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1) 한국의 일본보호국화 과정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한 직후인 1903년 12월 30일에 이미, 전쟁 개시 후의 청과 한국에 대한 방침도 확정하였는데 그 중 한국에 대한 방침은 한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둔다는 전제하에 명분상으로는 보호적 협약을 선택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군사적 실력행사를 한다는 것이었다.0111)≪日本外交文書≫36-1, № 50, 41∼45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903년<日韓密約附韓國中立>, 15∼23쪽.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전쟁 개시와 동시에 미리 편성된 ‘韓國臨時派遣隊’라는 부대를 한국에 상륙시켜 9일에 서울을 점령하게 하고 이어서 전국 요지에 주둔시켜 나갔다.0112)≪日本外交文書≫37·38 別冊:日露戰爭 1, № 192, 83∼88쪽. 이와 같은 군사적 점령을 선행한 다음 일본은 같은 해 2월 23일에 한국의 국외중립 선언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이러한 불법적인 한반도 점령을 합법화하는, 곧 軍略上 필요한 지점을 隨機收用할 수 있는 ‘韓日議定書’를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간섭과 지배의 일정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한국과 강압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체결한 마지막 조약일 뿐만 아니라 일본이 명의상이나마 한국의 독립과 보전을 약속한 최후의 조약이기도 하였다.0113)≪日本外交文書≫37-1, № 368∼387, 333∼349쪽. 일본은 이처럼 침략의 안전 장치를 갖춘 다음 더 많은 병력을 한국에 배치하더니 3월 11일자로 한국임시파견대를 ‘韓國駐箚軍’으로 개칭하여 영구주둔태세를 갖추었다.0114)≪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4년 陸海軍往復.

또한 일본은 같은 해 5월 31일에 보다 체계적인 침략지침으로 ‘對韓方針’을 내각회의에서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든가 또는 일본에 병합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우선 ‘한국에 대하여 政事上 및 軍事上에 있어서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經濟上에 있어서는 더욱 더 일본 利權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기본 방침 아래 ‘對韓施設綱領’과 ‘對韓施設細目’을 규정하여 군사점령의 영구화, 외교업무의 감독, 재정권 탈취를 통한 군대해산, 재외공관 철수, 교통·통신의 강점, 농업·임업·광업·어업에 관한 拓殖事業 등 6개항의 식민지화 방안을 마련하였다.0115)≪日本外交文書≫37-1, № 390, 351∼356쪽.

이에 따라 일본은 각 분야별로 한국을 침략·지배해 나갔다. 우선 군사면에서 살펴보면, 한반도 점령과 함께 일방적으로 ‘軍令’을 발포하여 이를 한국인에게 적용해 오다가 7월에 들어와서는 輔安會 해산을 구실로 서울에서부터 ‘軍事警察制’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들 주차군사령관의 군령에 근거한 군사경찰제의 규정을 보면 한국 민간인들도 이를 위반하면 사형을 비롯한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되었는데, 1904년 말에는 전쟁상황을 내세워 그 적용범위를 수도권 일원에까지 확대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철도와 전신선의 보호를 이유로 거의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반일행동을 억압하는 구실을 하였다.0116)≪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4년 陸海軍往復,<韓國ニ於ケル 軍事的經營要領>, 1905년 外部往·本省往.
金正明,≪朝鮮駐箚軍歷史≫(東京:巖南書店, 1967), 181∼183쪽.

