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2)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 시도

1897년 2월 20일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고종은 동년 8월에 연호를 光武로 고친 다음 10월에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바꾸어 이를 선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임오군란 이래로 국가의 주권을 위협해 오던 淸·日本·러시아 등의 외세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민족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는 1896년에 체결된 ‘베베르-고무라 각서’(5. 14)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6. 9)의 영향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간의 세력균형이 모처럼 이루어진 이후여서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지적처럼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에 종주국이 없었던 시기였다.0039)알렌은 1896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를 유일하게 한국에 종주국이 없었던 시기라고 하였다(뉴욕시립도서관 소장,<알렌文書>The Horace Newton Allen Manuscript Collection 중 미국해군대학 강연내용, 1906년 6월). 따라서 대한제국은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국제간의 관계정상화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1900년 청에서 義和團事件이 발발함에 따라 한국의 이러한 기대는 일시에 무너져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심화된 열국의 중국분할을 주목하면서 그와 같은 民亂이 한국 내에 일어날 경우 이의 진압을 이유로 열국이 출병하게 되고 그것이 한반도 분할의 발단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1900년 7월에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브(Alexandre Ⅰ. Pavlov)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한반도에 있어서의 러·일간의 세력범위 획정과 각자의 세력범위 내에서의 질서보존을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0040)≪日本外交文書≫33 별책 2:北淸事變(中), № 1326, 385∼386쪽. 이러한 제의는 동경에서도 동시에 행하여져 주일 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A. P. Iswolskii)가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외상을 위시하여 야마가타 수상과 이토에게도 같은 내용의 제안을 내놓았다.0041)≪日本外交文書≫33 별책 2:北淸事變(中), № 1328∼1330, 389∼392쪽.
淺野長武外 編,≪近衛篤麿日記≫第3卷(鹿島硏究所出版會, 1968), 247쪽.
러시아 외교관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한국 북부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단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내어 놓은 한국에 있어서의 세력범위획정안은 일본측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야마가타는 1900년 8월 20일자의 ‘北淸事變善後策’이라고 題한 의견서에서 한국에서의 러·일 양국의 세력범위로써 서쪽으로는 대동강, 동쪽으로는 원산항을 연결하는 선을 경계로 함이 적당하다고 논하였고,0042)德富蘇峰 編述,≪公爵山縣有朋≫下卷(山縣有朋公記念事業會, 1933, 原書房 復刻, 1969), 486쪽.
大山梓 編,≪山縣有朋意見書≫(原書房, 1966), 262∼264쪽.
외무대신 아오키와 주러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한국을 분할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滿·韓 交換을 주장하였다.0043)British Foreign Office, Japan:Correspondence, 1856∼1905, Microfilm F. O. 46, № 528, Despatch 1900 (August October), pp. 15∼21, Satow to Salisbury, August 6, 1900(№ 122).
≪日本外交文書≫33, № 525, 700∼701쪽.
角田順,≪滿洲問題と國防方針≫(原書房, 1967), 36∼37쪽.
일본의 육·해군 내부에서도 의화단사건을 기회로 한국에 출병하여 한국을 보호국화해야 한다는 강경론과, 한국을 三分하여 북부 2道를 러시아의, 남부 3道를 일본의 영토로 하고 중부 3道는 한국의 고유 영토로 하자는 새로운 협상안을 생각하는 자가 있었고,0044)≪近衛篤麿日記≫제3권, 1900년 7월 4일, 207∼209쪽.
日本國立國會圖書館憲政資料室 所藏,≪齋藤實關係文書≫1, 海軍關係書類, 2005∼2025, 2029<1900年日記>卷末.
고노에 아츠마로(近衛篤麿)처럼 ‘韓·日國防同盟’의 체결을 통한 ‘朝鮮扶植論’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0045)≪近衛篤麿日記≫제3권, 207∼209쪽(1900년 7월 4일), 243쪽(1900년 7월 19일), 289∼290쪽(1900년 8월 29일).
坂井雄吉,<近衛篤麿と明治三十年代の對外硬派-≪近衛篤麿日記≫によせて->(≪國家學會雜誌≫83권 3·4호, 1970. 8), 73∼88쪽.

