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3) 청일전쟁 전후기의 한반도 중립화론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했으나 ‘下關條約’(1895. 4. 17)에 의한 일본의 遼東 할양이 이미 중국분할을 준비하고 있던 서구열강에게는 충격파가 됨으로써, 1895년 4월 23일 일본에 주재한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공사는 일본 정부에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는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하고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며 동아시아의 영구적 평화에 장애가 되므로 포기하라”0030)≪日本外交文書≫28-2, № 671 附記·672, 14∼18쪽.고 제의하였다. 이러한 ‘3국간섭’에 직면한 일본은 하는 수 없이 5월 4일 “3국 정부의 우호적인 권고대로 요동반도의 영구점령을 포기한다”0031)≪日本外交文書≫28-2, № 1173, 515∼518쪽.고 선언한데 이어 청과 ‘遼東還附條約’(9. 22)을 체결, 3천만 냥의 배상금을 받고 요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3국간섭의 결과 러시아의 대조선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한반도에는 러·일간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갈등구조가 고착화되어 갔다. 이와 같은 러·일 양국의 패권경쟁에 조선 정부는 한동안 친일적 또는 친러적 성향으로 표류하다가 고종의 俄館播遷期(1896. 2∼1897. 2)에 이르러 친러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패권경쟁은 청일전쟁과 3국간섭을 기점으로 하여 기존의 청·일 대결구도에서 러·일 대결구도로 전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또다시 한반도 중립화론이 대두되었다.

일본의 군부실력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청일전쟁을 앞둔 1890년의 제1회 제국의회에서 발표한 그의<外交政略論>0032)山縣有朋의<外交政略論>正本은 흔히≪陸奧宗光文書≫에 수록되어 있는 山縣의<軍備意見>을 말하는 바,≪梧陰文庫:井上毅文書≫가운데 그 起草稿本이 있는 것으로 보아 井上毅가 기초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餘他<外交政略論>을 보면<軍備意見>과 조선중립화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문장의 순서 등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井上毅文書≫에 있는<軍備意見>은<山縣首相自衛議>로 되어 있는데 생략 부분이 많다(≪井上毅傳≫-史料編 6, 206·204∼206쪽 및≪梧陰文庫≫A-339, A-463 및 梅溪昇,<敎育勅語成立の歷史的背景>,≪明治前期政治史の硏究≫, 未來社, 1963, 292∼293쪽).에서 우선 “조선을 청의 속국화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청이 이미 획득한 거대한 세력은 용인할 것”이라고 하여 청의 대조선 지배강화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지배를 단념하는 듯한 표현을 쓰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청·일 양국의 연대를 통한 공동보호로 조선의 영세중립화를 도모하려 했다.0033)大山梓 編,≪山縣有朋意見書≫(原書房, 1966).
高橋秀直,<1880年代の朝鮮問題と國際政治-日淸戰爭への道をめぐって->(≪史林≫71-6, 1988. 11), 48∼57쪽.

그러나 그의 중립화론은 외견상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불안을 느껴 일시적으로 天津條約을 파기, 청·일 연대를 통한 조선중립화를 구상해 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러일전쟁의 緖戰格인 청일전쟁의 준비를 위한 은폐수단이거나 일시적 속임수 내지 음흉한 이중성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열국과의 외교관계와 불투명한 戰局의 장래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대조선 정책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었다.0034)陸奧宗光,≪蹇蹇錄≫(東京:岩波書店, 1933), 130쪽.
柳永益,≪甲午更張硏究≫(一潮閣, 1990), 14쪽.
이에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외무대신은 8월 17일에 ‘조선문제에 관한 장래 일본의 정책결정을 위한 閣議案’0035)≪日本外交文書≫27-1, № 438, 646∼649쪽
≪日本外交文書≫28-1, № 298, 440∼441쪽.
≪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下, 91∼96쪽.
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장기적 내지 근본적 처리방안을 거론, ‘4개의 案’0036)四個案은 ‘자주독립안’ ‘일본의 보호국화안’ ‘청·일공동보장안’ ‘영세중립화안’으로 되어 있다.을 이토 수상에게 제출하면서 그 제4안으로 한반도 중립화를 구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전쟁수행을 위한<暫定合同條款>과<大朝鮮·大日本兩國盟約>의 배경이 되는 ‘保護國化案’(제2안)의 채택 밖에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청일전쟁 직전 청·일 양국군의 조선진주로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 때 조선주재 영국부영사 폭스(Harry H. Fox)와 제물포 주재 영국부영사 윌킨슨(W. H. Wilkinson)이 仁川港의 戰時局外中立을 제의하여 열국 영사들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러시아·일본의 반대로 성사될 수 없었다.0037)仁川府廳 編纂,≪仁川府史≫(京城:近澤商店, 1933), 411∼412쪽.

청일전쟁 후 한반도 중립화론이 국제적으로 각광을 받은 것은 1896년의 국면에 들어와서였으며 이 당시 이를 주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0038)梶村秀樹,<러일전쟁과 조선의 중립화론>(楊尙弦 編,≪韓國近代政治史硏究≫, 사계절, 1985), 342쪽. 영국은 아관파천 시기인 1896년 5월 1일에 주일영국공사관을 통하여 일본 외무대신 무츠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금일 조선의 형세는 러시아로 하여금 그 보호권을 선언하도록 만들거나 조선국왕 스스로 청국의 속방임을 선언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또는 열강담보하의 독립국으로 선언하는 제안에 동의할 것인가(≪日本外交文書≫29, № 300, 582쪽).

이와 같은 영국측의 제안을 검토해 보면, 조선에 있어서의 아관파천이라는 새로운 국면 곧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 같은 국면이 전개됨에 따라 영국으로서는 조선이 혹시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데다가, 더욱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즈음한 일본 정계의 원로 야마가타의 모스코바 행이 러·일협상의 가속화를 예감케하는 것이어서 동아시아 정세의 함수관계상 결코 좌시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론하자면 영국은 조선으로 하여금 어느 일방에 기울어지지 않는 현상 그 자체를 유지토록하기 위하여 러·일협상을 저지하는 대신 일본을 끌어들인 열강보장하의 한반도 중립화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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