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2) 통감부시기 재정제도의 개편
  • (1) 일제의 재정제도 이식과 재정기구 장악

가. 재정고문 파견과 화폐·국고제도 개편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바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한국을 사실상 강점하였던 일본은 전쟁에서 승세를 타자 1904년 5월<對韓方針>과<對韓施設綱領>등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628)≪日本外交文書≫37-1, 1904년 5월 31일, 對韓方針竝ニ對韓施設綱領決定ノ件, 351∼356쪽. 일본은 ‘대한방침’에서 한국을 보호국화함은 물론 장차 식민지화하겠다는 전제 아래, 당면의 급무로서 정치·군사적으로는 ‘보호의 실권’을 얻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이권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대한시설강령>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서 ① 방비를 완전히 할 것, ② 외정을 감독할 것, ③ 재정을 감독할 것, ④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 ⑤ 통신기관을 장악할 것, ⑥ 拓殖을 도모할 것 등 6개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 때문에 다음과 같이 대단히 상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한국행정은 하나같이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급격히 개혁을 행하면 상하 일반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을 보아서 서서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재정은 하루라도 등한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재정은 이미 매우 문란하여 내외 인민 모두 그 폐해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정이라는 것은 모든 행정의 기초이기 때문에 이의 정리를 통해서 행정 각부의 폐해를 고치는 것은 시정개선의 성과를 거두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이다. 따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우리 나라(일본) 사람 중에서 적당한 고문관을 뽑아 이를 담당케 함으로써 적어도 지금보다 더 재정이 문란해지는 것을 막고 나아가서는 징세법의 개량, 화폐제도의 개혁 등에 착수하여 마침내 한국 재무의 실권을 우리 손아귀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한국재정 문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군대를 위해 과다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주요한 원인이다. 작년도의 예산을 보면 경상세출 총계 969만 7천원 중에 412만 3천원이 군대의 비용에 속하며 그 병사의 수는 1만 6천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장래 한국의 방비는 우리 나라가 담당할 것이므로 친위대를 제외한 한국 군대는 점차로 그 수를 줄여야 할 것이다.

한국을 위해 새로이 財源을 얻어서 우리 이권을 확장할 목적으로 제국정부 관리 아래에 한국에서 식염·연초 등의 전매를 시작한다. 그 방법으로 직접 한국정부로 하여금 그를 실행하게 할 것인가 또는 한 개인의 명의로 特約을 맺어 그를 실행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강구해야 할 것이다. 재정에 관한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한국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던 林權助와 한국을 방문하였던 伊藤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629)≪日本外交文書≫37-1, 1904년 4월 1일, 伊藤特派大使ヘ呈セシ覺書貳通及同大使謁見始末書送附ノ件 附屬書1 對韓私見槪要, 282∼286쪽. 한국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재정부문에 일본인 고문을 고용케 하여 징세제도와 화폐제도 등 재정 전반에 걸친 업무를 장악하며, 재정 지출 억제의 방편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소금·담배 등의 전매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추진되었던 것이 재정과 외교 분야의 고문관 고빙이었다. 그 결과 1904년 8월 ‘한일협약’이 성립되어, 한국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고용하고 이들에게 재정과 외교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담당시키도록 하였다.630)≪日本外交文書≫37-1, 1904년 8월 23일, 重要外交案件ニ關シ日本政府ト協議ヲ約スル日韓覺書調印ノ件 (附記)日韓協約, 367쪽. 당시 일본에게는 한국의 재정과 외교를 장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대한 서구열강의 간섭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이들 국가와 접촉하는 것을 막아야 했고 따라서 외교를 장악해야 했던 것이다. 또 재정은 세입·세출을 관장하는 모든 행정의 기초였기 때문에 재정을 장악한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행정 전반을 장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1904년 10월에 체결된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의 傭聘계약은 메가타가 재정에 관한 모든 사항을 관장하며 그의 동의없이는 어떤 재정사무도 취급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631)≪男爵目賀田種太郞≫, 346∼347쪽.