외교적으로, 일본은 1904년 5월 18일에 이미 한국으로 하여금 한·러 양국간에 체결된 일체의 조약과 협정의 폐기를 선언케 하고,0117)國會圖書館,≪舊韓末條約彙纂≫下(1965), 82∼84쪽, 廢棄勅宣書 및 理由書. 같은 해 여름에는 한국이 파견한 외교사절을 외국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제의하였으며,0118)H.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New York, Double day & Co., 1906), p. 211. 8월 22일에는 한일의정서의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조항에 근거하여 ‘韓日協約書’(外國人 顧問傭聘에 관한 協定書)0119)≪舊韓末條約彙纂≫上, 70∼71쪽.
≪日本外交文書≫37-1, № 417∼418, 368∼371쪽.
≪舊韓國官報≫, 1904년 9월 9일.
를 체결하였다. 이 협약에 의하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과 제3국인 외교고문을 고용해야만 하였으므로, 재정고문에는 일본 대장성의 主稅局長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채용되었고 외교고문에는 20여 년간 일본 외무성에서 일해 온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가 고용되었다. 특히 친일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가 외교고문에 기용됨에 따라 일본은 스티븐스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한국의 외교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각국에 설치되어 있는 재외공관을 폐지하도록 거듭 촉구함으로써 1904년 12월 14일 한국 정부는 칙령을 내려 미국·청·독일·일본·프랑스 등에 주재하는 공관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하였으며 향후 여권발급을 비롯한 제반 업무는 현지의 일본 영사관에서 대신 맡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외교권은 한일협약서에 의해 사실상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한국 정부에 대하여 외교·재정 이 외의 ‘규정에 없는’ 일본인 고문을 자진 초빙의 형식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하여 주한일본공사관 부무관 耶津鎭武를 군부고문으로, 일본 경시청 경시 丸山重俊을 경무고문으로, 영사 출신 加藤增雄을 궁내부고문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수 幣原坦을 학부의 學政參與官으로 배치하였다.0120)≪日本外交文書≫37-1, No. 405∼432, 362∼381쪽, No. 563∼564, 471∼472쪽.
같은 책, 38-1, No. 696∼738, 827∼860쪽, No. 739∼754, 861∼879쪽.

경제적으로, 일본은 7월에 한국을 일본인의 식민지와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하여 50년간 일본에 위임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0121)≪日本外交文書≫37-1, № 644∼689, 569∼612쪽.
F. A. McKinzie, The Tragedy of Korea(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08).
경부·경의 철도를 부설하였으며 일본인 전용의 경찰·우편·전신·전화제도를 설치하였다.0122)Angus Hamilton, Korea(New York, Charles & Scribner's Son's 1904), pp. 152∼158. 이어서 1905년 4월 1일에는<通信管理 協定書>를, 그리고 8월 13일에는<한국연안 및 內河의 항해에 관한 약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의 통신관리권과 연해 및 내하 항해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한국에서의 그들의 경제 이권의 발전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다.0123)≪舊韓末條約彙纂≫上, 186∼195쪽.
Carnegie Endownment for International Peace, Korea:Treaties and Agreements, Washington(1921), pp. 39∼45.

이처럼 각 분야별로 한국 정부를 지배해 나가고 있던 일본은 전황의 우세에 편승하여 1905년 4월 8일 내각회의를 소집, 한국을 개혁하여 일본 방어에 기여하도록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결의함과 아울러 ‘한국 정부의 내정을 감독하고 재한 일본인의 보호를 맡을 駐箚官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의 보호권 확립에 관한 방침을 확정하였는데0124)≪日本外交文書≫38-1, № 250, 519∼520쪽. 이는 이미 추진해 오고 있던 보호국화 방침을 거듭 확인한 것이었다.

한편 7월 27일에는 동경에서 일본 수상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 사이에 이른바 ‘태프트-가츠라 밀약’(The Taft Katsura Agreement)이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쌍방의 합의각서가 이루어졌다. 7월 31일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추인한0125)Tyler Dennett,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Current History 21(1924), pp. 15∼21.
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대통령이 되기까지-≫(중앙일보사, 1996), 44쪽.
이 합의각서에서 일본은 ‘미국 식민지인 필리핀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침략적 기도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미국은 ‘일본군대가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의 허락 없이는 여하한 대외조약도 체결할 수 없도록 하는 요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보호를 수립하는 것은 현재의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따라서 극동에서의 항구적 평화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취지를 말하였다.0126)≪日本外交文書≫38-1, № 193, 450∼451쪽.
≪舊韓末條約彙纂≫中, 213∼214쪽.
Tyler Dennet, Roosevelt and the Russo-Japanese War(Garden City, Double day, Page and Co., 1925), pp. 112∼114.
이 악명 높은 ‘태프트-가츠라밀약’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外交史家인 덴네트에 의해 1924년에 처음으로 폭로되었다(유영익, 위의 책, 44쪽).
곧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하고, 대신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도 한국지배를 위한 외교적 양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과 교섭하여 1905년 8월 12일 토요일, 바로 러시아가 한국문제를 포함한 平和代案을 강화회의에 제출한 날에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제3조에서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 및 경제상의 卓絶한 이익을 가지는 고로 영국은 일본이 그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며 필요로 인정하는 지도·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서 집행하는 권리를 승인함. 단 이와 같은 조치는 언제나 열국의 상공업에 대한 기회균등주의에 위반하지 아니함을 요한다’라고 하여 영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하는 대신 제4조에서 일본은 ‘영국이 인도 국경의 안전에 관계되는 일체의 사항에 관하여 특별 이익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도 국경의 부근에서 印度 領地를 옹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를 승인하였다.0127)Korea:Treaties and Agreements, pp. 40∼42.
≪日本外交文書≫38-1, № 1∼78, 1∼96쪽.
≪皇城新聞≫, 1907년 7월 12일.
이 새로운 영일동맹조약에서 일본은 영국에 관한 한 한국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 영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의 주권을 회생시켰다.

