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
  • 2) 3파연합과 합방청원운동

2) 3파연합과 합방청원운동

 이완용의 권력 독식에 대한 회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병의 공격으로 거의 궤멸 상태에 빠진 지방조직을 재건하는 등 난국 타개를 위해 송병준과 이용구·우치다 고문 등이 생각해낸 방법은 송병준의 사직이었다. 송병준이 사임함으로써 이완용내각을 불안에 빠뜨리고, 그 혼란의 책임을 물어 일진회에 등을 돌리고 합방문제에 소극적인 이토통감을 사직하게 한다는 발상이었다. 1908년 6월부터 시작된 송병준 사직 문제는 우치다 등 합방급진론자들이 일본 軍部 강경파의 지원을 받아 벌이고 있던 이토통감 퇴진운동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토에게 설득당한 송병준이 사직 대신 內部大臣으로의 전임을 택함으로써 무산되고 오히려 일진회 지도부 내에 갈등만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794)≪日韓合邦秘史≫下, 54∼69쪽. 이토통감은 1909년초 순종황제를 데리고 남북한 순행길에 오르는 등 통감정치의 안정을 과시하고자 노력했으나, 그간 실시한 보호정치의 실적이 미미하다는 일본내 여론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결국 6월 14일자로 부통감 소네(曾禰荒助)에게 후임을 넘겨주었다.795)≪伊藤博文傳≫下(春畝公追頌會, 1940), 800∼841쪽.

 이완용내각을 옹호하던 이토가 물러나자 1909년 9월부터 일진회는 다시 한번 이완용내각 타도를 시도하였다. 일진회·대한협회·서북학회 등 재야 3단체가 연합하여 이완용내각을 타도하고 나아가 새 정권 창출을 통해 숙원사업인 합방을 촉진한다는 계획이었다.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종래 반일적 성향을 유지해온 단체였지만 강한 권력지향적 성격으로 인해 일단 이완용내각 타도, 새 정권 참여라는 목표 앞에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와도 연합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서북학회의 崔錫夏·鄭雲復 등은 매우 적극적으로 일진회측 공작에 협조하였다. 그 결과 9월 23일 3파합동 간친회가 열리고 보다 확실한 盟約書 교환을 준비하는 등 자못 기세를 확장하였으나,796)≪日韓合邦秘史≫下, 104∼106쪽.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다른 만큼 언제든지 붕괴될 소지가 있는 불안정한 제휴이기도 하였다.

 결국 10월 26일 이토 암살사건을 계기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3파연합은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진회측이 합방을 더욱 서두르게 된 반면 대한협회 등은 연합의 궁극적 목표가 합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이완용내각도 합방의 공로를 일진회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방해 공작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일진회는 12월 3일 전격적으로 일진회와 대한협회의 政見協定委員會를 소집하고 합방 성명서 발표 가부에 대한 의견를 물었다. 이에 대한협회가 반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3파연합은 결렬되었고, 일진회는 이날밤 즉시 在京 회원 200여 명을 소집하여 총회를 열고 합방제의를 가결하였다. 일진회측은 대한협회와의 제휴가 결렬될 것에 대비하여 이미 각도 유생 30여 명과 보부상단체인 大韓商務組合·漢城普信社 등의 유력자 300여 명을 동원하고, 정운복·최석하 등을 통해 기독교계 중요 인물에 대한 설득도 병행하면서 12월 4일 아침 일찍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황제와 내각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하였다.797)위의 책, 215∼233쪽. 이 上皇帝書·上韓國首相書·上韓國統監書 등은 10월초 일본에 귀국했던 우치다가 이토를 만나 한국병합에 대한 동의를 얻고 고무되어 곧바로 山崎三郞·葛生修亮 등과 함께 기초한 문건으로서 나중에 能文家인 武田範之·崔永年 등이 다듬은 것이었다. 송병준·이용구는 우치다 등이 작성한 합방청원서에 대해 단지 완전한 합방으로 할 것인지, 日韓聯邦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이견을 보였을 뿐 청원서는 순전히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일진회는 다만 한국인 스스로 합방을 청원하였다는 명분을 쌓기 위해 이용당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798)위의 책, 152∼159·197·217쪽.

 그런데 합방청원서를 전달받은 이완용내각은 12월 7일 대신회의를 열고 이를 각하하는 한편 대한협회·한성부민회·國是연설단·흥사단 등을 사주하여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일진회는 재제출을 반복하였으나, 12월 9일 일본경찰은 시국 혼란을 이유로 일진회장 이용구와 국민대연설회장 閔泳韶를 함께 불러 모든 집회 연설 및 선언서류의 반포를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799)위의 책, 284∼287쪽.

 그러나 여기서 이완용과 대한협회 등이 진실로 합방에 반대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대한협회가 12월 4일 밤 결의한 합방반대 이유서에 의하면, “지금은 합방의 시기가 아니지만, 향후 한국이 開明 富强을 달성하여 일본의 보호국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자연히 모든 한국인들이 합방을 주장할 것인데, 그때 합방을 해도 늦지 않다”는 인식일 뿐, 절대적인 합방반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정부와 제휴하여 일진회에 반대하는 한편, 중추원관제를 개정하여 대한협회 회원들을 다수 議官에 임용하고, 각도에도 參事會를 개설하여 대한협회 회원들을 진출시킬 것을 계획하는 등800)≪日韓外交資料集成≫8 保護及び倂合錄編, 317∼318쪽. 여전히 정권참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즉 일진회와 연합하여 이완용내각을 타도하고 정권에 참여하려던 노선을 바꾸어, 다시 이완용내각과의 타협하에 정권참여를 실현해 보려는 전술적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일제는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자 대한협회나 일진회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정치적 성격을 띤 단체에 대해 가차없는 해산명령을 내림으로써 이들의 간절한 정권참여 희망을 무참히 꺾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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