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2. 보호국화 저지 외교
  • 3) 민간인의 보호국화 저지 외교
  •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1) 대영·대미 보호국화 저지 외교

주영대리공사 李漢應은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인하여 우리의 주권이 흔들리게되자, 비록 공인이지만 아무런 정부의 훈령도 받지않고 전혀 개별적으로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나라 공사들에게 電信으로 연락하여 재외한국공관이 공동 노력하여 한국주권수호에 매진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러던 중 1905년에 들어와 영국과 일본간에, 일본의 한국에서의 지도·감독·보호를 인정하는 새로운 영일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의 한국침략을 승인하려는 비밀 외교가 진행되었다. 이에 이한응은 이 조약이 동양의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라하여 영국 정부에 엄중항의를 하였다.0155)孫世昌 編,≪殉國烈士李漢應先生遺史≫(文藝弘報社, 1959), 38∼42쪽.
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Ⅰ, 109∼110쪽.

이한응 공사의 외교활동에 대하여 영국 정부의 태도는 지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일본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이한응 공사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 시민도 이한응 공사를 망국 외교관이라 하여 公使交際에서 노골적으로 냉대하였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이 공사는 급기야 제1차 한일협약과 침략적인 영일동맹개정조약에 죽음으로써 항쟁하기로 결심하고 조국동포에게 피 끓는 유서를 남기고 그해 5월 12일 음독자결을 하였다.0156)≪殉國烈士李漢應先生遺史≫, 57∼63쪽.
≪高宗太皇帝實錄≫권 46, 44쪽.
朴殷植,≪韓國痛史≫(三乎閣, 1946) 제3편 32장, 272∼273쪽.
黃 玹,≪梅泉野錄≫권 4, (國史編纂委員會, 1955), 337쪽.
宋相燾,≪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1955), 李漢應條, 68쪽.
≪日本外交文書≫38-1, № 367·368, 599∼600쪽.

한편 하와이에서는 한국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교포들의 또 하나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러일전쟁 종전을 위한 포오츠머드 러·일강화회의를 앞두고 이 회의의 중재자인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과의 미·일 현안에 관한 사전 협의가 필요하여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에 윤병구를 중심으로 하는 하와이 한국 교민들은 동년 7월 12일 태프트 일행의 일본행 중간 경유지인 호놀룰루 기항에 때 맞춰 하와이群島 교민 ‘특별회의’를 소집,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채택하고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윤병구와 이승만을 선출한 다음, 와드맨 감리사를 태프트에게 보내 두 사람의 한국대표를 루즈벨트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0157)Channing Liem, Philip Jaisohn:The First Korean-American-A Forgotten Hero(Elkins Park, Penn.:The 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 Inc., 1984), pp. 215∼216.

하와이 교포들이 특별회의에서 채택한 청원서에서 윤병구와 이승만은, 자신들은 고종황제의 사신이 아니라 ‘8,000명’ 하와이 교포들의 대표라고 자처하고 또한 자신들은 조국에 있는 ‘1,200만’ 백성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한국에서 자행한 각종 침략과 배신행위를 열거하여 규탄하면서 미국 대통령이 포오츠머드 회담을 계기로 조미조약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하였다.0158)≪舊韓末條約彙纂≫中, 241∼243쪽.

윤병구 목사는 이 청원서를 휴대하고 7월 31일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이승만과 합류하였고, 그들 일행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徐載弼을 찾아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은 다음, 호놀룰루에서 얻어낸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가지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그가 머무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베이(Oyster Bay) 소재 ‘하계 백악관’을 찾아갔다. 때마침 루즈벨트는 러시아 강화회의 대표단을 맞고있었지만 한국 대표단을 만나주었고, 이 회견에서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하와이 교포들이 작성한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언제든지 기회 있는대로 한·미간의 약조를 돌아보아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주기 바라노라”고 부탁했다. 이에 루즈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요하므로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이 청원서를 제출하면 자기는 그것을 강화회의에 내놓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윤병구와 이승만은 루즈벨트의 지시대로 하겠다고 다짐하고 면회장을 물러나왔다.0159)≪뉴욕타임즈≫1905년 8월 4일·8월 5일, 기사("Will Ask Roosevelt to Protect Koreans" 및 "Koreans See the President").
方善柱,≪在美韓人의 獨立運動≫(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228∼229쪽.

윤병구와 이승만은 루즈벨트의 정중한 태도에 고무되어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가 김윤정을 붙들고 당장 필요한 조치를 취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김윤정 공사가 의외로 자기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받지않았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줄 수 없노라고 딱 잡아 때는 바람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0160)≪리승만박사전≫, 149, 158∼160쪽. 결국 하와이 교포들의 청원서는 미국 국무부DB주 1기간행 원문에는 국부무로 잘못 기재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는다.에 정식으로 제출되지 못한 채 死文書가 되고 말았으며 포오츠머드 강화회의에서 한국인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승만은 8월 9일 민영환 앞으로 쓴 한글 편지에서 청원 실패의 원인은 김윤정의 협조거부, 즉 배신에서 찾았다. 그러나 김윤정이 주미일본공사관측에 매수된 건 사실이었지만, 더 큰 원인은 루즈벨트가, 윤병구 일행을 만나기 4일전인 7월 31일에 이미 ‘일본이 장차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공격하지않는다는 조건하에 미국도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수립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동경에서의 태프트·가츠라 밀약(7. 29)을 추인했기 때문이다.0161)유영익, 앞의 책, 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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