8월에 접어들면서 러일전쟁의 전황은 러시아 국내에서 일어난 파업과 반란으로 러시아로서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 루즈벨트의 주선에 의하여 러일전쟁을 종결지을 강화회의가 미국의 군항 포오츠머드(Portsmouth)에서 일본 외상 고무라·주미일본공사 다카히라 코고로(高平小五郞)·러시아 대신회의의장 위테(S. Y. Witte)·주미러시아공사 로오젠(B. R. Rosen)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강화회의는 전반적으로 순탄하지 못했지만, 특히 한국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9월 5일에 그 타협안으로서 일본측의 결의안을 조약 본문에 기재하지않고 회의록에 기입하기로하여 공식 성명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내용인즉 ‘일본 전권 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에는 한국 정부와 합의한 후에 이를 집행할 것을 성명함’0128)John A, White, The Diplomacy of the Russo-Japanese War(Princeton Univ. Press, 1964) Appendices,Ⅰ, p. 270.
日本外務省編,≪小村外交史≫(東京:原書房, 1952), 526쪽.
이라고 되어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를 승인하면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된 일본측의 공식성명을 받아내긴했으나 한국 정부를 이미 지배하고있던 일본이 어떤 명목이건 한국과의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로서는 한·러 국경선의 안전과 동북만주에 있어서의 그들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국의 주권을 타협하는 것이 패전국의 입장으로서는 필요하였으므로 결국 이런 식으로 미국·영국 양국에 이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이 회담을 알선한 루즈벨트가 독일 정부와도 사전 연락을 취하였으므로 당시의 5대 강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포오츠머드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여 한국문제에 대한 국제적 장애를 없앤 일본은 곧 이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가 조약문 교환도 보지않고 서둘러서 9월 16일 귀국하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도 이에 맞추어 본국에 돌아가는 등 바쁜 행보를 보이더니, 이들 양자는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체결에 합의를 도출하였고, 일본 정부 閣議는 이들의 합의내용을 정부의 ‘8개 방침’으로 정리하여 공식 결정을 본 다음 천황으로부터 재가를 받아냈다.0129)≪日本外交文書≫38-1, № 259, 526∼527쪽. 8개 방침의 주 내용인즉, 한국에 대한 보호권의 확립은 11월 초순에 성사시키는데(3조) 만일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을 가망이 없을 때에는 한국에 대하여 일방적인 보호권 확립을 통고한다는 것이고, 열국에 대해서는 이 방면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열국과 한국과의 모든 조약은 유지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어서의 상공업상의 이익도 보장한다(8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면밀한 계획하에 하야시 공사는 11월 2일 임지인 서울에 돌아와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협력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一進會로 하여금 보호 찬성의 선언서를 발표하게하여 조작된 민의를 선동하고 沈相薰 등 원로 대신들을 교묘하게 조종하여 고종의 의사를 떠보는가하면 이완용 등 5적을 사전에 매수하였다.0130)≪日本外交文書≫38-1, № 238, 484∼485쪽.
≪日本公使館記錄≫, 1905년<保護條約>Ⅰ, 27∼28쪽,<一進會宣言文>, 114∼117쪽.

이러한 가운데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가 일본천황의 친서를 가진 勅使로서 11월 9일 서울에 도착, 孫鐸호텔에 여장을 풀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는 다음날 10일 고종을 알현하여 일본천황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一從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고 위협을 가한 다음, 15일에 고종에게 비로소 조약 원문을 제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곤경에 처한 고종은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인만큼 관료들의 의견을 묻고 백성들의 뜻도 살펴야겠다고하여 승낙을 거부하였다. 이에 이토는, 정부대신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제군주국가의 국왕이 백성들의 뜻을 살피겠다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저항하려는 저의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위협하였다. 이토의 항의에 따라 결국 민의를 살핀다는 부분은 기각되고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데는 양해가 이루어졌다.0131)≪皇城新聞≫, 광무 9년 11월 20일,<五件條約請締顚末>.
≪日本外交文書≫38-1, № 249 附記 1, 496∼513쪽.
강재언,≪한국근대사연구≫(한밭, 1982), 252∼253쪽.

