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신협약 체결 당시 미발표 각서 제3조에서 계획한 대로 일제는 7월 31일 밤 순종으로부터 군대해산의 조칙을 얻어냈다. 재정부족과 軍制 쇄신을 이유로 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루까지 해체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일부 시위대 병사들이 양위 반대파인 박영효 등과 함께 저항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광무년간 고종은 꾸준히 군비증강에 힘써 왔는데, 이러한 군비증강사업은 국방력 강화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황제의 친위세력을 보강하려는 의도로 추진된 것이었다. 1898년 6월 육해군 친총을 천명한 고종은 육군 증설과 해군 定制에 관한 조칙을 잇달아 내리고 친위 각대 편제를 개정하였으며, 1898년 7월에는 武官學敎를 창설하고 1899년 6월에는 元帥府를 설치하였다.769)조재곤,<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역사와현실≫19, 1996) 참조. 신무기·군함의 도입에도 막대한 비용을 썼을 뿐 아니라770)광무년간 군부예산은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에 전체 세출 예산의 25%를 차지하였고 1901년 이후에는 40%에 육박하였다(李潤相,≪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55쪽). 1903년 3월에는 징병제 실시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771)≪詔勅≫, 314∼315쪽.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군사적 공수동맹이라는 미명하에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합법화하였다. 한국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함과 동시에 고문협약으로 군부고문 野津鎭武를 파견하여 갖가지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군비를 축소하였다. 1904년 5월 일제가 파악하기로 실병력수 16,000여 명에서 1905년 4월과 1907년 4월 2단계에 걸쳐 대대적인 감축을 실시한 결과 해산 당시 한국군은 시위보병 2개 연대 약 3,600명, 기병·포병·공병·치중병 약 400인, 지방군대 8개 대대(수원·청주·대구·광주·원주·해주·안주·북청 8개소) 약 4,800인, 도합 8,800여 명에 불과하였다.772)徐仁漢,≪大韓帝國 軍事制度 硏究≫(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6), 216∼226쪽.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지휘 아래 치밀한 해산계획을 세운 일제는 8월 1일 이른 아침 중앙군인 시위대 해산부터 시작하였다. 훈련원 주위에 일본 군대를 배치하여 완벽한 전투준비를 갖춘 가운데 오전 7시 군부대신 李秉武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大觀亭에 시위대 각 대장들을 소집하고 해산 조칙을 전달하였다. 8시까지 각 대원들을 훈련원에 소집하면 10시에 해산식을 거행한다는 선고였다. 소집 부대 중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 제2연대 제1대대는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오지 않았다. 나머지 부대에서는 군인들의 군모와 견장을 회수하고, 下士에게 80원, 병사 중 1년 이상자에게 50원, 1년 미만자에게 25원의 은사금을 지급한 후 바로 귀향명령을 내렸다. 돌연한 해산명령에 군인들은 비분강개하였으나 이미 무장이 해제된 채 일본군대의 총검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일부 해산병들과 장교는 서로 껴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비탄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산식에 참가하지 않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무장한 상태로 병영을 이탈하여 서울시내 곳곳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朴性煥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모습을 보고 격분한 병사들은 병영내에 있던 일본인 교관에 대한 총격을 시작으로 인근의 제2연대 병사들과 합세하여 남대문 부근에서 일본군과 맹렬한 총격전을 벌이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773)黑龍會編,≪日韓合邦秘史≫上(1930 ; 原書房, 1966), 335∼337쪽. 이 날 훈련원 해산식에 참가한 인원은 제1연대 제2대대 575인, 제1연대 제3대대 488인, 제2연대 제3대대 405인, 기병대 88인, 포병대 106인, 공병대 150인 총계 1,812인에 불과하였다. 제2연대 제2대대는 궁궐호위를 위해 근위대로 개칭하여 존속시켰으므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도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일제에 의한 강제해산에 응하지 않고 저항에 나선 것으로 추산된다. 나머지 잔존부대인 旅團司令部·硏成學校·헌병대·치중대·홍릉수비대·군악대는 8월 28일 해산되었다.774)戶叶薰雄·楢崎觀一, ≪朝鮮最近史 附韓國倂合誌≫(1912), 155쪽.

 시위대 해산을 마친 일제는 각 지방 진위대에 대해서도 해산작업을 시작하였다. 8월 1일부로 각 지방 진위대 대대장이 배속된 일본군 교관과 함께 군부에 출두하여 해산지시를 받고, 각 대대 인근의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병사를 무장해제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8월 3일 개성·청주를 시작으로 9월 3일 북청 진위대까지 약 1개월에 걸친 해산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8월 6일 강원도 원주 진위대의 저항을 시작으로 강화도 분견대의 무장봉기, 충주·제천 등 각지 진위대의 저항이 이어졌다. 진압에 나선 일본군의 사상자도 68인에 이르렀으며 해산 진위대군을 포함 한국측 피해는 1,850명으로 집계되었다.775)위의 책, 165∼170쪽.

 이러한 지방 진위대의 저항은 8월 이후부터 전국적인 의병봉기의 열기로 연결되면서, 의병의 구성성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즉 서울에서 해산된 시위대 병사나 각 지방 진위대 해산 군인들이 경기도·강원도·충청도·호남 일대로 내려가면서 의병부대에 합류하여776)洪淳權,≪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61∼265쪽. 기존의 유생 의병장 중심의 의병 대오는 평민 주도 분위기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閔肯鎬·池弘允·延期羽 등이 대표적인 군인 출신 의병장이었으며, 해산군인들의 참여로 실제적인 전투력과 기동성을 갖춘 의병들은 1908년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09년 하반기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남한대토벌 작전으로 궤멸되기 시작한 의병대오는 점차 만주 등지로 이전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777)≪韓國施政年報≫2, 55∼58쪽.

 군대해산 이후 친위보병 1대대, 기병 1중대와 무관학교 업무만을 관장하며 명목만 유지해오던 軍部도 1909년 7월 30일 칙령 제68호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남은 병력은 신설된 궁중 親衛府에 부속되었으나, 친위부의 감독은 고문으로 배치된 일본장교들이 담당하였고, 병기·탄약 관리 및 처분은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이, 軍人·軍屬의 범죄에 대한 사법처분은 주차일본군 군법회의가 맡게 되었다. 또한 폐지된 무관학교의 생도들은 전원 일본에 유학시켜 사관양성을 위탁함으로써 병합 이전에 실질적인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해체되었다.778)≪韓國施政年報≫3, 27∼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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