≪日本外交文書≫37-1, 1904년 10월 16일, 目賀田韓國財政顧問傭聘契約電報ノ件, 373∼374쪽.
재정고문의 역할을 재정에 관한 자문과 협조로 상정하고 있었던 한국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계약문에는 재정고문이 한국재정 전반을 감독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즉 재정고문으로 고용된 일본인 메가타는 한국정부의 재정사무에 협조하는 고문으로서가 아니라 사실상 재정 전반을 관리하는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제2조에 있는 ‘의정부 및 각부의 사무로서 재정에 관계있는 사항은 모두 재정고문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규정은 메가타가 거의 모든 행정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재정고문의 업무를 시작한 메가타는 먼저 한국의 재정상황을 세밀히 조사하였다. 그것을 기초로 ‘재정정리’의 방침을 확정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던 메가타는 1905년 3월에 다시 외무대신으로부터<재정통일에 관한 10개항의 각서>를 받았다.632)≪男爵目賀田種太郞≫, 347∼350쪽. 이 10개항의 각서는<대한시설강령>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한국재정의 장악뿐만 아니라 행정 전반을 간섭하기 위한 세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독립되어 있었던 황실재정을 탁지부 산하로 흡수시켜 재정고문이 장악하고, 외교 공관도 세출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모두 철수하게 하며, 경찰사무를 정비하여 치안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제의 계획들은 이후 거의 대부분 실현되었다. 이처럼 메가타는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지시를 받아 한국재정을 식민지 재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대한식민지화 정책의 집행자로서 역할이 주어졌던 것이다.

 재정고문 메가타의 이와 같은 역할은 그가 재정고문 본연의 임무인 재정업무만이 아니라 재정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한국정부의 행정 전반을 간섭하려 한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메가타는 우선 1905년도 예산을 편성하면서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자,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경비삭감을 구실로 군대감축, 재외공관 철폐, 통신사무의 일본 위임 등을 한국정부에 강요하였다.633)≪日韓外交資料集成≫5, 1904년 12년 28일, 韓國來年度豫算ニ關スル目賀田顧問ノ意見報告ノ件, 340∼341쪽. 또한 한국정부가 1905년 7월 지방제도를 개정하면서 각 관찰부의 摠巡 2인을 1인으로 줄이는 대신 警務官 1인씩을 두기로 하자,634)≪勅令≫下, 1905년 7월 11일, 勅令 제38호 地方制度改正(서울대 도서관, 1991), 70쪽. 메가타는 이것은 봉급지불이 달라지는 문제로서 직접 재정과 관련있는 사항이라고 주장하면서 재정고문인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봉급을 지불할 수 없다고 위협하여 결국 무산되도록 했다.635)≪男爵目賀田種太郞≫, 396∼398쪽.
≪韓國財政整理報告≫제1회, 2-58∼61.
