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2) 거문도사건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갑신정변 후의 ‘天津條約’(1885. 4. 18)으로 청·일간의 패권경쟁이 일정한 거리유지하의 물밑 경쟁으로 들어간데다가, ‘朝露修好條約’(1884. 7. 7)과 ‘朝露密約說’(1885. 2)에 자극받은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함으로써(1885∼1887), 바야흐로 조선사정은 청·일본·러시아·영국이라는 다극체제하의 국제분쟁지역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제기된 한반도 중립화론은 그야말로 百家爭鳴이었다.

독일외교관으로서 당시 조선에 건너와 활동하고 있던 외아문협판 묄렌도르프(P. G. Von Moellendorff)와 부영사 부들러는 거문도사건 이전부터 이미 조선의 중립화를 위한 그들 나름대로의 구상을 전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묄렌도르프文書≫0016)1930년에 라이프찌히에서 첫 출판된 이 문서는 흔히 ‘묄렌도르프自傳’으로 불려지지만 사실은 그가 조선에 재직하던 당시에 남긴 일기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대본으로 하여 그와 꼭 같은 체험을 나눈 아내 로잘리(Rosalie von Moellendorff)가 회상의 형식으로 쓴 傳記이다(묄렌도르프夫婦 지음, 申福龍·金雲卿 옮김,≪묄렌도르프文書≫, 평민사, 1987, 1쪽).에 의하면,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중립화해야 할 이유로서 청·일 양국의 정치세력이 너무나 강대하여 조선으로서는 사실상 독립할 능력이 없음을 들고 청·일 이외의 제3국인 러시아를 끌어들여 보호를 받도록하는 것이 良策이라고 한 다음,0017)위의 문서, 67∼68·85쪽. 러시아가 주도하는 조선중립화규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조선의 중립 및 불가침에 대하여 청과 일본이 공동으로 보장하고 청·일에 대한 상호보장관계의 유지, 둘째, 군사적 방위관계의 명시, 셋째, 조선영토불가침에 대한 일반적 관계의 보장 등이었다.0018)위의 문서, 85쪽.

이와 같은 묄렌도르프의 조선중립화 구상은 다른 문서에서도 “묄렌도르프가 조선이 러시아·청·일본의 공동보장하에 벨기에와 같은 중립국이 되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0019)Politisches Archiv des Auswärtigen Amts, Acta betreffend Korea(이하 Pol.Arch.A.A., Korea로 약칭) I, Bd.4 A 1559 pr.9.März 1885(Söul, den 14.Januar 1885), A3016, pr.21. April 1885(Peking, den 18. Februar 1885), Korea 2, Bd.2 A6926 pr.24. August 1885 p.m.(Söul,den 29,Juni 1885).

한편 부들러는 1885년 2월 7일 金允植 외아문독판에게 제출한<淸·日交戰에 조선이 中立傍觀하기를 勸告하는 意見書>0020)≪舊韓國外交文書≫15:德案 Ⅰ, № 95, 49∼50쪽.라는 글을 통하여, 약소국이 중립화하면 당사국의 안전보장은 물론 그 受惠가 실로 크다는 것을 말하고 역사상의 예로서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 당시의 스위스를 떠올리면서 조선도 지리적 여건이 이와 유사하므로 청·러시아·일본이 보장하는 영세중립을 제안하고 아울러 국가자위력의 확보와 열국과의 수호통상도 병행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독일인들이 제기한 한반도 중립화론의 공통된 성격은 수개 세력이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임으로써 조선의 안전이 우려되고 있을 때 안전보장 방법의 하나로서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제3국 출신이 중립화를 권고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안은 청·일 양국에 의한 조선의 주권침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하에 제3국을 끌어들이거나 국제조약에 의한 보장을 중시하면서 자위력의 구비도 고려하였다. 그러나 본국 정부가 조선에서 實益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공식 견해로 채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외면당하고 말았다.

조·러수교로 러시아의 조선 진출이 현저해질 뿐만 아니라 영국·러시아 간의 아프간 분규가 1885년 10월에 이르러 양국의 충돌 없이 수습됨에 따라 영국이 거문도를 계속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영국 정부에 철수 문제를 거론하여 담판하게 되었고,0021)渡邊勝美,<巨文島外交史>(≪普專學會論集≫1, 1935), 40∼41쪽.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영국측에서 그들의 거문도 철수조건으로 내 놓은 것이 한반도의 중립화였다.

