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3) 러·일 개전기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
  • (2) 전시국외중립 선언

(2) 전시국외중립 선언

러·일협상이 점차 결렬로 치닫고 開戰이 필연적인 사실로 되어가자 한국은 독자적인 국외중립 선언을 서둘렀다.

한국의 국외중립을 선언하게 한 주동 인물은 고종을 직접 움직인 李容翊·姜錫鎬를 비롯하여 李學均·玄尙健·李寅榮·프랑스인 교사 마르텔(Martel) 및 벨기에인 고문 델코안뉴(M. Delcoigne) 등이었다고 한다.0089)≪日本外交文書≫37-1, № 340, 314∼316쪽.
주한 영국공사 조단에 의하면 국외중립 선언 발표문안은 델코안뉴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Jordan to Landsdowne, 1904. 2, F.O. 17/1659, № 26 및 具汏列, 위의 글, 508쪽).
그러나 당시 朝野에서는 전시국외중립안과 한·일비밀공수동맹안(한·일밀약안)이 팽팽히 맞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의 중립 선언 저지를 위한 정탐활동이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전시국외중립 선언을 극비리에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국제적으로 공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반도의 전신업무가 이미 일본의 실질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었으며 왕궁 내부에까지 諜者가 많이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 발표 직전까지의 보안유지가 어렵고 외부로부터의 방해공작도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의 직접 명령을 받은 特使가 해외에 나가 기습적으로 각국에 타전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던바, 이것이 곧 1904년 1월 21일자로 발표된 중국의 ‘芝罘 宣言’이었다.

한국 외부대신 李址鎔의 명의로 각국에 타전된 전시국외중립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러·일간에 발생하고 있는 미묘한 관계를 보거나 또는 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당면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보이는 어려운 문제들을 생각할 때에 한국 정부는 그 두 국가와 한국과의 사전 협의가 어떻게 되든지를 불문하고 엄정 중립을 지킬 확고한 결심을 하였음을 황제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선언하는 바이다(≪日本外交文書≫37-1, № 332, 310∼311쪽).

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은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평소 중립 선언을 반대하고 한·일밀약체결에 진력하던 외부대신 이지용조차 자기 명의가 도용당하였을 뿐, 이 聲明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을 더욱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0090)李址鎔은 다음 날인 22일 아침에 처음으로 고종의 명에 따라 이 훈령에 加印했을 뿐이다(≪日本外交文書≫37-1, № 340, 314∼316쪽).

이제 일본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이 혹시 러시아와 가까워지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면서 만약 한국이 전시국외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압록강 연안에서의 實例처럼 러시아 한 쪽에만 편의를 준다면 이를 오히려 韓國中立 不承認의 구실로 삼겠다고 하는가하면, 중립파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뿐 오래 계속될 것 같지 않다는 전망도 하였다.0091)≪日本外交文書≫37-1, № 343, 317쪽. 또한 일본은 심지어 이용익조차도 중립선언에 당혹해한 나머지 후회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다가 마침내 한국의 중립을 승인할 필요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0092)≪日本外交文書≫37-1, № 345, 317∼318쪽. 고무라 외상은 주한 하야시 공사와 사전에 긴밀한 담합을 거친 후에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논할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히고 말았다.0093)≪日本外交文書≫37-1, № 339, 314쪽.

러시아측의 반응은 모호하였다. 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이 러시아에 통고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의외로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에,0094)≪舊韓國外交文書≫6, 日案 Ⅳ. № 7855, 731쪽.
≪日本外交文書≫37-1, № 353, 321∼322쪽.
러시아의 疆界事務官은 함경남북도 관찰사에게 오히려 한국의 국외중립 선언을 지지하면서 한일의정서 체결을 맹비난, ‘이 의정서로써 한국 인민은 일본인의 노예가 될 것이므로 러시아는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 列國을 상대로 항의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만약 일본군의 명령에 복종하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仇敵視할 것임’을 경고하기도 하였다.0095)≪日本外交文書≫37-1, № 360, 324∼325쪽.

