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 2) 고종의 통치권 회복 시도

2) 고종의 통치권 회복 시도

 고종은 밀사외교 활동을 펴는 한편으로 대내적으로도 일제의 주권침탈에 대항하였다. 1906년 2월 일제 통감부가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이후에도 광무년간 강화된 황제권의 실현기구였던 궁내부를 중심으로711)광무년간 황제권 강화와 궁내부의 위상에 대해서는 徐榮姬,<1894∼1904년의 政治體制 變動과 宮內府>(≪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참조. 통치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통감부 설치 초기 기존의 顧問機構를 통한 시정감독 방식으로 의정부를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었을 뿐, 宮內府의 권력행사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했다. 황제측의 반발로 황실재산에 대한 실제적인 정리에도 착수하지 못했으며, 의정부 관리에 대한 고종의 영향력도 건재하여 ‘위로는 정부대신으로부터 군수 이하에 이르기까지 궁중에서 황제가 친재하는 상황’이라고 일본측은 반발하고 있었다.712)徐榮姬, 앞의 책, 278쪽.

 재정상으로도 의정부와 별도로 궁내부가 징세관을 파견하여 각종 잡세를 징수하고 궁내부 훈령으로 영업특허를 부여하는 등 광무년간 이래의 관행이 계속되었다. 1906년 7월 함흥 明太洞 금광채굴권의 부여와 啓字納稅證 발행, 9월 제주도 해초 매수독점권 부여 사건, 10월 충남 안면도 田土개간권과 연해 각 포구 養魚·捕魚·염업특허권 허락도 그러한 예였다.713)≪統監府來文≫ 의정부편, 11책(奎17849, 1906∼1910), 1906년 5월 29일·7월 11일·9월 1일·10월 23일. 궁내부는 여전히 의정부 각부의 행정에 간여하거나 의정부를 무시하고 직접 행정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 以外의 정부’, 혹은 ‘정부 以上의 정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714)≪韓國施政年報≫1(統監府, 1906∼1907), 63∼64쪽.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궁내부는 통감부·이사청과 협의없이 외국인과 계약을 체결하거나 광산채굴권 등을 부여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1906년 9월 궁내부가 인천소재 영국교회에 궁내부 소속 대지를 대여하면서 일본 理事官과 전혀 협의하지 않은 것, 11월 이태리 광업회사가 궁내부에 갑산광산 채굴권을 신청한 사건, 1907년 2월 프랑스인이 평안북도 구성·선천·초산·희천광산 채굴권을 신청한 사건, 6월 청국인이 궁내부 경리원으로부터 평안북도 의주 외 9군의 檀木벌채 수출권을 획득한 사건 등으로 궁내부는 통감부와 큰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715)≪統監府來文≫, 1906년 9월 30일·11월 6일;1907년 2월 25일·6월 3일. ‘보호조약’으로 일본 통감부가 한국의 모든 외교사무 및 외국인과의 계약을 담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도 여전히 궁내부에 각종 특허를 신청하고 있었다.

 또한 1906년 1월 外部 폐지 이후 남은 업무는 의정부 外事局이 담당하게 되었으나 중요한 대외관계 문서나 조약 원본들은 대부분 궁중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통감부에서는 모든 외교문서와 조약 원본을 외사국으로 옮겨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였으나716)≪統監府來文≫, 1906년 4월 21일·5월 5일. 궁내부에서는 모두 궁중 화재시에 분실했다고 하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종은 조카인 趙南昇을 통해 중요 외교문서들을 프랑스인 주교 뮈텔(Mutel)의 성당에 맡겨 보관하고 있었다.<朝日修好條規>등 각국과의 통상조약 문서, 해외파견 외교관에 대한 임명장, 경인철도 부설 계약문서 등 공식적인 외교문서 외에도 고종이 이태리 황제에게 ‘局外中立’을 성명한 親書, 한일의정서 이후 러시아·프랑스·독일 황제 등에게 국권회복을 청원한 친서, 러일전쟁중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와 密勅 등 총 87건의 문서를 몰래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다717)1910년 6월 고종의 매부인 趙鼎九의 장남 조남승은 고종의 밀명으로 미국인 헐버트에게 고종이 상해의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비자금을 인출해 달라는 신임장을 전달한 혐의로 일본 경시청의 취조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는 조남승이 감추고 있던 대외관계 비밀문서들을 찾아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20, No. 93∼95, 188∼192쪽).

 한편 고종은 일제에 의해 성립된 친일내각을 불신임하는 방법으로 정국의 불안을 조성하면서 끊임없이 주권회복을 시도하였다. 당시 박제순참정이 이끄는 친일내각은 ‘보호조약’ 반대 운동자들의 시위 등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박제순은 조약체결 당시 책임이 큰 외부대신이었다는 점에서 각계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오직 일본 주차군과 헌병대의 무력으로 겨우 현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이끄는 일본 주차군과 헌병대는 친일내각 반대상소를 올린 지방유생들을 무차별 체포하고,718)≪駐韓日本公使館記錄≫23, No. 658, 1905년 12월 11일, 534쪽. 의병의 배후 혹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閔炯植·閔丙漢·閔京植·李鳳來 등 대관들을 무시로 체포하는 등 살벌한 계엄상태를 연출하고 있었다.719)≪駐韓日本公使館記錄≫26, No. 164·162, 1906년 6월 18일.

