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1) 전시국외중립 외교

(1) 전시국외중립 외교

1900년 7월 의화단사건의 재발을 계기로 러시아는 16만 대군으로 만주를 재점령하였으나 점차 파병 명분이 퇴색되고 국제적인 여론도 불리하여 마침내 청과 ‘滿洲撤兵條約’을 체결하였다(1902. 4. 8).0070)이 조약에 의하면 “본 협약 조인 후 6개월 간에 盛京省 西南部 遼河에 이르는 지방의 러시아 군대를 철수하고 또 철도를 淸에 반환할 것, 다음 6개월 간에 盛京省 殘部 및 吉林省에 있어서의 러시아 군대를 철수할 것, 또 다음 6개월 간에 黑龍江 所在의 러시아 군대를 철수할 것”으로 되어 있다(≪日本外交文書≫35, № 78∼81, 96, 99∼100, 203∼233쪽). 그러나 러시아가 이 조약에 따라 1차 철병(1902. 10. 8)을 단행한 다음 돌연 2차철병(1903. 4. 8 예정)을 이행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압록강 연안에서의 활동을 활발히 함으로써 그들의 동아시아 정책이 더욱 적극적이고 돌발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그들은 이미 1903년 3월경부터 森林會社의 보호라는 구실 아래 군대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거쳐 한국의 항의를 무시하고 용암포에 주둔시키더니(4. 21∼), 이어 砲臺를 구축하고 電線을 가설하고 7월 20일에는 한국을 협박, 租借地 25만 평을 획득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동향에 대하여 일본의 대응은 신속하였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활동에 대항하여 용암포의 對岸에 해당하는 의주를 開市할 것과 용암포와 함께 의주를 각국 거류지로 해야할 것을 요구하고,0071)≪日本外交文書≫36-1, № 410, 458쪽. 러시아에 대해서는 1903년 8월 12일 協商基礎案을 제출하였는데 이 안에 의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 만주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우세 또는 특수 이익을 제안하고 있다.0072)≪日本外交文書≫36-1, № 9∼12, 11∼14쪽.
沼田市郞,≪日露外交史≫(大阪:屋號書店, 1943), 161∼162쪽.

이 협상기초안을 접수한 러시아 정부는 10월 3일에 주일 공사 로젠(B. R. Rosen)을 통하여 그 代案을 제출하였다. 러시아측 대안은 한국을 일본의, 만주를 러시아의 각자 세력범위로 하면서도 북위 39°선 이북의 한국영토를 중립지대화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추가한 것이다.0073)≪日本外交文書≫36-1, № 25, 22∼23쪽.
沼田市郞, 위의 책, 162∼163쪽.

일본은 러시아의 중립지대 설정 제안을 일본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10월 14일의 수정안 제출에 이어 10월 30일 다시 확정수정안을 주일 러시아공사 로젠에게 제출하였다. 이 확정수정안에 의하면 한국에 관한 제안은 8월 12일자 원안 거의 그대로이며 다만 만·한 경계에서 그 양측에 폭 50km의 중립지대를 설정하여 비무장화한 다음, 러·일이 각자 청·한과 이미 체결한 조약에 따라 그 안에서의 상업상 이익 및 거주권을 상호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은 만주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특수이익과 필요조치를 승인함으로써 만주는 일본의 특수 이익에서 제외되고 그 대신 한국은 러시아의 특수이익에서 제외된다고 하였다.0074)≪日本外交文書≫36-1, № 28∼31, 25∼28쪽.
沼田市郞, 위의 책, 163∼164쪽.

이와 같이 러·일 양국은 만주와 한국을 둘러싸고 이권의 내용과 관할지역의 범위설정에 있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갈수록 더욱 팽팽한 줄다리기를 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 戰雲이 감돌게 하였다.

