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1) 을사조약 체결 이전의 상소운동

한국에서 淸國과의 종주권 쟁탈을 전개한지 20여 년만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러시아와 대결 10년만에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제국주의 일본은 마침내 열강들의 묵인 아래 한국의 주권 침탈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탈에 따라 한국민은 거족적인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와 같은 강인한 항일투쟁의 이면에는 침략자 일제에 대한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우월 의식과 배일 사상, 민족적인 자긍심이 잠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적인 항일운동은 그들의 대한침략의 변천에 따라 때로는 열강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정부 당국에 상소문을 올리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저항에서부터, 때로는 자주 자립을 위한 自强運動으로, 요인의 암살이나 의병운동과 같은 적극적인 투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중 상소운동은 전·현직 관리 내지는 유생들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방법상으로는 가장 소극적인 투쟁일지 모르나 일제의 압박 속에서 당시 최고 지식인들에 의해 가장 먼저 이루어졌으며, 다른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1904년 2월 조인된 한일의정서는 실질적으로 한국의 주권이 유명무실하게 된 1905년 을사조약의 길을 열었고, 1910년 한국병탄의 기반을 다져 놓은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2월 5일 전국의 유생을 회유하기 위하여 기밀비 1천원을 대여하여 抵當期限이 만료된 儒生集合所의 가옥을 찾아주고 家券과 賣渡證書를 받아두기도 하였으며,0216)≪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4년 機密本省往. 한일의정서를 조인하기 전날인 22일에는 조약체결에 반대하던 度支部大臣 李容翊을 일본으로 압송하여 조약체결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려 했다. 그러나 굴욕적인 의정서의 체결에 격분한 국민들은 단연코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한일의정서가 조인된지 나흘 뒤, 공포되기 하루 전인 2월 26일 前議官 呂永祚, 前都事 李學宰, 前參奉 尹敦求 등은 國是建議所를 만들고 건의서를 中樞院과 정부에 상정하고 종로와 남대문에도 내걸었다.0217)≪皇城新聞≫, 1904년 2월 26일. 다음날인 2월 27일에는 議政府參贊 權重奭을 위시하여 中樞院副議長 李裕寅 등은 여러 議官들과 함께 한일의정서를 반대하고, 그 체결에 앞장섰던 李址鎔에게 글을 보내 힐문하였다. 3월 1일에는 역시 이유인과 여러 의관들이 이지용과 具完喜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 그들의 매국죄를 조속히 다스려 줄 것을 청원하였다.0218)鄭 喬,≪大韓季年史≫하(國史編纂委員會, 1957), 권 7, 1904년 2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월 2일에는 한일의정서 체결에 관여한 外部交涉局長 구완희와 磚洞 康洪大의 집에 폭탄이 투척되기도 했으며,0219)≪皇城新聞≫, 1904년 3월 4일. 보부상 조직인 商務社를 중심으로 연설회의 개최 등의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는 이를 근거로 각종 협약 체결, 일본인 고용, 차관 제공, 이권 침탈을 노골화하였다. 특히 6월 6일에 이르러 일본공사가 ‘경영에 착수한 各部에 대하여 경영 완성 후 50년간’의 계약기간을 가지는 황무지의 개척권을 외부대신에게 手交하고, 동월 18일 이 사실이≪皇城新聞≫에 보도되자 일제의 무모한 요구에 대해 전국의 여론이 물끓듯 하였다. 6월 중순 경부터 전국에서는 일본의 對韓政策이 오로지 利益壟斷主義에 있다고 논하면서 철도·어업·은행권·울릉도 벌목 등의 數條目을 들어 일제를 배척하는 궐기 격문이 나붙기 시작했고, 상소문이 끊이지 않아 일제는 외부대신에게 조회하고 법부대신과 警務使에게 조사 처분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0220)≪日本外交文書≫37-1, № 654, 명치 37년 6월 18일, 儒生一派ノ排日檄文ニ關スル.

