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2) 황무지개척권의 요구

일본 정부는 1904년 6월 6일에 주한공사 하야시를 통하여, 한국 外部에 황무지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양여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大藏省 官房長을 역임한 나가모리 토키치로(長森藤吉郞)는 이미 密令을 받고 1월부터 한국에 와서 對韓經營方案을 조사·연구하고, 한국 宮內府와 극비리에 교섭하여 예비 공작을 진행하여 왔다. 나가모리는 하야시와 협의하에 1904년 1월 하순경에 淸安君 李載純과 회견하고, 한국 황실의 위엄을 영원히 保維하고 王基를 萬世에 확립하려면 왕실재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전국 황무지를 개간하여 궁중에서 收稅하는 재원으로 만들고, 酒·煙草·鹽·鑛物 등을 전매로 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황무지개척권과 아울러 술·연초·광물 등의 전매 위임도 일본에 크게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위임계약안을 작성하여 교섭을 추진시키려 꾀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지 않고, 이재순이 3월 2일 急逝하였으므로 더 진전되지는 못했다. 나가모리는 3월에 議政府參贊 權重奭에게 황무지개척권의 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비밀로 체결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宮內府大臣 閔丙奭의 반대로 계약은 체결되지 못했다.

하야시는 5월에 이르러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에게 황무지개척권 위임계약을 비밀리에 교섭하는 것이 時宜에 맞지 않다고 건의하고 직접 자신이 나섰다. 자신이 수정한 계약안을 가지고 직접 한국의 몇몇 대신들을 만나 나가모리를 소개하고, 계약안을 설명하였다.0281)尹炳奭, 위의 책, 89∼91·100쪽. 그리고 외무대신의 훈령에 의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위임계약안을 6일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하야시는 공문에서 개척권 요구자의 명의는 나가모리로 하고, 자신은 공사의 입장에서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요구가 일본의 對韓拓殖政策의 일환임을 숨기고, 나가모리 개인 자본으로 결행하려고 신청한 것으로 내세웠다. 이를 자신이 추진하는 것은 황무지개척이 부국증진의 제1책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나 국민이 버려두고 있으며, 더욱이 개척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구비하지 못한 처지이므로, 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0282)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1970, 117쪽. 하야시는 고종에게, 황무지개척은 경지면적의 확대와 곡식의 증산, 국고수입의 증수, 곡물의 외국수출 증가, 유민의 생업과 양민의 부유를 성취할 것이라고 아뢰었다.0283)尹炳奭, 앞의 책, 94쪽.

일본은 겉으로는 모든 황무지를 궁내부 御供院에 편입시키는 전제 아래, 御供院卿이 국왕의 명에 따라 나가모리에게 개척권을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미 1904년 5월 19일에 황무지 등의 개척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궁내부 소속의 어공원을 설립하였다. 앞서 5월 15일에 奉常司提調 鄭日永은 고종에게 상소하여, 황무지개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외국의 예를 본받아 하나의 院을 설치하여 황실에 소속시키고, 정밀한 기계와 새로운 耕作法을 다른 나라에서 본받아 灌漑하고 땅을 개척해 나간다면, 나라를 부강하게 할 근원이 될 것이라고 건의한 바 있었다.0284)≪高宗實錄≫, 광무 8년 5월 15일, 奉常司提調鄭日永疏略. 이를 받아들여 어공원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日本農具株式會社 사장 나가모리가 주한일본전권공사 하야시를 통하여 6일에 외부에 제출한 황무지개척권 위임계약안은, 제7조의 “본 계약은 경영에 착수하던 각 부에 대해 경영완성 후 50년간을 유효로 하되, 기한에 이르러 상호협의로 다시 계속 행할 수 있을 것” 등 총 10개 조로 되어 있다.0285)≪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117∼120쪽. 이 계약안은 한국의 산림·천택·진황지의 개척권을 50년간 장기 대부하는 特許契約을 요구한 것으로, 우리 영토의 1/4이나 되는 황무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영구히 일본에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계약안을 통해 일본인을 대량 이주시키고 한국을 그들의 식량 및 원료의 공급지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50년 후에 반환이란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고 영구 점유를 도모하였다. 계약안에서 50년간 借貸라고 조건을 명시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국 정부나 국민의 반대가 강할 것으로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한일의정서의 체결에 협력한 친일내각이었지만, 乙未事變 후 배일감정이 심화된 고종이 정부를 인도하고, 국민들은 한일의정서 늑결에 대해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토의 요구나 다름없는 황무지의 영구 점유를 요구할 생각은 갖지 못하였다.

둘째 토지소유권을 일본인이 장래 독점하여 인정받으려는 정략적 고려를 하였다. 일본은 내정을 간섭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외교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일본이 한국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는 계약을 맺을 경우, 淸·英·美 등도 기회균등을 내세워 한국의 토지소유권 인정을 주장할 것으로 우려하였다. 장래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가진 일본은 외국의 세력확장 기회를 미리 차단하려 기도하였다.

요컨대, 이 위임계약안은 한국의 황무지경영권을 탈취하여 그들의 식량 및 원료의 공급지로 만들려는 획책이며, 한국의 토지를 점유한 다음에 소유권을 침탈하려던 의도였다. 개척권 요구자를 나가모리의 개인 명의로 한 것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속히 처리하려는 ‘신중한 思慮’에서 나온 편의상 조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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