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1. 유생의 상소 투쟁
  •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2)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일제는 무력으로 한국민의 반일운동을 강압하는 한편 회유와 매수로서0240)일본의 을사 5적 등의 매수는 崔永禧,<日本公使館記錄中, 韓日議定書 乙巳條約에 關한 資料>(≪編史≫1, 국사편찬위원회, 1964) 참조. 을사조약 늑결을 강행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강압하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곧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곧 국가의 멸망이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을사조약 반대운동은 곧 우리 민족이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에 굴종할 수는 없다는 결의에 찬 전국적이고도 전민족적인 투쟁이었다. 이 운동의 방향성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침략에 대한 항거와 열강에 대한 후원의 요청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친일 매국노에 대한 규탄과 민족의 실력양성으로 집약되었다.

한국민의 을사조약 체결 반대운동이 얼마나 극렬했는지는 오기하라 히데지로(萩原秀次郞) 代理公使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신문들이 한국의 보호 문제를 다룬 결과 “그 전에 어떠한 방어수단을 강구하기 위하여 開敎保生會·靑年會 등 단체 및≪코리아데일리뉴스≫등이 왕성하게 排日主義를 고취시킬 뿐 아니라 특히 주목할 것은 중추원의관들을 교사하여 대외조약의 訂結에 중추원은 관제상 당연히 참여하여야 된다는 건의를 시도하고 혹은 또 하층 인민을 선동하여 소위 의병을 각처에 봉기시키려는 魂膽으로 은밀히 궁중 및 일본 반대측에 획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였다.0241)≪日本外交文書≫38-1, № 11(255), 日本ノ韓國保護ノ措置ニ對スル韓國ノ反對運動ニ關スル件.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가장 먼저 조약체결에 반대의 입장을 보인 것이 전·현직 관리였다. 이들은 상소를 통한 투쟁을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자세한 진행과정과 상소문의 내용은 즉시≪황성신문≫·≪제국신문≫등의 언론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상소 투쟁은 언론계의 활동과 함께 을사조약 반대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조약의 무효와 매국노의 규탄을 부르짖는 내용의 상소문은 전국 각지에서 쇄도하였다. 특히 趙秉世·崔益鉉·閔泳煥·沈相薰·閔秉奭 등 원로대신들의 상소운동은 전국적으로 배일감정을 크게 자극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이 늑결되려는 11월 17일 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고종황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친히 불러 거절하는 것이 최후의 방법이라 믿고 황제를 알현하여 그 뜻을 상주하였다가 조약 체결 후 면직처분을 받았다. 19일에는 궁내부의 특진관 李根命이, 20일에는 秘書監卿 李愚冕이 조약 체결시 토의에 참여했던 모든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0242)≪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19일, 宮內府特進官李根命箚略·11월 20일, 秘書監卿李愚冕箚略. 또 의정부참정 李相卨이 고종황제에게 조약의 폐기와 매국 賊臣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조약 체결에 참여한 대신들을 단호히 징벌하여 국헌을 바로잡고 인재를 등용하여 조약의 폐기를 만방에 공포하기를 간청하였다.0243)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94쪽.≪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 이상설의 상소문을 게재하고 극구 찬양하면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21일에는 외부대신 朴齊純의 친척인 정2품 朴箕陽과 社稷署提調 朴鳳柱가 상소를 올려 매국 역적을 처단하고, 외부대신을 새로 임명하여 각국이 조약의 불법성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0244)≪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21일, 正二品朴箕陽疏略·社稷署提調朴鳳柱疏略.

