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1) 식민지화의 기반조성
  • (2) 경제의 장악과 이식민 촉진을 위한 기반 조성

(2) 경제의 장악과 이식민 촉진을 위한 기반 조성

 개항 이후 한국은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 불가결의 요소였고, 그만큼 일제의 한국시장에 대한 욕구도 강했다. 1900년대에 들어서 한국시장 개방과 제도정비를 촉구하는 요구들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던 바, 러일전쟁 도발 이후 이같은 요구들은 더욱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근대 식민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착취식민지였다고 하는데, 한국도 기본적으로 일본의 착취식민지였으며,587)Jurgen Osterhammel, Colonialism;A Theoretical Overview Markus Wiener Publishers(Princeton), 10∼12쪽 참조. 그는 근대의 식민지를 ①착취식민지, ②해양기지, ③이주식민지로 나누고 있다. ①의 착취식민지의 목적은 경제적 착취, 제국주의 정책의 전략적 확보, 그리고 국가적 체면의 고양이었다. ②는 말라카·홍콩·싱가포르와 같은 해군기지로서 배후지로의 경제적 침투의 기지 또는 해군 전개를 위한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③은 미국(뉴잉글랜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같은 곳이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착취식민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는 대만을 ①의 착취식민지의 하나로서 들고 있으면서도 한국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국이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서의 성격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따라서 경제적 이익의 추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904년 5월 31일 결정된<강령>뒤 한일간에 가장 먼저 체결된 주요 협약이 바로<한일 외국인고문 傭聘에 관한 협정서>이고 그 주된 내용이 바로 재정고문 용빙이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이 협약에 의해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재정고문으로 와서 한국 내정 전반을 간섭하고, 일제의 의도에 따라 한국의 제도를 바꾸어 나갔다.

 그가 한국에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이른바「화폐정리사업」이었다. 이는 백동화의 남발과 엽전 유통권의 온존 등 정비된 화폐금융제도의 부재가 일제의 경제적 침투를 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상품수출의 확대, 자본투자에 따른 이윤의 실현을 확고히 하고 가격 및 이윤 계산을 합리화하기 위해’ 화폐정리가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588)오두환,≪한국근대화폐사≫(한국연구원, 1991), 253∼254쪽 참조.

 그래서 在韓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대리공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으로 오기 전에 올린 의견서에서 재정정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개혁은 서서히, 질서있게 착수해야 하지만 재정문제만은 그 무질서가 ‘직접 우리 상업에 나쁜 결과를 끼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앞서 빨리 정리에 착수할 필요가 있으며, 그 중요한 것은 징세법 개량과 화폐제도 개혁이라고 건의한 바 있었다.589)金正明편,≪日韓外交資料集成≫5, 문서번호 181, 부속서 1, 林公使對韓私見槪要 참조.

 이와 함께 일제가 중시했던 것은 일본의 제일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고 제일은행권을 조선법화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공사 거래에 무제한 통용시키는 일이었다. 이같은 작업을 통해 한국은 일제의 화폐권에 편입되어 그들이 말하는 바 일본과 ‘화폐동맹’을 이루게 되고, 그 결과 일제의 자본침투는 보다 원활해지고, 그 결과 한국경제의 예속 및 富의 유출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한편 일본인들의 한국 이주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내지에 있어 토지소유권의 확보가 필요했는데, 이에 대해<강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재 조약상 居留地 외 1리(한국의 10리 : 필자) 이내가 아니면 토지를 임차 또는 소유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내지에 있어 田畓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 권리가 명확하지 않아 확실한 자본가는 불안한 생각을 품어 투자를 주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우리 농업가를 위해 한국 내지를 개방케 하는 수단으로서 다음의 2가지 방책을 취해야 할 것이다.

① 官有荒蕪地의 경우는 한 개인의 명의로서 경작 및 목축의 특허 또는 위탁을 받아 제국정부의 관리 아래 상당한 자격이 있는 우리 나라 人民으로 하여금 경영케 하는 것.

② 민유지의 경우는 거류지에서 10리 밖이라 해도 경작 또는 목축 등을 목적으로 매매 또는 임차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한국정부로 하여금 내지에 있어 일본인의 토지소유권을 인정케 하든가 永代借地權 또는 用地權을 인정케 하여 경작·목축 등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227쪽).

 일제는 이같은 계획에 따라 먼저 위의 인용문 ①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와 교섭에 나선 것이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를 계약자로 한 이른바<韓國荒蕪地開拓案>이었다. 이것은 처음 나가모리의 개인적 이권획득 운동으로 출발하였다가 실패하자 일본정부의 정식 정책으로 수행된 것이었다. 어쨌든 이 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4월초부터였으며, 하야시 주한공사가 한국정부와 공개적으로 교섭을 개시한 것이 6월초였다고 하므로590)君島和彦,<日露戰爭下朝鮮における土地略奪計劃とその反對鬪爭>(旗田巍先生古稀記念會編,≪朝鮮歷史論集≫下, 龍溪書舍, 1979) 참조. 일제가 이 문제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나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같은 일제의 시도는 宋秀萬·이기·許蔿 등이 앞장선 반대운동으로 좌절되기에 이르렀다.591)君島和彦, 위의 글.
尹炳奭,<日本人의 荒蕪地 開拓權 要求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