하야시 공사도 16일 아침 외부대신 朴齊純을 공사관에 초치하여 정식공문과 조약 원문을 내놓고 조약체결을 강박하였다. 한편 이토도 16일 박제순을 제외한 한국 정부 각 대신과 원로대신을 그의 숙소에 납치하여 놓고 조약체결을 강권하였다.

이러던 중 학부대신 李完用, 내부대신 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李根澤, 농상공부대신 權重顯 등 을사 5적은 찬반의 의사표시보다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인함으로써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에 이토와 하야시는 다음 날 11월 17일 하세가와로 하여금 일본군을 동원, 궁궐을 포위하도록 한 다음 궁궐내 翠玉軒에서 군신회의를 개최하도록하였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오후 3시부터 8시까지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기울어졌다. 이를 알아차린 이토와 하세가와는 폐회하고 돌아가는 각 대신을 위협하여 다시 회의를 열도록하고 특히 이토는 대신들 개개인을 호명해가며 즉석에서 가부를 묻는 방식으로 동의를 강요하였다. 강경한 태도로 반대의 뜻을 표했던 참정대신 韓圭卨이 헌병들에게 끌려나가 감금당한 가운데 탁지부대신 閔泳綺와 법부대신 李夏榮도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에 이토는 8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하였으므로 보호조약이 통과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회의를 종결시킨 다음 고종의 윤허도 받지않고 외부에서 印章을 강탈하여 날인을 마치고 11월 18일 오후 2시를 기하여 효력을 발생하도록했다.0132)≪皇城新聞≫, 광무 9년 11월 25일.
≪日本外交文書≫38-1, No. 287, 550∼551쪽.
이때 체결된 ‘韓日協商條約’(이른바 乙巳保護條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 및 일본 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의 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는 때에 이르기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다음 條款을 약정함.

제1조 일본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거쳐 이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함이 可하며, 일본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함.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을 지고,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갖는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않을 것을 약속함.

제3조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폐하 아래에 한 명의 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직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京城에 주재하고 직접 한국 황제폐하에게 內謁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갖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더불어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장함.

제4조 일본국과 한국간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함(≪舊韓國官報≫, 1905년 12월 16일).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에 성공한 일본은 후속조치로 1905년 12월 20일 統監府 및 理事聽官制를 제정하여 공포했다.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의 실행기관으로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주요 지점에는 이사청을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외부청사는 통감부 청사로 바뀌었고, 1906년 1월 17일에 외부관제마저 개편되어 한국 외부사무는 의정부로 이속, 각종 외교문서·조약원문·공문서의 보존만을 맡게 되는 외사국으로 전락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고말았다. 뿐만 아니라 통감에게는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 재정·외교·궁내부·군부·경무 등의 외국인 고문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해 주어0133)朝鮮總督府,≪朝鮮の保護と倂合≫(1917), 26∼31쪽. 한국의 내정까지 지배할 수 있게하였으며, 그 밖에도 통감부 관제 제4조에 따라 주차군사령관에 대해 군대 사용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이렇게하여 설치된 조선통감부는 1906년 2월 1일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를 임시통감으로하여 총무부·농상공부·경무부를 비롯한 3부 16과의 중앙부서와 24개의 지방이사청(13개 본청, 11개 지청)으로 구성되어 업무를 개시하다가 3월 2일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0134)≪舊韓末條約彙纂≫下, 501∼504쪽.
李瑄根,≪韓國史:現代篇≫(乙酉文化社, 1963), 937∼940쪽.

또한 일본은 그들의 재외공관에 훈령하여 주한각국공사관의 철수를 교섭하도록 하였다. 이에 벨기에공사는 을사조약 체결 전에 이미 휴가라는 명목으로 서울을 떠나고 없었으며, 영국공사가 1905년 11월 30일 제1착으로 귀국하였고, 청국·미국·독일의 공사도 서울을 떠난 후 각각 공문으로서 철수한다는 통첩을 보내왔다. 홀로 남아있던 프랑스공사 플랑시(C. de Plancy)마저 마지막으로 본국 정부의 명령으로 1906년 1월 21일에 떠났으며, 공사를 철수시킨 각국은 그대신 서울에 총영사 또는 영사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0135)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Ⅰ(1965), 170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