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1. 국권의 제약
  • 2)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와 을사5조약
  • (1)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과 국제적 승인과정

(1)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과 국제적 승인과정

 1905년에 접어들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는<綱領及細目>에 규정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스스로도 “該國(한국) 국방·재정의 실권을 我(일본) 손에 收攬하고 동시에 해국(한국)의 외교를 아 감독하에 두고 또한 조약체결권을 제한하였다”고438)≪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1<日韓協約締結竝統監府設置ノ件>, 문서번호 250, 韓國保護確立ノ件, 519∼520쪽. 자평할 정도였다.

 한편 러일전쟁의 전황은 일본군의 연승으로 1월에는 여순항을 함락하고 3월에는 봉천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5월에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일본해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이제 일본은 전쟁의 승리와 한국의 보호국화 경영으로 최후 병탄에 대한 자신감을 굳히게 되었다. 일본은 1905년 4월 8일에 전시 각료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을 ‘보호국’439)외교용어로서의 보호관계는 제3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협받는 상태에 있는 국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특정국가가 보호해주는 관계를 의미하지만, 국제법상의 보호관계란 보호를 하는 국가가 보호를 받는 국가의 외교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획득하여 외교기능을 대행하는 관계이다. 즉 ‘보호국’ 지배는 제국주의국가의 식민지 획득과정에서의 지배의 한 방법으로, 즉 예속국의 통치기능의 일부를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海野福壽, 앞의 책, 126∼127쪽). 으로 만들 것을 결의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일제는 이 각료회의에서 앞으로 체결할 보호조약의 요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제1조 한국의 대외관계는 전연 제국(일본)에서 이를 맡고 재외 한국 신민은 제국의 보호 아래 둘 것.

제2조 한국은 직접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못할 것.

제3조 한국과 열국과의 조약의 실행은 제국이 그 책무를 맡을 것.

제4조 제국은 한국에 駐箚官을 두고 한국 施政의 감독과 제국 신민의 보호에 임하게 할 것.

 이러한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바로 1904년 5월 말경에 결정한<對韓方針>·<강령>및<세목>등에 명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교권의 박탈에 대한 항목은<강령>의 제2항과<세목>의 제1항에서 “最近한 기회에 있어서 한국으로 하여금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 안건의 처리에 관하여는 미리 제국정부의 동의를 요할 趣를 訂約케 할 것을 期함”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일본측의 한국 식민지화의 의도를 분명히 한 것으로 을사5조약과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다음으로 한국에 주차관(통감)을 둔다는 조항은<강령>과<세목>등 기왕의 결정사항들을 현지에서 강력히 추진시킬 인물을 파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를 수행하는 조약체결의 형식이 꼭 필요한 까닭은 국제적으로도 한국이 일본의 완전한 보호국이라는 승인을 받아 러일전쟁 전에 결정한<대한방침>에 언급된 ‘名儀’를 세워 한국병탄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저의였다.

 그러나 한국의 보호국화를 위한 조약을 체결하는 문제는 일본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왕에 체결된<한일의정서>와<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같은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와 직접적인 관련이 적었으므로 군사적 위협으로 성취할 수 있었지만 이 조약만은 영·미·불·독 등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므로 서두를 수 없는 데다가 열강의 승인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우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한국을 일본의 명실상부한 ‘보호국’으로 만드는 이 조약이 체결되면 한국에 주재해 있던 각국의 공사관은 즉시 철수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또한 보호조약이 체결되어야만 자신들의 목적을 순조롭게 관철할 수 있으므로440)≪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1<日韓協約締結竝統監府設置ノ件>, 문서번호 250, 韓國保護權確立ノ件 및 문서번호 259, 韓國保護權實行ニ關スル件, 519∼520· 526∼527쪽 참조. 일본은 보호국화 결정과 함께 이의 국제적 승인획득을 위한 공작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이 결정과 함께 일제는 같은 날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을 위한 교섭개시를 결정하였다. 이 중 특히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今回 전쟁의 결과로서 한국의 지위는 일변하였으므로 본 협약도 또한 이에 응하여 변경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보호권의 확립을 기할 것이므로 이를 실행하여도 협약과 저촉을 가져오지 않게 수정을 가하고 또한 그 실행에 대하여 영국정부의 찬조를 얻도록 미리 상당의 조치를 하여둘 것을 요함”이라고 하여 영일동맹 개정시 한국 보호국화의 방향 및 내용을 정하였다.441)≪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第二回英日同盟協約締結ノ件>, 문서번호 10 日英同盟協約繼續ニ付英國ト意見交換開始ニ關シ閣議決定ノ件, 7∼8쪽 참조. 이 결정 후 일본은 이러한 준비공작을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각국을 상대로 추진하였고 될 수 있는 한 그와 같은 조약의 체결이 각국의 이익에 직접 영향을 주는 범위를 제한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러·일 강화회담을 전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05년 7월에<태프트-가츠라 비밀각서>(The Taft Katsura Agreement)교환에 의해 미국의 승인을 얻은 데 이어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로 영국으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9월의 러·일 강화조약 체결의 결과로 러시아의 인정까지 받음으로써 한국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의 침략의도는 모든 주요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 내지 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러·일의 강화는 일본측에서 먼저 요청하였다. 일본은 1905년 5월에 동해 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켜 전승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만 내면에서 보면 일본의 군사력으로서는 전쟁을 장기화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戰域을 만주 이북으로 확대하여 러시아 영토를 일부라도 공격할 엄두는 감히 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일본 스스로의 판단에, 러시아도 신흥 일본에게 쉽게 항복할 것 같지 않았으나 개전 이래 패전이 거듭되고 單線장거리의 시베리아철도에 의한 戰線 보급은 전세 만회의 기회를 얻지 못해 곤경에 빠진 것 같았다. 또한 사회주의혁명의 확산 등 제반사정은 러시아로서도 내심 전쟁의 종결을 원하고 있었다.442)≪伊藤博文傳≫下(東京 : 春敏公追頌會, 1941), 제7장 日露講和談判と公の斡旋 참조.