 1906년 3월 2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임한 이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토는 만주문제와 러일전쟁 전후처리 등 일본의 국내사정 때문에 부임한지 얼마 안된 4월 21일 귀국하여 6월 23일에 복귀하는 등 자주 일본을 방문하였고,720)≪伊藤博文傳≫下(春畝公追頌會, 1940), 714쪽. 한번 귀국하면 몇 개월씩 체류하는 것이 예사였다. 이토 부재중에는 하세가와 주차군사령관이 통감을 대리하였으나, 고종은 통감 부재기간을 이용하여 친일내각을 붕괴시킬 공작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고종은 이토가 부재중인 5월 28일 황태자 결혼식 거행을 빌미로 독단으로 議政에 閔泳奎를 임명했다.721)≪詔勅≫(규장각 자료총서 근대법령편), 1906년 5월 28일, 463쪽. 그밖에 몇몇 친일대신들도 경질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보고를 일본에서 들은 이토는 고종에게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대신을 경질하지 않고 國政은 大小를 불문하고 통감에게 電問하겠다고 한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유감을 표명했다.722)≪駐韓日本公使館記錄≫26, No. 140·211, 1906년 5월 29일·30일. 귀임한 이토는 7월 2일 고종을 알현하고 자신의 부재중 각지에서 치성한 의병봉기와 내각동요에 대해 고종의 책임을 힐난하였다. 헌병대에 붙잡힌 金升旼이라는 儒生에게서 압수한 문서를 들이대면서 궁중이 의병에게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종이 자신을 ‘統監’이라 부르지 않고 단지 ‘侯爵’이라고 부르는 것은 통감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서인지 묻는 등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고종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궁중과 상해·블라디보스톡 등지간의 密使왕래와 비밀電文도 모두 파악하고 있다면서 철저한 宮禁肅淸을 요구하였다.723)≪伊藤博文傳≫下, 718쪽.

 이토의 강요에 못이겨 고종은 7월 3일 詔勅<궁궐을 肅淸하는 건>을 발표했다. 비록 實職이 있는 관리라도 公事가 아니면 함부로 궁궐에 출입할 수 없고, 실직이 없는 자는 大臣 역임자라도 황제의 召命없이는 궁궐을 출입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724)≪韓末近代法令資料集≫5(국회도서관, 1971), 1쪽. 이어서 7월 6일에는<宮禁令>이 발포되어 궁궐에 출입할 때는 누구나 門票를 소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지는 등725)≪韓末近代法令資料集≫5, 3∼4쪽. 일제는 고종과 측근참모들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토는 11월 21일 또 다시 귀국하여 1907년 3월 20일에야 귀임하였다. 이토가 없는 동안≪大韓每日申報≫에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가 게재되는 등 고종의 주권회복 시도는 계속되었다.726)≪伊藤博文傳≫下, 726∼744쪽. 박제순내각의 일부도 경질되었다. 11월 25일 통감대리 하세가와 주차군사령관을 방문한 박제순은 농상공부대신 權重顯을 군부대신에, 경기도관찰사 成岐運을 농상공부대신에, 궁내부특진관 沈相薰을 侍從武官長에 임명하겠다고 통보하였다. 하세가와는 통감 부재시 대신 경질은 불가하다고 반대하였지만,727)≪駐韓日本公使館記錄≫26, No. 311, 1906년 11월 26일, 397∼398쪽. 박제순은 통감이 부득이한 경우 2, 3대신의 경질은 일임한다고 했다면서 이번 인사는 황제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728)≪駐韓日本公使館記錄≫28, No. 12, 1906년 11월 27일, 31∼33쪽. 물론 박제순의 강변은 고종을 엄호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법부대신 이하영과 학부대신 이완용 등 친일대신들은 통감 부재중 황제가 언제라도 자신들을 숙청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729)≪駐韓日本公使館記錄≫27, No. 5, 1906년 12월 1일, 統監府 제1회 報告, 9∼10쪽. 실제로 고종은 한일의정서 체결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서훈까지 받은 친일파 이근택을 중추원의장에 취임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보호조약’에 반대하여 유형에 처해졌던 한규설을 임명하는 등730)≪詔勅≫, 光武 10년 11월 17일 및 12월 18일, 476·480쪽. 친일대신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나갔다.

 친일대신들의 현저한 동요에 불안을 느낀 하세가와는 고종을 알현하고, 이토통감이 일본에서 귀국하면 사태를 타개할 특단의 수단을 강구해올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또한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고종의 저항으로 권력이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시정개선’도 아무런 효력이 없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황제는 앞으로 政務에 간여하지 말고 宮中과 府中을 구별하여 정부사무는 모두 의정부에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나아가 궁중사무도 궁내부대신이 專管케 하고, 황제는 御命으로 법률·칙령을 발포하는 외에 기타 사소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이어서 열린 대신회의에서 하세가와는 이러한 사항을 詔勅으로 발표하자고 발의하고 12월 13일자로 이를 발표하였다.731)≪駐韓日本公使館記錄≫26, No. 315, 1906년 12월 23일, 400쪽. 궁중과 부중을 구별하여 관리들이 그 직무권한을 다하게 하고, 1895년<宗廟誓告>의 정신대로 참정이 의정부의 수반으로서 대신들을 통솔하며, 궁중숙청에 힘쓰겠다는 내용이었다.732)≪詔勅≫, 光武 10년 12월 13일, 479쪽. 일제가 갑오개혁 당시부터 집요하게 추구해온 황제권의 축소와 내각에의 권력 이양을 다시 한번 강조한 조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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