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정부 주도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2)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

미국에 체류중인 헐버트는 11월 26일 고종으로부터 중국의 芝罘발 전보를 받았다. 그것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발송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였다.

朕은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총검과 공갈하에 勒定된 것이므로 전혀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니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A. J. Gradjanzev, Modern Korea, 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New York, 1944, p. 33).

그러나 이 전보는 너무 시기가 늦은 것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열강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주재미국공사관을 폐쇄할 것을 결정하고 한국주재공사관에 그 임무를 동경주재공사관에 이첩할 것을 명령한 뒤였기 때문에 헐버트가 다음날 국무차관 베이컨(Robert Bacon)에게 이 전문을 제출해봐도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0150)The Korea Review, June 22, 1919.

한편 고종은 12월 11일 주프랑스한국공사 閔泳瓚에게 밀지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조미수호통상조약(제1조)의 취지에 따르는 지원을 재삼 미국 정부에 청원하도록 하였는데, 이 일 역시 미국 국무장관 루우트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라 하여 냉정하게 거절함으로써 끝내 실효를 거두지못하고말았다.0151)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獨立運動史≫1(1970), 325쪽.

그러나 이와 같은 한국 정부 밀사들의 을사조약 무효화 외교가 공식적으로는 번번이 묵살당했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극적으로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됨으로써 동정론이 일기도하였다. 다음해 1월 13일≪런던타임스≫지는 이토의 협박하에 강압적으로 조인된 을사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의 公法學者인 레이도≪국제공법잡지≫1906년 2월호에<한국의 국제법상 지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을사조약은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정신적 육체적 강제를 가하여 얻은 것이라 하여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같은 논리로 미국인 학자 허쉬(Amos S. Hershey)도≪러일전쟁에 있어서의 국제법과 외교≫라는 저서를 통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과 협박에 의한 결과인만큼 국제법상 무효화 선언의 충분한 근거를 갖고있다고 지적하였다.0152)有賀長雄,<保護國論>, 203∼204쪽.
≪舊韓末條約彙纂≫上, 76쪽.
徐仲錫,≪美國의 對極東 政策:1900∼1905≫(大韓公論社, 1973), 168쪽.

이러한 사사로운 동정론도 아랑곳 없이, 현실은 보호국화 저지를 위한 한국 정부 차원의 노력을 무위로 끝나가게 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 있어서, 태산같이 믿었던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존재여부’도 모르고 있는 루우트 국무장관이나0153)Homer B.Hulbert, (New York Times, March 5, 1916) op. Cit., 부통령 시절부터 ‘한국의 일본 보호국화’를 보고 싶어 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이0154)The letter of Theodore Roosevelt, IV, pp. 1241∼1242, 1221∼1233, Roosevelt to Lodye, June 16, 1905. 재임하는 한 고종이 파견한 밀사들은 뜻을 이룰 수 없었고, 그만큼 일본은 미국의 묵인하에 더욱 완전한 한국침략의 길로 내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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