대한제국정부는 머지 않아 닥치게 될 위기를 예방하는 방안으로써 일찍부터 미국을 이용하는 방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이미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을 한국에 파견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한 적이 있고 일본이 ‘로젠-니시협약’(1898. 4. 25)에 따라 한국에서의 상공업상의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은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해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朝·美修好通商條約’(1882. 5. 22) 제1조에 따라 한국에 정치적 지원을 해 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미국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0046)愼鏞廈,<光武改革論의 問題點>(≪創作과 批評≫49, 1978 가을), 143∼183쪽.

대한제국정부는 이미 1890년 11월부터 주일조선대리공사 金嘉鎭의 명의로 알렌을 통한 對美中立化外交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0047)당시 주일조선대리공사 金嘉鎭은 주조선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에게 “청국과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이 위태롭기 때문에 조선을 구제하는 유일한 방책은 여러 열강들간에 협정을 맺어 스위스와 같은 형태로 중립화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보호하고 조선으로 하여금 조용히 발전에 힘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미국은 조선의 사심 없는 친구이므로 미국이 앞장 서서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일본과 손을 잡은 뒤 청국·러시아·영국에게 이 일의 성사를 위하여 협조를 구해보라”고 요청하였다. 알렌은 이러한 사실을 1891년 6월 3일 자로 미국 국무성에 보내는 비밀 서한에서 자세히 밝혔다(F. H. 해링튼 著, 李光麟 譯,≪開化期의 韓美關係≫, 一潮閣, 1983, 339∼340쪽 및 具永祿·裵永洙 編,≪韓美關係:1882∼1982≫, 서울大 美國學硏究所, 1982, 24쪽). 이번에도 역시 알렌을 중개자로 하여 미국 주도의 한반도중립화 실현을 기대하였다.

1899년 봄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賜暇歸國次 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고종을 알현했을 때, 고종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도 열강의 협조를 얻어 영토를 보전하고 중립화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희망하면서 이를 알렌공사가 직접 미국 정부에 교섭하도록 요청하였다.0048)Despatches from U. S. Consul to Korea: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the U. S. representatives in Korea, 1883∼1905, Allen to the Secretary of State, October 2, 1900, Enclosure, Allen to Mr. Buck. 이에 알렌은 미국의 래이크 챔프레인(Lake Champlain)으로 가서 맥킨리(W. Mckinley) 대통령과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나 ‘이 문제에 미국이 솔선하여 다른 열강과 협약을 체결해 줄 것’을 요청한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맥킨리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은 그들의 전통적인 불간섭·중립주의를 이유로 내세워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0049)Ibid., Allen to the Secretrary of State, October 2, 1900.
F. H. 해링튼, 앞의 책, 340쪽.
따라서 주한미국공사를 통한 고종의 대미중립화추진외교는 이번에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한국 정부는 미국공사관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미국인 고문관 샌즈(William F. Sands)를 통해서도 미국에 의한 한국의 중립화 실현을 기대하고 있었다.0050)文一平 著, 李光麟 校註,≪韓美五十年史≫(探求堂, 1975), 249∼251쪽.

샌즈는 1899년 10월 21일 宮內府顧問官에 취임하자마자 구체적으로 정부의 고관들을 향하여, 한국이 러·일 양국의 대립의 장으로 화하는 것을 방지하려면 중립화를 위한 열강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하며, 이의 성취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추진력의 원천이 되는 국가자위력을 길러야 하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借款을 도입하여 내정개혁과 교육개혁을 선행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0051)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제8권, (巖南堂書店, 1964), 402∼405쪽.
W. F. Sands, Undiplomatic Memories(New York:Whittlesey House McGrow -Hill Book Co. Inc, 1930), pp. 122∼124.