이때 메가타가 내세운 근거는 앞의 ‘용빙계약’ 제2조로서, 한국정부의 처사는 여기에 규정된 재정고문의 권한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메가타의 주장대로라면 정부의 업무 가운데 재정과 관련없는 사항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한국정부의 업무는 모두 메가타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정고문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하면서 한국의 재정상황을 조사한 메가타는 화폐의 문란, 宮中과 府中의 혼동, 세출의 남발 및 세입 기관의 不整頓 등을 ‘재정제도상 不備의 주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636)≪韓國財政整理報告≫제1회, 1-1. 메가타의 입장에서 재정 전반을 정비하고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황실재정의 정리와 징세기구의 설치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지만 이런 일들은 재정고문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므로 일단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우선 국고·회계제도를 정비하고 화폐제도를 일본과 통일시키는 데 두어졌다. 메가타가 가장 먼저 정비를 추진한 화폐제도와 국고·회계제도는 재정과 경제에서 가장 기초적인 분야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므로 그 정비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메가타의 본래 의도는 이 분야를 장악함으로써 한국재정과 경제 전체를 장악하는 토대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 상인·기업가에게 이익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화폐제도의 정비는 한국의 화폐제도를 일본의 화폐제도와 통일시키는 한편 第一銀行券을 法貨로서 통용시키는 방식으로, 그리고 국고·회계제도의 정비는 일본 제일은행이 한국의 國庫銀行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04년 12월<金庫出納役設置件>이 제정되어 금고(國庫)를 설치하고 금고출납역으로 하여금 국고금의 출납을 관리하도록 하는 길이 열렸다.637)≪한말근대법령자료집≫Ⅲ, 1904년 12월 30일, 度支部令 제2호 金庫出納役設置件, 707∼708쪽. 이어 탁지부와 일본 제일은행 사이에<국고금 취급에 관한 계약서>가 체결됨으로써 제일은행이 금고출납 업무를 담당하면서 한국정부의 수입·지출을 관장하게 되었다.638)≪韓國財政整理報告≫제1회, 2-9∼13.
澁澤榮一,≪韓國ニ於ケル第一銀行≫(1908), 321∼322쪽.
이처럼 일본의 일개 사립은행에 불과한 제일은행이 한국의 국고금 출납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취급하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형식상 탁지부 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국고업무를 취급하게 되어 있었으나, 사실은 재정고문 메가타와 일본 外務省·大藏省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제일은행을 통해 한국의 국고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639)≪韓國ニ於ケル第一銀行≫, 勅令(일본) 제73호 제1조, 341쪽.

 메가타는 국고은행인 제일은행을 통한 세입·세출의 감시뿐만 아니라 재무기관에 대한 감시·감독에도 철저하였다. 재무기관을 직접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감독을 맡을 일본인 관리와 감독기관의 확대가 요구되었다. 1905년 1월 이미 재정고문 소속 직원을 둘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던 메가타는 계속해서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는 한편 마침내는 지방에까지 일본인 직원을 파견하였다.640)≪한말근대법령자료집≫Ⅳ, 1905년 1월 18일, 奏本 탁지부 재정고문 소속 직원을 설치하고 그 員數 및 月俸相當額을 인정하는 건, 4∼5쪽. 같은 해 9월 평양·대구·전주에 재정고문부속 재무관을 파견하여 ‘정부재정고문지부’로 하고 재정고문 메가타의 집무소를 ‘정부재정고문본부’라 함으로써 재무기관에 대한 감독작업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641)≪度支部來去案≫(奎17792) 제8책, 1905년 9월 8일, 財政顧問 目賀田種太郞의 外部大臣에 대한 申牒. 지방에 파견된 재무관은 모두 일본인으로서 주재지 각도의 재정사무 일체를 담당하였고, 재무관이 파견되지 않은 각도의 재정사무는 역시 일본인으로서 이미 파견된 경무고문 보좌관 또는 보좌관보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다.642)≪韓國財政整理報告≫제1회, 6-24. 