한편 가평에서 신병을 요양하고 있던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는 조약 늑결의 소식을 듣자 “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世臣으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신병을 무릅쓰고 즉시 상경하여 23일 고종황제를 접견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5개 조항이 모두 나라의 존망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한두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지도 옛 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나라를 남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 임금과 법을 멸시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주관해서 토의한 박제순을 빨리 나라의 법으로 다스려서 세상에 사죄시키며, 그 때 회의에 참가하였던 각 부의 대신들을 모두 우선 본래의 관직에서 파면시키고 法部에서 구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죄목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지시하여 그 문건을 회수해 없애버리고 반드시 剛毅하고 정직한 신하를 외부장관으로 임명하여 그 의안은 시행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각국 공사관, 영사관들에 설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시문을 써내려 보내기 전에 신은 물러갈 수 없으며,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라리 대궐 섬돌에다 머리를 쪼아 죽을지언정, 의리상 차마 살아서 대궐문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폐하는 빨리 처분을 내려서 500년 동안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을 보존하기 바랍니다(≪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23일, 原任議政 趙秉世 召見).

이 조병세의 상소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뒤를 이어 중추원의장 閔鍾黙을 비롯하여 尹斗炳·朴齊斌·李裕承·丁明燮·曺世煥·高翊相·金鍾護·尹泰榮 등의 상소가 잇따랐다. 또한 유생들은 서울에 大韓十三道儒約所를 두고 21일과 24일 두 차례의 상소문을 올렸다. 24일에는 이근명과 이상설이 재차 상소를 올렸다.

다음날 法部主事 安秉瓚은 직접 입궐하여 상주문을 올린 후 도끼를 메고 大安門 앞에 엎드려 황제의 회답을 기다렸다. 그는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을 매국 5적이라고 지칭하면서 머리를 잘라 거리에 매달아야 한다는 극렬한 상소를 올렸다가 경무국에 구금되었다. 또한 전날 상소를 올렸던 사람들 외에 중추원찬의 李乾夏를 비롯하여 徐相喬·李鍾泰·鄭鴻錫·高鼎柱·申性均·姜遠馨 등이 소를 올렸다.

26일에는 조병세를 필두로 趙秉式·洪祐晳·李漢英·丁明燮·安鍾和·李容泰·朴齊璜·尹秉綬·閔泳奎 등이 입궐하여 매국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주청하였다. 특히 시강원시독 박제황은 만국공법의 내용을 들어 상소하였다.

만국공법 제98장에는 ‘횡포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주적인 자립권을 침략하여 빼앗았을 경우 모든 나라들이 호응하여 들고 일어나 구원한다’고 하였으며, 제405장에는 ‘갑자기 조약을 의논해서 그 조약에 手票한 것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책임이 없고, 반드시 국왕의 승인을 받아야 시행할 수 있으며, 그 조약이 아직 비준되지 않았을 때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으면, 해당 국가의 편의에 따라 폐기할 수도 있고 그대로 준수할 수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제406장에는 ‘해당 국가는 비준이 없게 되면, 그 조약을 즉시 휴지로 만들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제409장에는 ‘아무리 국왕이 직접 수표를 하였다 하더라도, 만일 다른 사람의 협박을 받아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한 것이면, 그 조약 역시 폐지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415장에는 ‘조약을 맺은 일이 나라를 망치는 것과 같거나 혹은 해당 국가를 압박하여 쇠약하고 발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면 포기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26일, 侍講院侍讀朴齊璜疏略).

박제황은 만국공법의 내용에 비추어 이 조약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저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횡포하고 침략하여 빼앗으며, 급박하게 굴고 위협하고 압박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임금의 승인도 비준도 또 직접 수표도 하지 않았으니, 폐기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모든 나라들이 들으면, 역시 함께 일어나 구원할 것입니다. 폐하는 下命하여 이른바 ‘條約條文’을 폐기하고 회수해다가 없애기 바랍니다”라고 하여, 조약폐기를 촉구하였다.

이와 같이 원로대신들을 중심으로 한 상소운동이 전개되자 조약반대 운동은 민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商業會議所의 결의로 서울 종로의 六矣廛이 철시하였고, 이에 자극받아 시내 전 상가가 속속 철시를 행해 조약의 파기와 매국 행위에 대해 간접으로나마 항의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의 학생들도 자진 휴학을 단행하여 항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의 경무고문인 마루야마는 경찰을 동원하여 철시한 상가를 방문, 개점을 강요하고 각급 학교에도 훈령을 내려 개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상인과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항쟁을 이어갔다.