평시에 있어서 영세중립 등 항구적인 중립화가 곤란하였고 더구나 러·일 개전 임박이라는 다급한 상황에서 군비충실책의 조급한 실현마저 불가능하게 되자 대한제국은 남겨둔 최후의 수단으로써 ‘戰時局外中立案’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일협상을 전후하여 러일전쟁의 풍설이 점차 유포되어 가자 고종은 만주문제가 발단이 되어 러·일이 개전한다면 한국영토는 반드시 戰場化하여 러·일 兩軍으로부터 유린될 것이므로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러·일 양국에게 한국의 중립을 보장하도록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1903년 8월 18일자로 주일·주러 양 공사에게 내린 외부대신 李道宰 명의의 훈령에는 러일전쟁의 경우 한국의 중립을 파괴하지 않고 영토를 유린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각국 정부로부터 속히 얻어내도록 盡力하라는 명령으로 되어있다.0075)≪日本外交文書≫36-1, № 695 附屬書, 720∼723쪽.

이에 따라 한국은 국외중립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가 자국의 고무라 외상에게 연속적으로 보고한 내용을 보면, 1903년 8월 18일자 보고에는 한국 황제가 宮內官으로서 프랑스어에 능통한 玄尙健을 密旨를 휴대시켜 프랑스에 파견하였으며, 그 밀지의 내용은 러·일 관계가 파경에 이르면 프랑스에게 한국의 보호를 의뢰하겠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0076)≪日本外交文書≫36-1, № 690, 718쪽. 19일자 보고에는 현상건의 사명이 프랑스에서 현지 한국공사와 합류한 후 네덜란드로 동행, 만국평화회의 회원과 회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회견 안건은 ‘러·일 개전의 경우에 한국이 자주독립과 중립유지가 어려워 러·일 양국군에게 국내를 유린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 대책을 미리 강구한다’는 것이고, 그 밖에 주프랑스한국공사 자신도 밀지를 휴대하고 있다고 하였다.0077)≪日本外交文書≫36-1, № 691, 718쪽.

8월 21일자에는 역시 현상건에 대한 정보보고인바, 현상건이 사명을 띠고 러시아 汽船 편으로 旅順으로 향발, 다시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에 도착할 예정인데 그 사명은 19일자 정보보고와 동일하며 특히 베베르(K. I. Waeber)에게 전달할 고종의 밀서를 휴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태도를 정탐하라는 것도 명령되어 있다고 하며, 이러한 모든 것은 玄暎運의 渡日목적과 같다고 덧 붙였다.0078)≪日本外交文書≫36-1, № 692, 719쪽.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도 똑 같은 노력을 기울였던바, 8월에 접어 들어 우선 황실의 신임을 받고 있던 鐵道院會計課長 현영운 부부를 일본에 파견하여 이토·고노에 등과 접촉, 외부대신 명의의 밀서를 전달하게 하고 그들을 통하여 歐亞情勢의 추이와 일본의 입장을 탐지하도록하는 한편,0079)市川正明 編,≪日韓外交史料≫9(東京:原書房, 1981), 256∼259쪽. 8월 25일에는 禮式院參書官 高義誠을 파견하여 주일공사로 하여금 중립실현을 위한 교섭을 개시하도록 명령하였다.0080)≪日本外交文書≫36-1, № 694, 720쪽.
중립보장 요청을 위하여 주러·주일 양공사에게 내린 훈령은 고종의 비밀 명령으로 總稅務司에서 기초되었다는 사실이 주한 영국 공사를 통하여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탐지되었다(같은 문서 694의 附記, 695 및 附屬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주일공사 高永喜는 9월 3일 한국중립문제에 관하여 일본 정부의 보장을 요구하는 공문을 고무라 외상에게 수교하였는데,0081)≪日本外交文書≫36-1, № 697, 723쪽. 그는 “이는 중대한 안건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숙고한 후에 회답하겠다”고 얼버무리다가0082)≪日本外交文書≫36-1, № 698, 723∼724쪽. 드디어 9월 26일 “帝國政府는 그 傳來의 政綱을 따라 평화유지와 修睦增進에 진력하는 外에 餘念이 없으므로 지금 兵戌이나 중립을 말하는 것은 不吉하며 또 시기에 不適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는 내용의 회답을 고영희 공사에게 보내왔다.

