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1)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배경

1904년 2월 10일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23일에 이른바 韓日議定書를 체결,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일본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對韓侵略政策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의 樞密院議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3월 17일 서둘러 來韓, 10일간 체류하며 韓國政情을 검토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이토에게<對韓私見槪要>를 제출하였다. 하야시는 일본 농민이 한국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장하려고 건의하는 자가 많지만, 토지소유권을 허용할 경우에 실제로는 외국자본가가 농단하게 될지도 모르므로, 다만 경작 기타의 地上權의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방침을 취하여 농사에 관한 일본의 이권을 부식하고, 한국의 생산력을 增益하는 편이 적의하며, 혹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 황무지의 개척권을 얻을 수 있는 好機가 있으면 실행하도록 하고, 그 경영은 일반 私人만이 專任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정한 방침에 의해 이익을 일반에게 미치도록 계획할 것을 이토에게 건의하였다.

이토는 하야시의<대한사견개요>를 대체로 채택하여, 대한정책과 그 실천 방안을 일본 정부에 건의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對韓施設綱領>속에 拓殖方案을 확정하고,<對韓方針>·<對韓施設綱領>·<對韓施設細目>등의 한국 경영방안을 마련, 1904년 5월 말에 閣議를 거쳐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

<대한방침>은 한국에서 정치·군사적으로 보호의 實權을 거두고 경제적으로 일본의 이권을 발전시킬 것을 규정하였다. 이<대한방침>은 한국을 보호국화는 물론 장차 병탄하겠다는 전제하에, 당면의 급무로서 정치·군사적으로 실질상 예속관계를 성립시키고, 경제상 이권을 탈취하여 식민지화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대한시설강령>·<대한시설세목>은 일제가 국방·외교·재정·교통·통신·척식 등에서 실천할 방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었다.

일제는 대한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일제가 탈취하려 한 중요한 이권의 하나였다.0279)尹炳奭,<日本人의 荒蕪地開拓權 要求에 對하여-1904年 長森名儀의 委任契約企圖를 中心으로->(≪歷史學報≫22, 1964;≪近代 韓國民族運動의 思潮≫, 1996, 集文堂). 그들은 한국에서 일본인 기업으로 가장 유망한 것은 농사라고 단정하였다. 일본의 과잉 인구를 이식시킬 수 있는 땅을 얻고, 부족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일거양득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일본 농가를 위해 한국을 개방시키는 수단으로 두 가지 대책을 설정하였다. 하나는 일본인 개인의 명의로 한국 정부로부터 官有 황무지를 경작 및 목축할 수 있는 특허나 위탁을 받고, 그것을 일본 정부의 관리하에 일본인이 경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1里 이외일지라도 民有地를 경작 또는 목축 등의 목적으로 일본인이 매매·임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內地를 일인에게 개방시키고 그들의 토지소유를 인정케 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외무성은<대한시설강령>에 의거,<대한시설세목>을 작성해서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훈령하였는데, 그 세목 제7항에서 官有 황무지의 경작 및 목축권은 한 개인의 명의로 소득하여 상당한 자본가로 하여금 실지 경영하게 할 것이고, 민유지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명의의 여하를 묻지 않고 실제 매매 임대할 수 있게 하도록 하였다.

척식계획의 대강을 밝힌<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을 그들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로 확대하고 공업생산품의 판매시장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보다 본격화한 것이며, 일인을 한국에 식민하여 과밀한 인구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하나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일본 農商務省은 이미 3월까지 3만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농업과 토지 전반에 척식조건을 조사시키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농상무성은 外務省과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전달한<韓國農業調査의 件>에서 척식상 유리한 점과 구체적인 척식계획을 제시하였다. 한국에는 아직 경작하지 않지만 경작 가능한 141만 정보의 토지가 있고, 농민 700만이 농사로 생활할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이민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인구밀도가 일본·중국보다 적으므로 개척의 여지가 많고, 풍토나 산수가 일본과 유사하여 이민들이 곤란을 느낄 바 없으며, 일본인은 건강·지능·자본에서 한국인 보다 우수하므로, 순종한 한국인을 이용하고 편달하면 사업에 더욱 便宜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토질도 米·麥·豆·菽 등의 곡물 생산에 적합하여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적당하고, 건조한 기후와 경사지를 이용하면 일본보다 더 좋은 綿·麻 등을 생산할 수 있으며, 地價 또한 저렴하여 군사상 필요한 牛馬의 축산에도 용이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식민지경영에 필요한 자금 일부를 한국의 未耕地 개척에서 增收되는 地租의 수입 등으로 현지 염출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되었다.0280)尹炳奭,<일제의 荒蕪地開拓權 요구와 한국민의 투쟁>, 위의 책, 79∼89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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