시아·일본 등 관련국들에 발송했다. 그러나 한국의 중립이란 열강들이 예견한대로 어느 한 교전국(일본)이 전쟁과 함께 한국을 점령함으로써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421)이 시기 한국의 중립화 시도에 관해서는 구대열,<대한제국 시대의 국제관계>(≪대한제국 연구≫Ⅲ, 한국문화연구원, 1985), 24∼28쪽 참조.

 문제는 한국정부나 고종의 노력이 국제정세와 열강의 외교행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열강의 ‘보장’을 통해 왕실의 안위(독립도 포함해서)를 보존하려는 안일한 발상에 기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관한 일화로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영국 The Daily Mail의 기자 맥켄지(Frederick McKenzie)와 당시 한국정부 실력자들 중 한 사람인 李容翊과의 대담이 있다. 후일≪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과≪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등의 저서로 친한 반일활동으로 유명하게 되는 맥켄지에게 이용익은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유럽 열강들에 의해 보장되었음으로 러·일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위험이 없다고 설명했다. 맥켄지는 이에 대해 한국이 그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데 어느 나라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려 할 것인가 라고 묻자, 이용익은 미국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고 있다. 미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맹방이 될 것이다.” 이용익이 말한 미국의 약속이란 1882년 한미수교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말한다.422)Frederick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New York:Ravell, 1920), pp.77∼78.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 특히 유럽의 열강관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들 간의 동맹관계를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외교관도 있었다. 러일전쟁 전 런던주재 한국공사관의 李漢應 서리공사가 바로 그 인물이다. 이한응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04년 1월 13·19일 두 차례 런던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장문의 메모와 각서를 수교하였다. 이한응은 이 각서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戰後의 지역정세는 戰前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런 상황에 비추어 영국이 열강과 양해를 통해 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지 관계없이 한국의 독립·주권·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해 새로운 보장을 해줄 것을 요망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불가결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수 개의 도표를 통해 동아시아의 지역정치를 범세계적 차원의 세력균형 체제와 연결, 설명함으로써 그 타당성을 증명하려 했다.423)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구대열,<李漢應과 한-영관계-그의 한반도 중립화안을 중심으로->(≪성곡논총≫ 16, 1985) 참조.

 영국 외무성은 이한응의 메모를 철저히 검토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의 외교적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실망한 이한응은 1905년 5월 12일 자결했다. 이 사건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의 일이며 이 시기 최초의 순국으로 기록될 것이다.

<具汏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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