미국은 필리핀의 영유와 중국의 문호개방을 위하여 러일전쟁 발발시의 중립을, 그것도 일본에 호의적인 중립을 이미 선언한 상태였다.0096)Despatches, Allen to John Hay, January 30, 1904.
Fro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Washington:Government Printing Office 1904), pp. 32∼35, Proclamation by the President, February 11, 1904.
Thomas A. Bailey, America Faces Russia-Russian American Relations from early times to our day-(New York, Ithaca:Cornell University Press, 1950) p. 196.
長田彰文,≪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と韓國-韓國保護國化と米國-≫(東京:未來社, 1992), 43∼44쪽.
루즈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에 대비하여 일본에게 對日本 중립을 선언하면서도 만약에 獨·佛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러시아에 가담할 때 일본을 원조하겠다는 약속을 하는가 하면, 開戰과 동시에 독·불 양국에 대하여 “1895년에 러·독·불 3국이 일본에 간섭했던 것과 같은 對日敵對를 목적한 연합을 꾀한다면 나는 즉각 일본편을 들어 두 나라에 대항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까지 했다(A.W. Griswold, The Far Easter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New Haven:Yale University Press, 1966, p. 92 및 Tyler Dennett, John Hay:From Poetry to Politics, New York:1933, p. 2).
때문에 주한공사 알렌이 본국 정부에 대하여 ‘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에 대한 회답을 자기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한국 정부에 보낼 것인지의 여부를 수차 질의하였는데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싶다”고 언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에 의한 통제가 한국인의 惡政·청의 간섭·러시아의 관료적 독선보다 오히려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으며,0097)Tyler Dennet, Roosevelt and Russo-Japanese War, (Glousester, Mass:Peter Smith, 1959, New York:Double day, Page & Co., 1925) p. 97.
Griswold, ibid., p. 69.
국무장관 헤이도 ‘중국의 중립과 독립보전·전쟁의 局地化’를 주일공사 그리스콤(Lloyd Carpenter Griscom)과 주러대사 맥코믹(Robert S. McCormick)을 통하여 러·일 양국에 요청하면서도 한국을 제외시켰다.0098)FRUS, 1904, p. 418. Hay to Griscom, February 10, pp. 722∼723, Hay to McCormick, February 10. 전쟁 발발에 즈음하여 미국 정부가 이처럼 중국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스스로 중립을 선언한 한국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미국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것이었다.0099)Tyler Dennett, op·cit., pp. 27∼28. 이러한 미국의 불공평한 태도를 목격한 주미러시아대사 카시니(Arturo Cassini)가 헤이에게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만주를 빼앗으면서 어째서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라고 했으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중립을 선언했는데 한국이 빠진 것은 기이한 일이다”라고 은근히 비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0100)Von Alvensleben to the Germ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February 12, 1904, Die Grosse Politik der Europäischen Kabinette, 1871∼1914(Deutsche Auswärtigen Amt, Berlin, 1927), 19. Band, Vol.Ⅰ, p.106.
Griswold, op·cit., p. 97.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열강들은 저마다 반응을 보여왔다. 前述한바 주영한국서리공사 이한응의 제의가 런던에서 무위로 끝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한국 정부의 공식 선언인 전시국외중립 성명이 1월 22일 서울의 영국공사관에 수교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단순히 외교적 관행에 따라 접수하였을 뿐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않았다. 주한영국공사 조단은 도리어 “러·일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 정부는 서울을 먼저 점령하는 측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은 이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것이 분명하므로 한국의 중립선언이란 중요성이 없다”거나, “··· 러·일 양군의 한반도 상륙을 한국이 저지하려 할 때는 오히려 한국에 불리해진다”는 등0101)Jordan to Landsdowne, 1904. 2. 25, F.O. 17/1659(№ 56).
Jordan to Landsdowne, 1904. 2. 10, F.O. 17/1659(№ 36).
의 부정적 반응만 되풀이하였다.

한국의 중립 선언 통고에 대하여 독일공사는 1월 22일, 프랑스공사는 25일, 이탈리아공사는 29일 각각 이를 접수하였음을 회신하여 왔던바, 이탈리아는 영국처럼 한국주재공사를 통하여,0102)≪舊韓國外交文書≫14:英案 Ⅱ, № 2549∼2550, 618∼619쪽.
같은 문서 21:義案, № 271∼272, 117∼118쪽.
그 밖의 국가들은 자국내 한국공사를 통해서였다.0103)Despatches, Allen to John Hay, 1904년 1월 30일. 한국은 이 회신들을 매우 호의적인 승인(보장)으로 받아들였지만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한 국가는 없었다.0104)≪日本外交文書≫37-1, № 339, 314쪽, № 347, 318∼319쪽.

한국 정부의 국외중립 선언이 이처럼 국제적 승인을 얻어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러·일협상 역시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됨으로써 空轉되는 가운데 점차 戰雲이 짙어지게되자, 한국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이번에는 ‘京城中立’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8일자로 주한 하야시 공사가 고무라 외상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현상건이 고종의 명령으로 프랑스공사를 설득, 러시아공사 또는 프랑스공사로 하여금 경성중립을 제의하도록 시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0105)≪日本外交文書≫37-1, № 349, 319∼320쪽. 이것은 한국의 전시국외중립 선언이 영국·미국·일본 체제로부터 사실상 거부되자 러시아·프랑스 동맹체제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경성중립이나마 성사시키려고 프랑스공사관에 매달려 본 것으로 이해된다.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 러·일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드디어 러일전쟁이 2월 8일에 발발, 한국은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2월 9일 일본군이 인천 해전에서 승리한 후 당일부로 서울에 입성, 다음 날에 선전포고를 반포하자 러시아공사 파블로브는 12일에 황급히 서울을 철수하였다. 이제 서울은 일본의 천지로 되었다.0106)위의 문서 37·38의 別冊:日露戰爭 I, № 192의 附屬書·宣戰詔勅, 83∼88쪽.
Denis and Peggy Warner, 妹尾作太男·三谷庸雄 共譯,≪日露戰爭全史≫(東京:時事通信社, 1976), 16∼20쪽.
이어서 일본은 한국 정부에 강압하여 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2월 23일자로 조인된 의정서를 보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용인할 것이며 일본 정부는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隨機收用할 수 있고 양국 정부는 상호간의 승인 없이는 본 협정에 배치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0107)≪日本外交文書≫37-1, № 376, 339∼340쪽. 이에 따라 한국의 토지와 제반 시설이 일본군의 軍用으로 접수당하였으니 이는 중립국으로서의 의무인 ‘防止의 의무’-중립국은 중립국의 영역이 교전국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지 않도록 방지할 의무0108)石本泰雄,≪中立制度の史的硏究≫(東京:有斐閣, 1958), 26∼32쪽.-를 한국 스스로 위반한 꼴이 되었다. 일이 이쯤 되면 굳이 5월 18일자로 선포된, ‘한·러간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는 한·러간 국교단절의 詔勅0109)≪日本外交文書≫37-1, № 450, 389쪽.이 없었더라도 한국의 중립 선언은 불과 1개월만인 이 때에 이미 좌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판국에 戰禍에 위협을 느낀 독일인 볼터(Carl Wolter)가 전쟁 중에 ‘仁川各國居留地會議’의 議員 자격으로 ‘仁川居留地의 국외중립’을 제의하였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음은 물론이다.0110)≪日本外交文書≫37-1, №. 355, 322∼323쪽.

<朴熙琥>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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