샌즈가 구상한 개혁요강은 그가 1900년 1월 15일 황제 직속의 法規校正所 議定官에 임명되면서0052)≪日省錄≫, 광무 3년 12월 15일.
≪承政院日記≫, 광무 3년 12월 15일.
≪高宗實錄≫, 광무 4년 1월 15일.
구체화됐는데, 내정개혁으로는 國立銀行을 설립하여 재정기반을 조정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군대를 신설하며, 또한 警務廳을 內務로 이전시키는 등의 행정기구를 개편하는 일이었고,0053)尹致昊,≪尹致昊日記≫(國史編纂委員會, 1977), 1900년 12월 14일, 250∼251쪽.
澁澤靑淵記念財團龍門社 編,≪澁澤榮一傳記資料≫16(澁澤榮一傳記資料刊行會, 1957), 98·107쪽.
W. F. Sands, op.cit., pp. 120∼124.
교육제도의 개편으로는 각국 공사관 관할하의 외국어학교를 정부 산하로 통합시킴으로써 정부 재정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0054)W. F. Sands, ibid., 121쪽. 그는 이러한 과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같은해 9월에 들어 헌트(Leigh Hunt)·콜브란(Henry Collbran)·보스트윅(Harry Bostwick) 등으로 구성된 미국인 신디게이트(Syndicate)로부터 海關稅收入을 담보로 1,000만 달러(1000만원)라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다.0055)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Despatch from United States Ministers to Korea, 1883∼1905. Microcopy № 134(이하 U.S.Ministers' Despatches), Roll № 15, Allen to Hay, Novemver 18, 1899. Roll № 16, Allen to Hay, June 6, 1900, Roll № 16, Allen to Hay, August 31, September 25, 1900.

그러나 샌즈의 내정개혁은 벽에 부딪혔다. 우선 宮廷內에서부터 부정이득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嚴淳妃는 종래부터의 친미파와의 대립 때문에 차관도입에 비판적이었고, 샌즈가 동조자로 기대했던 주한 외국공관들마저 프랑스 영사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국의 이익과 결부시켜 미국차관에 의한 개혁추진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차관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샌즈의 내정개혁은 추진될 수가 없었다.

샌즈는 그의 내정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의 지론인 선 내정개혁 후 중립화기도가 어렵게 되었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이제는 중립화만의 실현을 향한 외교적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는 한국을 스위스·벨기에와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한국의 중립화 문제를 제기하여 한국과 관계 열국과의 조약체결을 서둘렀다.0056)徐仲錫,<近代極東國際關係와 韓國永世中立國論에 對한 硏究>(≪慶熙大論文集≫4, 1965), 307쪽. 그러나 이에 대한 러시아공사 파블로브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즉각적인 반응은 자국의 이익과 관련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샌즈는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직행하기에 앞서 주한 영국공사 조단(Sir John N. Jordan)을 만나 자신의 영세중립안을 설득시켜 보았으며 다시 이토와도 만나 자신의 案에 대하여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 안을 지지하는 관계 열강은 하나도 없었다.

샌즈는 마지막 단계로 자신의 영세중립안에 대하여 가장 이해를 잘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 정부에게 지지를 요청하였다.0057)W. F. Sands, op.cit., 225∼232쪽. 이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 헤이는 샌즈에게 “미리 明言하여 둘 것은 귀하 개인으로 인하여 如何한 분규가 일어나든지간에 미국 정부에서는 결코 거기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귀하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미국을 대표하지 못한다. 다시 明言하여 둘 것은 정부로서는 귀하를 다만 一 冒險者로 간주할 뿐이다”라는 내용으로 샌즈를 미국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 개인으로 간주한다는 絶緣狀을 보냄으로써 그의 제안을 가차 없이 일축시켜버렸다. 샌즈는 국무장관 헤이가 보낸 이러한 서신에 대하여 “한국측에서 이 서신의 내용을 알았으면 낙망하였으리라. 한국 정부의 요구는 미국인 개인의 고문관이 아니요, 미국 정부의 원조였었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을 뿐 별 도리가 없었다.0058)文一平, 앞의 책, 250∼251쪽.

이처럼 샌즈의 중립화안은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강력한 반대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하였다.0059)W. F. Sands, ibid., p.123.

한국 정부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탁지부대신 趙秉式을 1900년 8월 7일자로 駐箚日本國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0060)≪日省錄≫, 광무 4년 7월 13일.
≪承政院日記≫, 광무 4년 7월 13일.
≪舊韓國官報≫, 광무 4년 8월 7일 號外.
일본 주도의 한국중립화를 모색하였다.