6월 19일 儒生 金箕祐, 進士 鄭東時 등은 철도 役夫의 작폐, 北進軍의 폭행, 銀行券 發用, 不通 內地에 불법거주, 바다의 어업권 침탈, 울릉도 삼림벌목, 제주도 어업기지 불법 점유 등을 거론하며 13도에 發通하다가 일본공사관의 照請으로 경무청에 피체되었다.0221)≪皇城新聞≫, 1904년 6월 20일·23일. 이튿날에는 前議官 鄭耆朝, 前監察 崔東植 등 10여 명이 일제의 황무지 勒借에 대한 격앙된 배일통문을 전국에 배포하여 항의하였고,0222)黃 玹,≪梅泉野錄≫권 4(國史編纂委員會, 1955), 1904년 4월.
≪皇城新聞≫, 1904년 6월 21·22일.
22일에는 종2품 李相卨이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前議官 洪肯燮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함을 극론하면서 御供院의 철폐 등 17개 조목을 들어 정부에 청원하였다. 또한 從1品 李乾夏, 從2品 朴箕陽·李相卨, 奉常司副提調 宋奎憲, 前議官 安鍾悳 등 宰臣들과 李舜範을 필두로 한 경향 각지 유생들의 반대 상소와 建白書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前秘書丞 尹秉, 前郡守 洪弼周, 前承旨 李範昌, 前主事 李沂 등은 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각성을 호소하였다.0223)金允植,≪續陰晴史≫하(國史編纂委員會, 1960), 권 11, 1904년 7월 12일. 이렇듯 상소를 통하여 황무지 개척권 이양에 반대하던 조신과 유생들은 좀더 강력하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輔安會를 조직하였다. 심지어 7월에는 平理院判事 許蔿 이하의 이름으로 된 일본 배척의 격문이 寧邊·安州 등지에 나붙었는데 특히 영변에서는 야간에 일본군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일본공사는 집회를 금할 필요를 느꼈으나 우리 정부에서는 격문의 주모자를 곧 방면하고 궁중에서 금전을 하사하여 집회의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0224)≪日本外交文書≫37-1, № 676, 명치 37년 7월 17일, 排日檄文ノ張本人處理ノ件.

1905년에 들어서도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계속되자 일본 헌병대는 경성과 부근의 치안권을 장악하였고, 1월 말에는 경무청이 고등경찰제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제 이 제도는 서울 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0225)≪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397∼401쪽. 이 가운데 崔益鉉은 일본의 경찰사무 집행을 비난하면서 臺諫制度 부활, 內藏院의 세금 축소, 輪對制度의 복구를 요구하였다.0226)≪高宗實錄≫, 광무 9년 정월 14일, 議政府贊政崔益鉉疏略. 그는 계속하여 “借款이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외국에 의탁하는 것이 반드시 화를 초래하리라”고 하였고,0227)≪高宗實錄≫, 광무 9년 2월 3일, 待罪臣崔益鉉疏略. 李址鎔 등 매국 역적 5, 6명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疏本이≪皇城新聞≫에 게재되니 일본공사 하야시는 최익현과 秘書院丞 허위를 엄중 처벌하고 이같은 행동이 전국으로 전파되는 것을 방지할 것을 요구하였다.0228)≪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453∼454쪽. 정2품 金鶴鎭은 “지금 시국이 날로 변하여 강한 이웃 나라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라 일을 처리하는 판인데, 옛날을 돌아보나, 오늘날을 살펴보나 지금처럼 남의 통제를 받은 적이 언제 있었겠습니까. … 8∼9년 이래로 중요 철도를 다른 사람에게 양여하고, 온 나라 광산의 이권도 다른 나라에 소속되었으며, 관제를 고쳐 바로잡고 화폐를 바로 고치는 일까지도 자체로 작정하여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개탄하면서, 외국 차관과 일본화폐 유통의 폐해, 일본군사령부의 한국인 소송 수리와 재판운영의 부정을 지적하고 그 개혁방안을 건의하였다.0229)≪高宗實錄≫, 광무 9년 3월 7일, 正二品金鶴鎭疏略. 이에 일본 헌병대는 11일 일본을 배척하고 한일의정서를 비난하여 경성의 안녕 질서를 파괴하였다는 구실 아래 최익현·김학진·허위를 헌병대에 구금하고, 궁성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날 오후 10시 경부터 헌병 25명을 궁성에 파견하였다.0230)≪皇城新聞≫, 광무 9년 3월 14일. 이후 최익현은 일본 헌병에 의해 抱川으로 강제 호송되었다. 이후 3월 22일 재차 상소를 위해 상경하였다가 일본 헌병에게 연행되어 定山으로 퇴거당했다.0231)≪皇城新聞≫, 광무 9년 3월 24·25·27일.