영국 외상 로오즈베리(Archibald Philip Primrose Rosebery)는 1886년 4월 중순경에 거문도 철수조건으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관계 제국과 조선독립을 보증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는데,0022)渡邊修二郞,≪東邦關係≫, 325쪽. 이러한 제의는 영국 외무차관 커어즌(Ceorge Nathaniel Curzon)이 언급한바 “영국은 어느나라든지 조선국을 침략하거나 병탄한다면 벨기에를 정복하는 것과 동일시하여 결코 묵과할 수 없다”0023)≪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中, カルソン氏 抄譯<極東問題>, 176쪽.고 한 내용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국측의 논의들은, 조선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어느 특정국이 조선으로의 세력팽창을 시도할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제기한 경우이다. 이를테면,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저지라는 그들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반도 중립화를 거론한 것인데, 이 경우도 이해관계 당사국간의 세력균형에 중점이 있을 뿐이고 한반도 중립화 자체는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한반도 사정이 청·일본·러시아·영국 등의 4강에 포위당하는 듯한 형국을 보이게 되자 조선의 조야에서도 중립론이 조심스럽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외아문독판 김윤식은 1885년 5월 20일 주조선독일총영사 젬부쉬(Otto Zembsch)를 찾아가서 거문도사건에 대처하여 “조선은 강한 이웃 나라의 침해에 대해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약소국이므로 묄렌도르프가 오래 전부터 구상해온 바와 같이, 조선을 유럽에서의 벨기에와 같은 지위를 만들고자 한다”는 뜻을 말하더니,0024)Pol.Arch.A.A., Korea 2, Bd.2 A 6926 pr.24. August 1885 p.m.(Söul, den 29. Juni 1885). 6월 25일과 27일에는 조선 정부의 공식적인 의사표시 차원에서 김윤식 자신의 명의로 조약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한을 보냈다.

다른 나라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는 조선은 중립을 지켜야 하며, 또한 조선은 어떠한 국가에도 국토를 빌려주든가 일시적인 점령을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국제법에서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 (≪舊韓國外交文書≫15:德案 1, № 147, 73쪽, 고종 22년 음력 5월 13일).

이와 같이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부측의 중립화 구상은 국가자위력을 바탕으로 직접 중립화를 이룬 스위스의 예를 택한 것이 아니고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 바탕 위에서 강대국들의 합의에 의하여 비무장중립이 보장된 벨기에의 예를 택하려 한 것이었다.

1880년대에 한반도 중립화를 제시한 내국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兪吉濬이다. 그는<中立論>을 비롯한 몇 편의 글을 통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첫째, 청이 조약의 주창자가 되어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 아시아지역과 관계가 있는 열강들을 회동하도록하고 그 자리에 조선을 참여시켜 공동으로 조약문을 작성하면 되고,0025)兪吉濬,<中立論>(≪兪吉濬全書 Ⅳ:政治經濟編≫, 一潮閣, 1971), 327쪽. 둘째, 조선의 중립화 모델로는 조선의 대내외적 상황이나 국제정치적 위치가 비슷한 벨기에 형과 불가리아 형의 절충형이 되어야한다고 설명하였다.0026)<中立論>, 320∼321쪽. 또한 그는 이렇게하여 조선이 중립화되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큰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강대국들의 相保政略도 되는 이중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며,0027)<中立論>, 321쪽. 그 실현시기로는 조·러밀약설과 天津條約 체결, 거문도사건 등 한반도를 둘러싼 청·일본·러시아·영국의 각축이 절정에 달하던 1885년 이후야말로 최적의 시기이고 분위기도 무르익었다고 보았다.0028)姜萬吉,<兪吉濬의 韓半島中立化論>(≪分斷時代의 歷史認識≫, 創作과 批評社, 1979), 916쪽.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 주장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화파 金玉均도 한반도 중립화를 구상하였다. 그가 1886년 7월에 망명지인 일본에서 쓴<與李鴻章書>라는 글을 보면, 조선을 중립국화하여 萬全無危의 땅으로 만들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당시 조선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청국이 주도하여 구미열강들과 공론을 형성, 외교적으로 상호간의 합의를 도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렇게 하여 조선이 중립국이 된다면 이는 조선 단독만의 幸일 뿐만 아니라 청에게도 得策이 된다고 하였다.0029)金玉均,<與李鴻章書>(≪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152쪽. 이처럼 김옥균은 열강간의 세력균형이라는 현실의 사태를 깊이 통찰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생각한 다음 한반도 중립화구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의 조야에서 제기된 중립화론의 동기 구조를 보면, 결론적으로 조선의 입지가 경쟁적 양대세력 사이에 개재하였기 때문에 양대세력의 개전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것을 방지해야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제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스스로가 선호하여 상정한 중립화 협의 주도국들이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국가들임으로 해서 그 발상 자체가 국제적 상황판단에 대한 미숙성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제안동기마저 퇴색시켜버리는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유길준과 김옥균은 조선이 침략을 당하면 淸도 脣亡齒寒의 위기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청이 중립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청·한 종속관계를 고집하는 청이 이에 응할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구상은 단순히 급박한 상황을 탈피해보고자 하는 도피적인 제안 내지는 국제체계의 변모에 따라 급조한 미봉책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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