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1) 반침략 자주 외교의 전개

고종의 밀사외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만 1년 전부터 신임하는 朝臣과 더불어 추진되었다. 고종의 첫 밀사는 1904년 12월 처음으로 미국에 파견된 당시 동경 주재 한국 공사였던 趙民熙였다. 그는 고종의 칙명을 받아 “미국정부가 현재 조약과 저촉되지않는 범위에서 동양문제의 해결에 임하여 한국의 독립유지에 진력하여주기 바란다”0137)≪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5년 本省往電.라는 요지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건너갔다. 그는 이 밀서를 주미한국공사관 고문 니이담(C. Needham)에게 위탁하였고, 니이담은 이를 미국 국무장관 헤이(J. Hay)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밀서는 미국 국무장관의 개인적인 동정을 받았을 뿐,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는 불분명한 채 넘겨지고 말았다.0138)≪日本外交文書≫38-1, No. 460, 655∼656쪽.

李承晩이 밀사로 파견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전 中樞院 議官 이승만은 11월 4일 오후 1시에 밀지를 받들고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도록 주선한 사람은 고종황제 주변의 개혁파 총신 閔泳煥과 한규설이었으며, 그의 파견 목적은 머지않아 러일전쟁이 끝나고 강화회의가 열릴 때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1882년에 체결된 朝美修好條約의 ‘居中調停條項’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0139)鄭 喬,≪大韓季年史≫下(國史編纂委員會, 1957), 광무 8년 11월, 138쪽. 1904년 11월 29일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맨(John W. Wadman) 감리사와 배재학당 동창인 尹炳求 목사, 그리고 교포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특히 윤병구와 밤새도록 나라 일을 걱정하면서 의논한 끝에 장차 미국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의 의사를 전달하기로 약속하고 다음날 미국 본토로 떠났다.0140)로버트 T. 올리버 지음, 朴瑪利亞 譯,≪리승만박사전-신비에 싸인 인물-≫(合同圖書株式會社, 1956), 138∼139쪽.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로스안젤레스 및 시카고를 거쳐 1904년 제야의 밤(12. 31)에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우선≪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 사무소를 방문하여 1905년 1월 15일자 신문에 일본의 한국 침략 음모를 폭로하는 인터뷰 기사를 게재토록 하는 한편 주미한국공사관을 찾아가 참서관 金潤晶 등을 만나 자기 使行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주미한국공사관은 대리공사 申泰茂와 김윤정간의 불화가 빚어지는 가운데 신태무 공사가 비협조적이므로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건의서를 보내어 애국적인 태도를 보이는 김윤정으로 공사를 대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신태무는 곧 소환되고 김윤정이 대리공사로 되었다.0141)위의 책, 140∼149쪽.

한편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지시한 대로 친한파 하원의원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접촉, 그를 통해 미국 국무장관 헤이의 면담을 서둘렀다. 결국 이승만은 1905년 2월 20일에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부에서 헤이 장관을 만나 1시간 반 동안 면담할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한국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더니, 헤이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도록 개인적으로나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나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했다.0142)Syngman Rhee, "Auto-Biographical Notes"(이화장 소장).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쓴 1905년 8월 일자 한글편지(이화장 소장).
유영익, 앞의 책, 40쪽.
회담결과에 만족한 이승만은 이 사실을 한규설과 민영환에게 보고하고, 한국의 독립을 구하기 위해 미국이 힘써줄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1일에 헤이가 사망하고 루우트(E. Root)가 국무장관에 취임함으로써 이승만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0143)≪리승만박사전≫, 147∼149쪽.