 한편 인용문 중 ②의 내지에서의 토지소유권 확보의 문제를 보면, 이토가 통감으로 한국에 부임해 온 이후 일인들의 조계 10리 밖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합법화함은 물론,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진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不動産法調査會를 설치하고(1906. 7. 24.) 이의 입법에 착수하였다.592)이 부동산법 조사회는 일제의 말에 따르면, “부동산에 관한 舊慣을 조사하여 간편한 부동산법을 급속히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統監官房,≪韓國施政年報≫1, 1908, 100쪽 참조). 그 실무를 맡은 것은 우메 겐지로(梅謙次郞)로서, 그는 일본에서 근대법령을 만들 때 이토를 도와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土地家屋證明規則(1906. 10. 26)인데, 그 주안점은 내지에서 일본인의 토지매매를 합법화하고,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일본인 지주 및 자본의 내지 침투를 위한 문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593)정연태,≪일제의 한국 농지정책≫(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1장 2절 부동산증명제도의 시행과 토지침탈의 합법화 참조.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부동산등기법안을 준비하고 있었던 大韓自强會나 대한제국정부의 의지를 억누르면서 제정된 이 법령은 실제로 일본인들의 토지침탈을 합법화하고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으며, 특히 토지소유권을 증거할 증빙자료가 없는 불안정한 소유의 토지를 거래할 때 주로 이용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토지침탈은 가속화되었다.594)정연태,<大韓帝國 後期 不動産 登記制度의 近代化를 둘러싼 葛藤과 그 歸結>(≪법사학연구≫16, 1995) 참조.

 한편 일제는 國有未墾地利用法(1907. 7. 4)·森林法(1908. 1. 21)을 발포하여, 법령 발포 후 3년 이내에 증빙서류와 지적도를 첨부해 신고해서 官認을 받은 것만 民有로 인정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 결과 광대한 無主閑曠地·無主公山이 국유지·국유림에 포함되었다. 이같은 토지에 대한 일반인의 전통적인 入會權은 부정되고, 소규모 開墾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를 개간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국유미간지 대여에서는 일본인들과 친일적인 한국인만 혜택을 받게 되었고, 산림의 경우에도 部分林제도를 통해 최초로 혜택을 받은 사람은 부산의 무역상 하자마(迫間房太郞)였다고 한다.595)강영심,≪일제의 한국 삼림수탈과 한국인의 저항≫(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8), 41쪽 참조. 이후에도 일본인들에게 특혜가 주어져 한일인 간에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이 단계에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이식민을 장려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하는 법적 장치를 서둘러 만들었고, 보다 기본적인 토지조사사업은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는 그만큼 충분한 사전조사와 더불어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농업 다음으로 중요시하였던 것은 어업이었다.<강령>의 6항 ‘척식의 도모’란 항에서 일제는 ‘어업은 농업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리한 사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8도 중 5도에서만 어업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충청·황해·평안 3도에는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차제에 이들 3도에도 어업권을 확대해야 할 것이 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어업권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바로<강령>이 결정되자마자 등장한 1904년 6월 4일의<충청·황해·평안도에 있어서의 어업에 관한 왕복문>이었다. 이같이 일본인들의 어업권을 확대해 주기 위한 정책은<어업에 관한 협정>(1908. 10) 및<어업법>(1908. 11)으로 정리되었다.

 이같은 일제의 일방적인 이권의 추구는 자신들의 눈에도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당시 한국 주차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조차 1905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이권문제에 대한 우리 관민의 目今의 태도 및 일삼는 바는 너무 우리 이익에 치우치는 감이 있다. 장래 한국을 완전히 우리의 영토로 병합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동감이다. 만약 대 아이누적으로 韓民을 처치한다는 대결심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一視同仁의 誠으로서 이들에 임해 어느 정도까지는 한인으로 하여금 그 이익을 향유케 하도록 지도·誘掖하는 것이 대한정책의 좋은 방도가 아닐까(谷壽夫,≪機密日露戰史≫, 594쪽).

 즉 일본이 北海道를 개척할 때 아이누族을 절멸시켰던 것처럼 한국에서 한국인들을 구축할 생각이라면 모를까, 일본인들의 이권추구가 너무나 일방적이라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던 사람조차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596)일제가 서둘러 빼앗아 간 이권으로서는 이밖에도 통신관리권(1905. 4. 1), 한국 연해 및 내하 항행권(1905. 5. 13)이 있었다. 한국 대신들은 이에 회의불참·인계거부·총사퇴 등으로 버텼지만 일제는 헌병 등을 앞세워 강탈하였다. 이같은 이권들은 앞에서 말한 일제의 의도의 어느 부분과도 연관을 갖는 것이겠지만, 화폐정리사업과 함께 특히 상업적 利害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 일제의 이권쟁탈의 성격에 대해서는 권태억,<1904∼1910년 일제의 한국 침략 구상과 ‘시정개선’>(≪한국사론≫31, 서울대, 1994), 251∼25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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