26일 주청한 상소문이 아무런 소득이 없자 조병세는 27일 다시 원임의정부대신 자격으로 내부·경무청 등 각부에 牒示를 보내 각 관리들을 궁내부로 모으고 李根命·沈相薰·閔泳煥·趙東潤·金思黙·閔種黙·金秉煥·李鍾健·崔英夏·李裕寅·李容泰·李相卨 등을 이끌고 재차 상소를 올려, “시일이 경과하면 호흡지간에 국가 대사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속히 처분하여 일을 바로 잡을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조병세는 이 날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을사조약이 일본 군사력의 위협하에 늑결된 것으로 국제공법에 위배되니 정의와 公理에 입각하여 조약을 자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공한을 보냈다. 그리고 영국·독일·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 5개국 공사관에도 공한을 보내 각국 공사들이 회동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포하도록 호소하였다. 이외에 洪在鳳·李根秀·洪淳馨·朴定陽·李渭來 등이 상소를 올렸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며칠 계속된 대신들의 복합상소에 대하여 고종황제는 疏頭라고 할 수 있는 조병세와 이근명에게 상소의 내용에 대해 “참작하여 헤아린 바가 있다”고 하면서 귀가할 것을 종용하였다.0245)≪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27일. 그러나 조병세·이근명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門外出送시키도록 하였다. 결국 조병세의 활동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0246)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102쪽. 28일 대안문 앞에서 일본 헌병 수십 명에게 체포당할 때 조병세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을 향하여 격앙된 어조로 을사조약 늑결의 불법성을 설파하여 이를 들은 시민들이 모두 통곡했다고 한다. 한편 崔在學·李始榮·田錫俊 등 평양청년회원 5명이 대안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리다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70여 일만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격렬한 상소운동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상황이 한층 악화되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에게는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임명하고 칙임관 1등을 주었으나, 李愚冕 등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조병세와 이근명은 석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 백관들은 민영환을 疏頭로 다시 고종황제에게 연명으로 상주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 조약의 철회와 구속 대신들의 석방을 요청하였고, 李商永을 비롯한 성균관 교수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공사와 李址鎔 등의 책동으로 구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平理院으로 쇄도하자 일제는 하는 수 없이 이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어 상소운동을 전개하던 이근명·尹泰興 등도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29일에는 前司憲府監察 崔東植이 평리원에 을사조약을 체결한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고발장을 제출하였으며, 前贊政 최익현이 매국5적의 죄상을 통렬히 규탄하고 일본의 신의 없음을 들어 조약의 취소를 강력히 주장하는 상소문을 두 차례에 걸쳐 올렸다. 그는 매국 5적들이 하룻밤 사이에 국토와 민족을 왜적에게 팔아먹었다고 痛疏하고, 5적들을 五車刑, 그의 10族을 도륙하여도 분을 풀 수가 없다고 강력히 상소하였다.0247)≪高宗實錄≫, 광무 9년 11월 29일, 未死臣崔益鉉疏略.

이와 같은 최익현의 상소와 더불어 30일에는 민영환이, 12월 1일에는 조병세가 을사조약 늑결에 분개하여 자결하자,0248)을사조약으로 인한 순국항쟁에 대해서는 申載洪,<主權守護運動>(≪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84), 240∼244쪽 참조. 이어서 여러 사람들의 상소운동이 계속되었다. 12월 1일 박제순을 대신하여 외부대신대리에 임명된 協辦 尹致昊도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잘 다스리기 위한 일을 도모하며, 토목공사를 걷어치우고 간사한 무당 무리들을 내쫓으며, 궁방의 개인창고의 가렴주구를 엄하게 징계하고, 궁녀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스스로 강해지는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있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힘쓸 것입니다”0249)≪高宗實錄≫, 광무 9년 12월 1일, 外部大臣代理協辦尹致昊疏略. 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1905년 말까지 학부주사 李相哲, 上等兵 金奉學, 前贊政 洪萬植 등이 자결하였으며, 다음해 4월에는 경연관 宋秉璿이 자결하였다. 상소운동도 계속되어 영돈녕부사 심순택, 궁내부특진관 이근명 등이 疏頭가 되어 12월 7일까지 백관을 이끌고 연명으로 상소한 것이 7차에 이르렀다.0250)≪高宗實錄≫, 광무 9년 12월 7일, 宮內府特進官李根命率百官庭請奏.