러시아 정부도 역시 한국 정부의 전시중립보장 요청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주러한국공사 李範晋은 10월 21일 러시아 외무차관 오보렌스키(Obolensky)를 방문하여 한국중립 문제를 최종적으로 논의하였던바 오보렌스키가 러·일간의 전쟁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함에 따라 회담은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였고,0083)≪日本外交文書≫36-1, № 702, 726쪽. 金仁洙로 하여금 旅順의 極東總督 알렉세에프(E. I. Alekseev)에게 宮內大臣 명의의 밀서를 전달토록 한 것도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시국외중립을 보장받기 위한 한국 정부의 외교적 시도는 끝내 러·일 양국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지만, 11월 23일 한국 정부는 “장차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본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겠다”고 표명하였고,0084)≪高宗實錄≫, 1903년 11월 23일. 이에 대한 보장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가 1904년 1월 16일 이전에 이탈리아 국왕에게 전달되었음이 (이탈리아 외상의 제보로) 駐伊 일본공사 大山綱介에 의해 확인되었다.0085)≪日本外交文書≫37-1, № 331, 310쪽, № 359, 324쪽.
梶村秀樹, 앞의 글, 344쪽.
이것이 국외중립보장을 사전에 요청한 한국 정부의 마지막 외교활동이었다.

고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전시국외중립 외교가 거의 무위로 끝날 즈음에 영국 주재 한국공사관에서 국외중립을 시도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주영한국서리공사 李漢應0086)李漢應(1874∼1905)은 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한 후 成均館進士·漢城府主事·관립영어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01년 3월에 駐箚英義兩國公使館 3등 參書官으로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4년에는 서리공사로서 동년 8월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의 내용이 외교고문·재정고문 등의 초빙협정으로 되어 있는 데에 반발,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에게 공동 대책의 강구를 호소하였고, 1905년에는 영·일 동맹의 갱신 움직임에 반발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국권의 상실이 불가피함을 예견하고서는 유서를 남기고 동년 5월 12일 현지에서 음독 자결하였다(孫世昌 編,≪殉國烈士李漢應先生遺史≫, 文藝弘報社, 1959, 27∼42쪽).은 1904년 1월 13일·19일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외무성을 방문, 한반도 정세에 관한 長文의 메모와 각서를 수교하였다.0087)Yi Haneung to Foreign Office, 1904. 1. 13, 1904. 1. 9, F.O. 17/1662.
具汏列,<李漢應과 韓·英관계-그의 韓半島中立化案을 中心으로->(≪省谷論叢≫16, 省谷學術文化財團, 1985), 511쪽.

특히 각서에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을 해 줄 것을 요망한다”라고 大綱을 전제한 다음, 새로운 보장을 포함한 구체적인 요청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영·일동맹에 의거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보장할 것, 둘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한국 정부를 지배하려는 기도를 할 경우 이를 방지할 것, 셋째, 어떠한 침략적인 국가가 한국 내에 있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만한 소요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韓國內地로 군대를 파병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 넷째, 만약 한국 내에 소요나 폭동 사태가 발생하면 한국 정부가 먼저 그 주권행사에 의거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의무를 다할 것, 다섯째, 러일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국 정부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전쟁의 결과에 관계 없이 열강과의 양해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주권 및 영토보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 등이었다.0088)具汏列, 위의 글, 511쪽. 이와 같이 이 각서 내용은 정부의 공식입장과 거의 같은 전시국외중립안이었다.

이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영국은 1902년의 영·일동맹에 따라 이미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 관한 중요한 결정은 일본에게 미루어 왔다. 이것은 영국이 한반도 문제를 두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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