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2. 시민의 투쟁
  •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3) 시장세 반대운동의 전국적 확산

순천·용천·영변·안주 등지에서 거세게 일어난 시장세 거납운동은 곧바로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에 대해 일제는 헌병과 순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한편 또다른 소요발생에 대해 엄중히 경계하면서 개시에 대한 효유와 시장세 징수를 강행하였다.

順安에서는 시장세 반대운동과 반일운동이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시위운동에 대한 즉각적이고 강경한 진압을 위해 헌병 상등병 4명과 보조원 8명으로 헌병대 임시출장소를 개설하고 있었다. 숙천군 재무서에서는 순천군의 소식을 듣고 그 고을에도 그러한 사태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시장세를 징수하지 못하고 시민의 행동만 엄밀히 조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을 정도였다.0270)≪京鄕新聞≫, 1910년 2월 11일.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2월 중순 경에는 시장세 징수를 둘러 싸고 각 지방에서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대한매일신보≫1910년 2월 중순 경 기사에는 평안도내 많은 지방에서의 場稅拒納 시위운동에 대해 싣고 있는데 선천·박천·증산 등지에서도 시장세 징수를 강행하려 하였으나 한 푼도 징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평북 泰川 지방에서도 상민들이 시장세 징수에 반대하여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시장관리인에게 “시장관리인 된 한국인아 너의 職을 사직하라. 다만 죽음으로써 그 직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관리인 됨이 가하니라. 관리인의 부모처자 된 자도 이를 생각하라”는 요구를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가자, 시장관리인 중에 사임하는 자도 있었다. 태천에서의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일제는 안주분견소에서 헌병 1명과 보조원 6명을 파송하여 또다른 시위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였다.0271)≪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0일.

시장세가 상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인들에게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은 징수과정에서의 중복 과세 등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는 그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장세 사건으로 각 지방 인민이 苦叫呼號함은 人所共知어니와 원래 此 시장세는 重複의 稅를 課함이니 즉 시장 매매는 생산자 소비자의 매매뿐 아니라 영리를 목적함이 多하야 一物品으로 數市場에 轉輾하거늘 此를 每市 課稅하면 즉 一物品에 대하여 甲시장에서도 과세하고 又其물품이 乙시장에 入하면 乙시장에서도 과세하고 又丙시장에 入하면 丙시장에서도 과세하고 又丁시장에 入하면 丁시장에서도 과세하는지라. 如斯不已하면 필경 민간에 大反抗이 起하리라고 당국에서도 우려한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23일).

즉 한 가지의 물품을 가지고 여러 곳의 시장을 순회하는 상인의 경우 가는 곳마다 시장세를 징수당하고 있어서 큰 반대시위가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시장세 징수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한편 지방세의 징수에 대한 불만을 줄이기 위해 우선 이에 대한 당위성을 알리고, 시장세의 징수방법도 그 세액과 부과방법을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들은 대개 시장세 반대시위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응급조치였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시장세 징수방법의 변경과 개시에 대한 효유, 그리고 삼엄한 경계하에서의 징수 등으로 시장세를 징수하고자 하였으나 장세거납운동의 여파는 각 도로 파급되어 거의 전국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충청도 회인군 동면 車嶺里에서는 시장세 문제로 200여 명의 민인이 회집하자 회인과 보은의 헌병분견소에서 헌병과 경찰 등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0272)≪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3일. 강원도에서도 시장세와 합방 등의 소문이 팽배해 혹시 시위나 폭동이 있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하여 시장세문제로 인한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0273)≪京鄕新聞≫, 1910년 3월 4일.

전북 지방에서도 시장세 징수로 동요의 움직임이 보이자 사전에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헌병 및 경찰, 재무관리 등을 동원하여 다방면으로 說諭하는 방법으로 사태를 무마시키고 있었다.0274)≪皇城新聞≫, 1910년 2월 27일. 그리고 순천의 시장세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전 전라도 지역의 負商이 평안도 지방을 왕래하면서 순천의 상인들에게 시장세의 불합리함을 고취시켜 배일사상이 더욱 커지고 나아가서는 징세에 반대한다는 연판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0275)≪順川暴動事件綴≫, 평안남도 觀察道 主事 江阪正功이 관찰사 李軫鎬에게 보고한 내용.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전라도 지역에서도 시장세 징수에 대한 반발이 심각했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강화군에서는 시장세로 민인들 사이에 불평의 소리가 많아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함경도 惠山鎭 및 端川에서도 시장세로 민인들의 반항이 자못 강하였다. 단천 派道面 南里市에서는 시장세 문제가 생긴 이후로 市況이 적막해질 정도였으며, 安岳 椒井시장에서는 2월 이래 장이 5회 열렸지만 계속 납세를 거부하였고, 谷山邑場에서도 불평의 소리가 크게 일어났다고 하였다.0276)≪大韓每日申報≫, 1910년 4월 6일.

함경도 지방은 3월 초까지만 해도 시장세반대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제의 설득과 무마로 겨우 평온을 되찾고 있었는데,0277)≪皇城新聞≫, 1910년 3월 9일.
≪京鄕新聞≫, 1910년 3월 18일.
4월에 들어서는 이 지방에서도 시장세 납부를 거부하는 등 적극적인 방법으로 반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安州 지방에서는 시장세반대의 중요 혐의자로 수명이 체포되어 투옥된 이유로 이 지역 상민들은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시장을 열지 않기로 하고 市廛을 철폐하였다. 이후 3월 3일에 다시 개시하였지만 行商들이 모여들지 않고 坐商들 역시 평소의 1/3정도만 모이는데 불과하였는데 안주의 재무서 관리는 경계를 엄중히 한 후 징세를 실시하였지만 5원 5전을 거둬 들이는데 그칠 정도였다.0278)≪皇城新聞≫, 1910년 3월 12일.

황해도 황주에서는 시장세 징수로 인한 분쟁이 일어나 장시개설이 여의치 않자 곡물의 매매를 거의 대부분 시장 바깥 도로변이나 혹은 촌락에서 행함으로써 시황이 침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읍내 居民과 客主店 등은 식료품의 결핍으로 곤란이 극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방비법>이 실시된 이후로 각 지방의 장시에서는 시장세 징수에 반대하여 시위가 빈번하게 전개되었고, 撤市하는 곳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物貨의 유통도 원활하지 못하여 지방 장시가 쇠퇴하게 되자 상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지방장시가 지역 주민들의 生理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이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시장의 개시를 회유하는 한편 식민지 지배의 재원확보를 위해 지방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시장세 징수를 강행하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상인 혹은 일반인들의 시위운동에 대해 일본도 헌병, 경찰 등으로 강경하게 진압 또는 엄중히 경계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병행하여 한발 물러나 이들을 설득 또는 회유하는 방법으로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1909년 12월부터 1910년 4월에 이르기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일어난 시장세 반대운동은 일제의 강경한 대응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국권이 침탈되어 가는 때에 경제적 자주권수호와 국권수호운동의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위운동을 통해 일반 민중들은 그들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음도 확인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보다 큰 힘의 결집으로 나타나 일제하에서의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金大吉>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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