이후에도 沈舜澤·李愚冕·朴鳳柱·姜遠馨·安鍾和·尹斗炳·鄭載憲·郭鍾錫·田愚 등이 상소운동을 계속하였고, 또한 權在重·李東暉·李載允·金奭鎭·李承熙 등도 조약의 폐기와 매국노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이완용 등 을사5적도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입장을 강변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취지에 대하여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전대로 이며, 종묘사직은 안전하고 황실은 높고 엄숙한데, 외교에 대한 한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 나라가 부강해지면 돌려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연원은 지난 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이미 이룩된 것을 결속하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여, 마치 을사조약 체결 후에도 국가의 독립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고 한일의정서 등에 의해서 규정된 한일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정도의 조약처럼 둘러대었다. 그리고 을사조약 반대운동에 대하여 “반대를 하려면 그 때에 반대했어야 했을 것이며, 극력 반대했어도 안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을 것이고, 들고 일어났어도 안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한 사람도 이런 의로운 행동을 했다는 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반대운동은 국교문제에 감정만 야기시킬 뿐이라고 하여 운동을 일소에 붙이고 있다. 또한 자신들뿐 아니라 회의에 참여한 대신들도 말로만 반대하고 끝내는 개정한 일에 힘을 다하였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책임이 아니며, 고종황제가 관대히 용서하여 파면시키지 않고 피혐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죄가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0251)≪高宗實錄≫, 광무 9년 12월 16일, 議政府議政大臣學部大臣李完用, 參政大臣朴齊純, 內部大臣李址鎔, 農商工部大臣權重顯, 軍部大臣李根澤等疏略. 이에 대하여 宋秉璿, 충청도 관찰사 李道宰, 郭鍾錫·吳炳序 등이 이들의 궤변을 조목조목 공박하면서 처벌을 주장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시작된 상소운동은 1906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을사조약 반대운동에 대한 열기가 식어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은 그 동안 전개하였던 상소운동이 소극적 운동이었고 이를 통해서는 요구가 관철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의병활동이나 매국노의 암살 등 적극적이고 폭력적 투쟁으로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 직후 萬言疏 奉呈 등의 논의가 나오기는 했지만 상소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것은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상소를 통한 항거는 소극적이기는 하였으나 봉건적 사회 속에서 더욱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하에서 유교적 교양을 갖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정부에 자신의 입장을 표시할 수 있는 일차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상소운동의 의의는 무엇보다 국민의 의사를 표시하고 항일정신을 촉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0252)최영희, 앞의 글(1968), 615쪽.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 상소운동을 통하여 현실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이미 일제의 간섭 속에서 대신과 관리의 임명조차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고종황제가 을사조약 무효화를 선언하고 자의적으로 조약 체결에 동의한 대신들을 처벌한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현직 관리들과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릴 때마다 소극적인 반응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은 상소를 통하여 만국공법상의 부당성을 지적하면 각국의 공사들이 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조약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으로 믿었으나 이는 국제적인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열강은 이미 여러 조약을 통하여 일본의 불법적인 침탈행위를 묵인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고, 일본은 기민하게 을사조약의 내용을 변조 번역하여 통지함으로써 각국으로 하여금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0253)李泰鎭,<조약의 명칭을 붙이지 못한 을사보호조약>(≪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조약강제>(≪한국사시민강좌≫19, 일조각, 1996).

그러나 고종황제 역시 상소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편으로는 조약체결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 상소의 내용과 같이 열강의 협력으로 일제의 불법적인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생들의 잇따른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은 여러 한계 속에서도 반일운동을 선도하고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할 것이다.

<崔昌熙>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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