7월 29일에는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와 일본 수상 가츠라 타로(桂太郞) 간에 覺書가 성립되고 8월 12일 런던에서 제2차 英日同盟이 조인되었다. 또 9월 5일에는 포오츠머드(Portsmouth)에서 러시아와 일본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무렵 한국은 구미 열강에게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특히 제2차 영일동맹조약이 공포된 후로 유생들은 일제가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예견하고 이에 대한 저지운동을 국내외에서 전개하고자 했다.

러일전쟁의 종결과 사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담이 미국 포오츠머드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前注書 羅寅永과 前主事 吳基鎬·李沂는 이 회담에서 한국에 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미국 조야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호소하기 위하여 도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방해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90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청·일 3국이 동맹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한 선린의 交誼로서 독립을 보장하라고 역설하였다. 한편 이들은 일본 정부에도 서한을 보내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에 대한 모든 조약과 선언을 신의로 지키라고 요구하는 한편,0232)鄭 喬,≪大韓季年史≫하, 1905년 11월. 日皇에게 致書하여 한·일간의 여러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양국간의 이해를 說諭하였다.0233)위와 같음. 마침내 동경의 여러 신문에서 을사조약의 내용을 보도하자 나인영은 외부대신 朴齊純에게 급전을 보내 “목을 베일지언정 韓日協約에 동의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오기호 및 부모상을 당한 이기와 함께 다음해 2월 귀국하여 한층 격렬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大韓十三道儒約所의 유생 대표 金東弼·金錫恒·宋鍾潤·李侙 등 26명은 1905년 음력 9월 주한 각국 공사관에 公函을 보내어 그 동안 일제가 저지른 14개 죄목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는 國際公法에 어긋나는 것임을 논박하고, 일본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한국을 후원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0234)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1965), 90∼92쪽. 또 이들은 11월 10일 이토에게도 서한을 보내 한·일간의 여러 조약에 명시된 조항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시모노세키(馬關)條約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임을 분명히 확인하였고,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宣傳詔書에서는 한국의 독립 유지를 선언하였으며,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通牒辨明書에서도 한국의 독립이 공고하다고 하였으므로 일본은 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유생 대표는 일본공사 하야시의 횡포를 꼬집어 통박하고 시정을 요구하면서 한·일 양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도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하였다.0235)鄭 喬,≪大韓季年史≫하, 1905년 11월.

前參贊 郭鍾錫은 고종황제에게 올린 장문의 상소를 통하여 일제의 이권침탈과 전횡, 이토의 방한을 경계하고 한국의 처지를 “정사에 관한 지시를 내리는 것이 몽땅 주재한 大使와 顧問에게 달려 있고, 이른바 一進會의 패거리라는 것들이 또 그에 추종해서 상호 비호해 주고, 서로 배짱이 맞아 끝없이 명분을 어지럽히고 법을 문란하게 만들어도, 폐하와 정부의 각 부에서는 스스로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內治를 다질 것, 신의를 가지고 萬國·日本 등과 담판하여 화친에 관한 약조를 중하게 만들고 굳게 다져 동양의 안정을 보장하는 큰 계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하였다.0236)≪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5일, 前參贊 郭鍾錫 疏略 1·2. 이와 같이 을사조약의 체결 전, 유생들은 공함이나 서한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일간의 여러 조약에서 명시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일본은 실천할 것이며,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은 협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여,0237)崔永禧,<乙巳條約締結을 前後한 韓國民의 抗日鬪爭>(≪史叢≫12·13, 1968), 610쪽.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강대국들에게 한국의 지원을 호소함으로써 닥쳐올 보호조약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유생들이 보낸 공함이나 서한의 내용은 을미의병 당시 유생들의 斥倭運動 혹은 排日運動의 보수적인 경향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유생 자체가 이미 서구화 혹은 근대화의 사고방식을 지님으로써 국가관의 변화가 점차 일어나고 있었던 징조라고도 할 수 있다.0238)최영희, 위의 글.

11월 5일 일제의 주구인 일진회에서 전국민을 상대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대체로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망발이었다. 이에 대해 皇城基督敎靑年會·國民敎育會·大韓俱樂部·憲政硏究會 등은 선언문을 즉시 일진회에 돌려보냈고, 그외 여러 단체에서 선언문을 반박하였다. 정부에서도 일반 국민들이 현혹되지 않도록<告示民人>을 초안하여 발표하고자 했으나 警務顧問인 마루야마 시게노부(丸山重俊)의 반대로 발표하지 못했다.0239)≪朝鮮統治史料≫권 4(韓日合邦 2),<韓國一進會誌>, 광무 9년 11월 5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