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5.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 2) 병합조약의 체결

2) 병합조약의 체결

 내부적으로 병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일제는 1910년 2월 해외 일본 공관에도 한국병합 방침 및 施設大綱을 통보하고, 3월에는 만주문제에 대해 러시아와 제2차 협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4월 한국 병합을 승인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영국도 5월 병합을 승인하였다.809)森山茂德, 앞의 책, 268∼269쪽. 그간 병합단행을 지연시켜온 하나의 요인이었던 국제열강의 태도가 이렇게 해결되자 이제 병합은 행정적인 절차만을 남겨놓은 상태가 되었다.

 1910년 5월 30일 일제는 병합을 단행할 인물로 육군대신 테라우치를 한국 통감에 겸임 발령하고, 6월 3일에는 閣議에서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과 總督의 권한 등에 대해 확정하였다. 그 방침에 따르면 병합 후 당분간은 일본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하되 總督은 天皇에 직속하여 일체의 政務를 통할하고, 또한 대권의 위임에 의해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일본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分離主義’원칙에 입각하여 식민지 총독에게 특수한 독자적 위상을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합병 실행에 필요한 경비는 일단 일본정부의 예비비로 지출하되, 향후 총독부 회계는 특별회계로서 총독부의 政費는 한국에서의 세입으로 충당함을 원칙으로 하고, 다만 당분간은 일정한 금액을 일본정부가 보충해주기로 하였다. 병합에 따른 일본정부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통치행정 분야에서 정치기관은 최대한 간이하게 改廢하고, 통감부 및 한국정부에 재직하는 일본 관리 중 필요없는 자는 귀환 혹은 휴직시킴으로써 최소한의 기구와 인력으로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실시할 것을 계획하였다.810)≪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韓國に對する施政方針, 336쪽.

 마지막으로 병합조약 체결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6월 24일에는 경찰권 위탁에 대한 각서를 요구하였고, 6월 30일자로 한국경찰을 폐지하였다. 1907년 신협약 체결 이후 이미 한국의 치안경찰권은 일제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지만, 보다 강력한 경찰력 확보를 위해 한국주차군 헌병대 산하에 통합시키기로 한 것이다.811)≪日韓外交資料集成≫8, 302∼305쪽.

 이러한 모든 준비를 끝낸 신임 총독 테라우치는 7월 23일에야 한국에 착임하였다. 착임 후에는 일단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일체의 정치적 집회나 연설회를 금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가차없이 검속·투옥하는 등 숨도 함부로 쉬지 못할 만큼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8월 16일 드디어 한국정부의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을 위한 담판을 개시하였다.812)≪日韓合邦秘史≫下, 678∼682쪽. 테라우치가 병합조약안을 수교하자 이완용은 이에 대부분을 동의하면서도 국호를 朝鮮으로 개칭하는 문제와 황실 존칭문제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하였다. 現 황제를 병합 이후에 李太公이라 부르자는 일본측 제안에 이완용은 李王殿下라는 명칭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과 병합조약을 체결할 당사자로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고 황실 및 원로들의 반발을 완화시키려는 제스처에 불과하였다. 일본측도 원활한 교섭을 위해서 이완용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으므로 황실 칭호 부분만은 양보하였다. 그 결과 병합조약안은 별다른 수정없이 8월 18일자로 한국정부의 내각회의를 통과하였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순종황제가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함으로써 같은 날 이완용과 테라우치통감 사이에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었다.813)≪日韓外交資料集成≫8, 330∼333쪽.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이 양여를 수락하고 한국전부를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허락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태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后妃·後裔에게 각기 지위에 상당한 존칭·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고 또 이를 보유하는데 충분한 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前條 이외에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해 각기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勳功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는 榮爵을 주고 恩金을 공여한다.

 제6조 일본국정부는 병합의 결과로서 전연 한국시정을 담임해 同地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해 충분히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정부는 성실 충실히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얻어서 공포하는 날로부터 시행한다(≪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上, 340쪽).

 이상 8조로 이루어진 한일간 병합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 2천만 동포의 운명은 간단히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길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라 전체를 들어 남에게 맡긴 대신 얻은 것이라곤 극소수 황실가족들의 품위유지비와 몇몇 친일파 관리들에게 주어진 작위, 몇푼의 은사금이 전부였다. 나머지 무고한 일반 민중들은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은총에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맡긴 채, 그것도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본통치를 따르는 경우에 한해서 그들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식민지 백성의 처지로 전락하였다.

<徐榮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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