조병식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측은 그의 渡日에 일본이 협력했기 때문에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후 그의 정반대되는 행동은 일본 조야를 몹시 경악케하고 당황하도록 만들었다. 고노에 등이 한·일 국방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했는데도 그는 이에 관해서 아무런 제안도 행하지 않았던데 비해 중립화안에 관해서는 극히 열심이었다. 우선 그는 8월 29일의 고노에와의 회견에서 “中立의 件을 유일한 문제로 命받았다”고 하면서 “한·일국방동맹은 무의미하다”고 하는가 하면,0061)≪近衛篤麿日記≫3권, 1900년 8월 29일, 282∼290쪽. 아오키 외상과의 회견에서는 오히려 일본측이 한국중립화안을 제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0062)≪外務省マイクロフイルム≫, 1900년 9월 14일 林宛靑木 電報, Tel.1900, 1,383쪽.

일본 정부는 한국의 중립화 주장을 정식으로 거절하였다. 특히 東亞同文會의 고노에 등은 중립화안의 배후에 러시아를 상정하여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한 다음 반드시 한국에 진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얻는 수단으로서 조병식을 사주하여 한국중립화를 제안한 것으로 생각하였다.0063)≪近衛篤麿日記≫3권, 1900년 8월 29일, 289∼290쪽.
坂井雄吉, 앞의 글, 84∼85·87쪽.

조병식은 다시 주일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를 만나 그에게 한반도 중립화문제를 거론, 서로 협의를 가졌다.0064)Despatches, Allen to the Secretary of State, October 2, 11, 1900.
森山茂德,≪近代日韓關係史硏究≫(東京大學出版會, 1987), 125∼126쪽.
버크가 알렌에게 보낸 문서에 의하면, 조병식이 자신을 방문했을 때 한국중립화 문제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바, 조병식은 한국이 스위스와 같은 형태의 중립국이 되어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받기를 원하며 이는 열강의 보장만 있으면 가능하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주선을 받고자 자신의 도움을 원한다고 提言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버크 자신은 이 문제를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을 통하여 미국 정부에 직접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으며, 또한 자신은 이 문제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다만 자신의 한국에 대한 호감을 표현할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때 조병식은 일본이 장차 한국을 병합하려고 획책할 뿐만 아니라 러·일간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어 곧 전쟁이 발발할 것 같다고 하는가하면, 일본은 우선 한국 황실 내에서의 세력부식을 위하여 정략적으로 한국중립화 문제를 제의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중립화 문제에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0065)Ibid., October 11, Enclosure № 1, Buck to Allen, October 1, 1900.

버크는 조병식과의 회담 내용 곧 한국중립화 문제에 대한 조병식의 협조요청, 이에 대한 대미 직접 접촉의 권고, 그리고 일본의 한국 병합획책에 대한 조병식의 豫見 등을 1900년 10월 3일자로 미국 국무장관 셔먼(John Sherman)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국중립화 요청은 미국 정부로부터 묵살당하였다.0066)具永祿·裵永洙 編, 앞의 책, 26∼27쪽.

조병식의 대일·대미 중립화 외교에 대한 러시아측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측은 주한공사 파블로브와 주일공사 이즈볼스키 사이에 공조체제를 형성하여 조선 정부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있었다.0067)≪日本外交文書≫33-別冊 2, № 1361, 425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マイクロ≫81호, 8월 20일, 靑木宛林 機密信, 198∼203쪽.
이를테면 파블로브는 9월 26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중립화안의 불가를 논하였는데 일본측 정보에 의하면 “이것은 아마도 헛 수고에 속할 뿐이다. 현금과 같은 한국의 상황에서 어떻게 중립국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말로는 가능하나 실행이 불가능한 議論이다. 이 같은 문제는 차라리 철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권고하였다는 것이다.0068)≪駐韓日本公使館記錄マイクロ≫81호, 1900년 9월 26일, 靑木宛林 機密信, 228∼229쪽. 파블로브는 1900년 10월 19일 이후 수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여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 다음, 한국과 타 열강간의 정치·외교적 문제에 있어서 사전에 러시아에 통고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일체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곧 한국의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제의는 우선적으로 러시아 정부로부터의 사전 양해를 얻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0069)Despatches Allen to Hay, October 20, 1900.

이처럼 한국의 대일·대미 중립화 추진 외교는 미·일·러 3국이 보인 부정적인 반응과 그들 상호간의 의심 때문에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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