 기회를 포착한 일본은 1905년 5월 31일 주미일본공사 다카야마 코고로(高山小五郞)에게 훈령하여 러일전쟁 발발 전부터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지지해 오던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러·일 강화의 중재를 요청하도록 하였다.443)≪日本外交文書≫37-38 별책,<日露戰爭>2, 제6장 講和關係 참조.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대하고 다방면에서 일본을 원조하고 있던 루즈벨트는 일본의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곧 주미러시아공사를 불러 대일강화를 권고하는 등 중재에 나섰다. 러시아의 수락을 받아낸 루즈벨트는 1905년 6월 9일, 일본과 러시아에 대하여 정식으로 중재 알선을 통고하는 동시에 강화회의의 장소를 미국 군항 포츠머스로 정하였다. 이곳에서 일본측 전권위원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와 주미일본공사 다카야마가 러시아측 대표 윗테(Witte) 및 로젠(Rosen) 남작과 8월 9일부터 루즈벨트의 조정 하에 강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는 이미 ‘조정자’ 루즈벨트가 양해·승낙한<태프트-가츠라각서>의 방향과 이 회담 개최를 전후하여 체결된 제2차 영일동맹의 내용에 따른 일본의 한국지배를 러시아가 완전히 승인한다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이<태프트-가츠라각서>는 강화회담의 개최 전인 7월 27일에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수상 가츠라간에 이루어진 비밀협상으로서 7월 31일에 루즈벨트가 추인한 것이다.444)≪日本外交文書≫38-1, 事項 6<桂‘タフト’了解ニ關スル件>, 448∼451쪽. 각서는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확인할 것, 둘째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영·일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보할 것,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이를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445)尹炳奭, 앞의 글(1991), 41쪽. 이로써 일본은 미국으로부터도 실질적으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위한 조약체결이나 나아가 그 이상의 주권침탈 행동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을 위한 교섭에 착수하였으나 쌍방간에 이견조정 작업이 늦어져 3, 4차례나 각자의 수정안을 낸 끝에 1905년 8월 12일에야 결말을 보았다. 당초 일본이 한국문제에 대해 영국에 제안한 내용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정치상·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마땅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득함을 승인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에 대해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정치상·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를 충분히 인정함, 단 이 조치는 항상 열국의 상공업에 대한 기회균등의 주의와 저촉하지 않음을 요함”이라는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수정안의 뒷부분이 장차 한국 병탄시에 장애가 될 것으로 우려하여 쌍방간의 절충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영국과 일본은 다음과 같이 합의함으로써 1905년 8월 12일 조약에 조인하였다.446)≪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第二回日英同盟協約締結ノ件>, 1∼66쪽.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기 때문에 영국은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guidance)·감리(control) 및 보호(protection)의 조치를 한국에서 행할 권리를 승인하되 이 조치는 항상 열국의 상공업에 대한 기회균등주의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포츠머스에서의 한국문제에 대한 강화조건은 일본의 영·미에 대한 사전 포석으로 사할린 분할이나 배상금 문제 등과 같이 논란을 거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요구가 지나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전승국임을 주장하고 한국문제에 대해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사상·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졌음을 승인하고 일본이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감리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 이를 저해하고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음을 약속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장차의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고자 획책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측의 요구를 원칙적으로 승인하면서도 별도의 조항을 마련해 ‘일본이 한국에서 취할 조치는 한국황제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뜻을 명백히 하고자 했다. 러시아가 이같은 조항을 삽입하고자 했던 이유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조치를 방해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일본측 요구와 같이 한국의 주권이 소멸하게 되는 조항에 러시아가 먼저 독단적으로 記名한다는 것은 국제관계상 할 일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한국의 운명에 이해관계를 갖는 列國이 이에 항의를 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설명에 대해 일본은 단호히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의 주권문제는 조약 본문에 기입하지 않고 ‘일본 전권위원은 일본이 장래 한국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에 한국정부와 합의한 후 이를 집행할 것을 자에 성명한다’는 일본측의 결의를 회의록에 기록하여 일본측 공식성명의 형식을 취하게 하는 선으로 마무리지었다.447)≪日本外交文書≫37·38 별책,<日露戰爭>2, 事項 6<講和關係>, 문서번호 294, 全權委員ニ對スル政府謝意表明ノ件, 附記 1·2·3, 315∼53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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