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5.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 1) 일본정부의 한국병합 방침

1) 일본정부의 한국병합 방침

 한국에서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제출은 사실 일본정부 지도자간에 한국병합 방침이 최종 결정된 후 그 단행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보호국화 이후 병합은 어차피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지만, 원래 일본 지도자들간에는 병합의 시기를 두고 다소 이견이 있었다. 이토(伊藤博文)·이노우에(井上馨) 등 文官들과 야마가타(山縣有朋)·가츠라(桂太郞)·테라우치(寺內正毅) 등으로 대표되는 軍部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는 征韓論 이래 뿌리깊은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이라는 전통과도 같은 맥락으로801)黑龍會編,≪日韓合邦秘史≫下(1930 ; 原書房, 1966), 18쪽. 통감부시기 對韓政策의 기조뿐 아니라 그 궁극적 목표인 병합 실행의 문제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 등 문치파들도 물론 한국병합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보다는 그 실행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이토 등의 對韓政策은 문화정책·자치육성정책 등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802)森山茂德,≪近代韓日關係史硏究≫(현음사, 1994), 201∼240쪽 참조. 이토는 한국을 병합하기에는 아직 일본의 재정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법적으로 보호국 상태인 만큼 국제열강의 주시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한국병합에 대해서 신중론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803)≪日韓合邦秘史≫下, 109쪽. 실제로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막대한 전쟁비용에 대한 상환부담으로 재정적으로 매우 곤궁한 상태에 있었다.804)信夫淸三郞 편,≪日本外交史≫1(每日新聞社, 1974), 220쪽. 그러므로 일본은 당시 한국의 병합을 단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여력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의 경우에도 일본은 여전히 만주문제를 둘러싸고 미국·러시아와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이토 등의 신중론에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805)이토가 열강의 태도에 대해 시종 주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907년 11월 16일 일본 閣議에 올린 의견서에서도 명백이 읽혀진다(日本外務省編,≪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1965, 對外政策に關する伊藤韓國統監意見書, 282∼284쪽).

 반면 합방급진론의 입장에 선 군부와 재야의 對外硬 운동론자들은 이토 통감을 유약하다고 비판하며 끊임없이 비판여론을 조성하고 결국 이토의 사직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설득에 의해 이토도 1909년 6월 통감직 사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병합 단행에 동의하게 되었다. 즉 4월 10일 총리대신 가츠라,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 이토 3자간 회합에서 마침내 이토는 병합 단행에 이의가 없다는 견해를 표시하였다.806)小松綠,≪朝鮮倂合之裏面≫(中外新論社, 1920), 8쪽. 그 결과 이미 3월 30일 자로 가츠라총리가 閣議에 제출해 놓은<韓國倂合에 관한 件>이 7월 6일 결정되었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하고, 그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충분히 實權을 확보하는데 노력하자는 내용이었다.807)≪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315쪽. 일제의 한국병합 방침이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으로 閣議에서 결정되고, 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마련된<韓國施設大綱>에 의하면, 향후 준비할 항목으로 ① 한국 방어 및 질서유지를 담당할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가능한 다수의 헌병 및 경찰을 증파하여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것, ② 한국에 관한 외국과의 교섭사무를 파악할 것, ③ 한국 철도를 일본제국 철도원 관할로 이관하고 그 감독하에 남만주철도와 밀접한 연락을 가지게 해서 일본-대륙간 철도의 통일과 발전을 도모할 것, ④ 가능한 다수의 일본인을 한국내에 이식하여 일본 실력의 根底를 깊이 함과 동시에 일한간 경제관계를 밀접히 할 것, ⑤ 한국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에 재임하는 일본인 관리의 권한을 확장해서 한층 민활한 통일적 행정을 기할 것808)위의 책, 316쪽. 등이 거론되었다. 병합을 실행하는데 필수적인 치안 질서의 유지뿐 아니라 병합 이후 植民統治를 위한 준비, 나아가 일본-한반도-만주간 철도 연결까지 구상함으로써 한국병합을 교두보 삼아 대륙침략에 나설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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