고종은 러시아에 밀사를 파견하려는 노력도 하였다. 주한일본공사에게 탐지된 정보에 의하면, 1905년 2월 초에 고종은 일본에게 압박당하고 있는 사정을 열강에 호소하려는 내용의 밀서를 모 외국인 편으로 上海까지 휴대케 한 다음, 그 곳에서 李學均·玄尙健과 협의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0144)≪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5년 各館來機密. 이와 같은 일본 정보망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실제에 있어서 직물상 金聖之라는 사람은 고종의 밀사가 되어, “러·일 개전으로 러시아 병사가 한국 국경을 떠나감에 따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내정장악과 주권침탈·국제공법 무시 현상이 날로 심해지니 러시아의 恩背에 의하여 일본병을 구축하거나 혹은 정책으로써 일본의 暴戾를 峻拒할 수단에 대한 稟議를 러시아 황제폐하에게 호소한다”는0145)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180∼181쪽. 요지의 밀서를 내용도 모르는 매약상 金裕皓에게 신발 속에 감추어 휴대하도록한 다음 그와 함께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 長崎를 경유하여 상해로 건너갔으며, 그들은 다시 상해에서 주한 러시아공사 파블로브의 중간 역할에 힘입어 3월 25일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Dessino)에게 이 밀서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파블로브에게 훈령하여 한국황제에게 회답하도록 하였다. 파블로브는 “러시아가 한국황제를 도와 일본의 暴戾를 억압 배제함도 멀지 않을 것이다”라는 奉答書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상해에서 인천에 가는 독일 기선 룬문호 선장에게 의탁하여 인천의 프랑스 영사를 경유, 다시 한국 중추원 某人을 거쳐 고종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다시 프랑스 군함 게루상호에 기탁하려한 듯한데, 이것이 고종에게 전달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0146)≪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5년 各館機密.

고종은 러일전쟁이 종전되고 한국의 국운이 더욱 간난해지자 밀사외교를 재개하였다. 곧 그는 9월과 10월에 李容翊과 李起鉉을 각각 프랑스에 밀사로 보내어 한국에 대한 협조를 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上海와 仁川에서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탐지되어 결국은 도중에서 좌절되고말았다.0147)≪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5년 本省來電 第211號.
鄭 喬,≪大韓季年史≫하, 권 7, 광무 9년 11월.

10월 중순에는 당시 중학교 교사이며≪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 편집자이던 미국인 헐버트(H. B. Hulbert)가 고종의 또 다른 밀서를 가지고 서울을 떠났다. 그가 휴대한 밀서는 ‘전통적인 한·미 우호관계를 강조하면서 일본의 침략행위와 그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중조정을 기대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었다.0148)F. A. 맥켄지 著, 李光麟 역,≪韓國의 獨立運動≫(一潮閣, 1977), 60∼67쪽. 그는 을사조약이 조인되기 직전인 11월 17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고종의 밀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 자신의 사명이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에게 누설되었으므로 일본 당국은 이 친서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갖은 방해공작을 다하여 결국 그는 대통령과 국무장관 모두에게 면회를 거절당하고 냉대를 받았다. 백악관에서는 외교문제이므로 국무성에 밀서를 접수시키라는 것이었고, 국무성에서는 시간이 없다면서 거절하였고, 다시 백악관에 가서 비서에게 통사정을 하고 친구인 스태포드(W. P. Stafford) 대법원 판사와 함께 국무성에 가서도 통사정을 했으나 역시 같은 이유로 면회가 거절되었다. 상원외교위원회에 서신을 보내어 상원의원들을 움직여 보려고도 애썼으나 그것도 그들의 동정을 받는데 그쳤다. 헐버트가 겨우 국무장관 루우트와의 회견을 허용받은 것은 11월 20일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일본이 보호조약의 체결을 미국에 통고해 놓은 뒤였다. 11월 25일 루우트는 고종의 친서를 대통령에게 수교하고 이를 검토한 다음, 헐버트에게 “밀서를 귀하에게 위탁한 황제가 그후 일본과 전혀 새로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밀서의 내용이 모두 처리되어 버렸으니 이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밀서 내용을 묵살하는 답서를 보내고 말았다.0149)山邊健太郞,≪日本の韓國倂合≫(東京:太平出版社, 1966), 301∼302쪽.
Homer B. Hulbert, "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and Belgium" New York Times, March 5, 1916.
Clarence N. Weems, ed, Hulbert's History of Korea, Vol.Ⅰ, (Hillary House Publishers LTD. New York, 1962)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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