메가타는 이처럼 제일은행을 통한 국고장악과 일본인 관리를 앞세운 감시·감독으로 한국의 세입과 세출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한편 白銅貨의 남발에 따른 화폐유통의 혼란과 물가상승은 당시 한국경제의 커다란 문제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는 일본이 의도하는 대한식민지화 정책이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진출한 일본상인·기업가의 활동도 어렵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일본과 같은 화폐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메가타가 초기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도 자연히 한국에 일본과 같은 화폐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메가타는 ‘화폐정리’의 방법에 대해 검토한 끝에 한국의 유통 및 교통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일본이므로 한국의 화폐본위는 일본과 동일하게 하며, 한국의 화폐제도에 가장 큰 이해를 가진 것도 역시 일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서, 또는 일본정부의 보증으로 (화폐정리에 필요한)자금을 차입한다는 기본방침을 수립하였다.643)≪韓國貨幣整理報告書≫, 22∼23쪽. 또한 화폐정리의 방법으로 ① 한국화폐의 기초 및 발행화폐를 완전히 일본과 동일하게 할 것, ② 한국 화폐제도와 동일한 일본화폐의 유통을 인정할 것, ③ 본위화폐와 태환권은 일본과 같은 것으로 하거나 일본태환권을 준비금으로 하여 일본정부의 감독 및 보증에 의한 은행권으로 할 것, ④ 보조화폐는 모두 한국정부에서 발행할 것 등을 정했다. 이같은 메가타의 계획을 바탕으로 ‘화폐정리사업’ 즉 한국에 일본의 화폐제도를 그대로 도입하고 일본 제일은행권을 法貨로 공인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舊貨의 정리는 그동안 한국에서 통용되던 은화·적동화·백동화·엽전 등 모든 화폐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역시 중점이 두어졌던 것은 백동화였다. 백동화는 주조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화폐가치가 불안정하여 경제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동화의 교환은 제일은행에서 담당하고 백동화를 品位와 量目 등에 따라 갑·을·병종으로 구분하여 갑종은 법정 교환율인 2전 5리로 교환해 주며, 을종은 1전으로 교환해 주거나 교환을 원치 않을 경우 화폐로 사용할 수 없도록 절단하여 돌려주고, 병종은 아예 교환해 주지 않기로 하였다.644)≪한말근대법령자료집≫Ⅳ, 1905년 6월 24일, 度支部令 제1호 舊白銅貨 교환에 관한 건, 260∼261쪽
≪한말근대법령자료집≫Ⅳ, 1905년 6월 24일, 度支部令 제2호 舊白銅貨 교환처리순서, 261∼264쪽.

 이러한 조치는 화폐교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우선 법정교환율 자체부터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은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바꾸면서 은화 1円을 금화 1엔으로 교환해 주었으므로, 은본위제도를 기초로 한 백동화를 금본위제도하의 신화폐로 교환할 때에도 당연히 그 법정 가치인 5전으로 교환해 주어야만 했다.645)김재순,<로일전쟁 직후 일제의 화폐금융정책과 조선 상인층의 대응>(≪한국사연구≫69, 1990), 146∼150쪽. 또 을종·병종 백동화를 부정화폐라 하여 반액의 가치로 평가하거나 전혀 가치없는 것으로 평가하는 방식도 부당한 것이었다.646)화폐정리를 담당한 제일은행조차 ‘백동화를 正貨와 不正貨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문제’이며 또한 ‘인민의 권리상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문제’라고 하여 백동화 교환방식의 불합리성을 인식하고 있었다(≪大韓國貨幣整理經過報告≫, 6쪽). 불량 백동화는 典圜局의 백동화 남발에 따라 발생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정부에서도 통용을 인정하여 왔으므로 교환에 따른 손해는 당연히 정부에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백동화를 위조하여 유통시켰기 때문에 불량 백동화가 많아졌으므로 일본도 상당한 책임을 져야했다.647)≪貨幣制度≫(奎17259) 참조. 그런데도 이러한 실정을 무시하고 위와 같이 기만적 방법으로 백동화 정리를 강행한 것은 한국의 화폐재산을 약탈하는 한편 일본자본을 위한 본원적 축적의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1905년부터 1909년 사이에 이루어진 백동화 교환의 결과를 보면 ‘화폐정리’가 한국인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추진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화폐정리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백동화가 액면가치의 2분의 1, 또는 5분의 1로 평가절하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교환이 거부된다는 점에 놀라서 백동화를 헐값에 방매하여 상품을 사들이거나 토지·가옥에 투자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백동화를 처분하였으므로 교환 당시에는 오히려 한국인의 수중에 백동화가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648)≪男爵目賀田種太郞≫, 388쪽. 이처럼 ‘화폐정리사업’이 한국인의 화폐재산을 약탈하는 기만적 방법으로 강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화폐부족 현상마저 발생하였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 상인들이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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