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3.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
  •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4)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철회

보안회 집회에서 군중과 일본 군경이 충돌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민심 수습에 나섰다. 외부는 22일 저녁에 일본공사에게 한어학교에서 보안회 회원 4인을 일본 군경이 포박해 간 것을 항의하고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이튿날에도 일본공사에게 조회하여, 22일 하오 7시에 종가 民會에서 일본 군경이 이범석 등 3인을 붙잡아 가고, 특히 상해로 피를 흘리는 신형균을 들것에 태워 갔으며, 23일 아침 9시에 朱興均을 붙잡아 간 것 등은 심히 경악할 일이라고 항의하였다. 송수만·원세성·신형균 등을 즉시 우리 정부에 還付하라고 요구하였다.

일본은 군사를 주둔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외부가 진황지개척 요구를 거절할 뜻으로 공문을 보내자, 23일에 일본공사는 외부에 되돌려 보내고, 보안회의 단속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황무지개척안을 외부대신과 만나 和衷하여 처리하자고 제안하였다.0339)≪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32·237∼241쪽.
≪皇城新聞≫, 1904년 7월 25일, 잡보<繳還外照>.

한국 정부는 집단적인 배일투쟁을 설득으로 해산시키려 노력하였다. 의정부는 23일에 각 坊曲에 고시하여, 황무지개척을 일인에게 讓借하지 않을 것이니, 집회를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지시하였다. 24일에는 내부가 수원·충남·평남·평북·경남·경북에 유시하여, 산림·천택·진황지 사안은 정부가 모두 인허하지 않기로 고시하였으니, 관하 부·군의 인민이 만약 취회하면 모두 해산케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순검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종로의 상인들에게 철시를 금하고 開市하라고 효유하였다.0340)≪皇城新聞≫, 1904년 7월 25일, 잡보<政府告示>·<曉諭解散>·26일, 잡보<諭禁撤市>.

외부는 여러 차례 송수만·송인섭·원세성 등을 내보내라고 요청하였다. 일본공사는 법률로 징계한다면 송수만·송인섭을 인계하겠다고 응답하였다. 경무사 申泰休는 원세성도 함께 보내라고 요청하였으나, 일본공사는 원세성이 사령부에 구류되어 자신의 직권이 아니라고 회피하였다.0341)≪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45∼246쪽.
≪皇城新聞≫, 1904년 7월 27일, 잡보<兩宋移囚>·30일, 잡보<一放一囚>및 8월 1·4일, 잡보<宋氏供案>.

외부는 진황지의 개척 사안을 거절하는 공문을 일본공사관에 보냈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외부에 격환하여 인허를 강요하였다. 외부는 26일에 다시 공문을 보내, 사건을 강제로 요구하여 민심이 비등해지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고, 개척안을 조목별로 반박하고 절대 다시 제안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통보하였다.0342)≪皇城新聞≫, 1904년 7월 27일, 잡보<外部又照>·28일, 별보.
≪舊韓國外交文書≫7(日案 7), 247∼249쪽.
그리고 27일에 진황지 개척의 約稿와 일본공사가 반환한 공문을 모두 일본공사관에 다시 반환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즉시 통역관 墟川을 李夏榮의 사제에 보내 격환한 照復과 約稿를 송치케 하고, 외부대신이 出仕하는 날에 만나서 서로 절충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통보하였다.0343)≪皇城新聞≫, 1904년 7월 29일, 잡보<日又繳照>.

내부는 27일에 13도에 훈령하여, 일인에게 寸尺의 땅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니, 전국의 진황지에 일인이 표목을 표시하는 일이 있으면, 해당 군에서 먼저 금단하고 내부에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0344)≪皇城新聞≫, 1904년 7월 28일, 잡보<內部訓令>.

7월 30일에 참정 심상훈과 외상 이하영이 칙명을 받들고 일본공사관에 가서 하야시공사와 진황지 개척사건에 대하여 담판하였다. 일본공사는 다시는 황무지 개척안을 제의하지 않기로 하였다.

일본 정부는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더 이상 강행하지 않고 철회하였다. 그것은 첫째 이를 계속 강요한다면 한국민의 배일감정을 더욱 악화시켜, 앞으로의 한국경영에 장애가 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 정부가 비등하는 公論에 밀려, 결코 한 치의 땅도 외국인에게 讓借하지 않겠다고 성명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으므로, 만약 개척권을 계속 요구한다면 한국 내각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 대신은 거의가 공론의 규탄 대상이 되고, 특히 외부대신은 사직서를 제출해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8월 1일에 본국 외무대신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개척안 요구를 일시 철회하자고 건의하였다. 한국 정부는 8월 2일에 헌병사령관 李址鎔을 일본공사관에 보내 好誼에 감사하였다. 3일에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공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 정부가 원칙에 있어서는 일본의 요구를 승낙하고 농광회사에 대한 정부의 특허를 취소한다는 조건하에, 일단 개척안 요구를 철회하라고 回訓하였다. 한국 정부와 주한공사 하야시가 10일까지 교섭한 결과, 한국은 일본의 조건을 수락하고, 일본공사는 어느 시기까지 이 안을 요구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0345)≪皇城新聞≫, 1904년 8월 1일, 잡보<陳荒案歸正>·<御供院廢止>및 4일, 잡보<荒蕪案歸決>.
尹炳奭, 앞의 책, 119쪽.

그런데 8월 20일에 산림·천택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일본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황무지 개척문제로 교섭 중이라는 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일시 해산하였던 보안회는 27일부터 다시 典洞의 立廛都家에 續設하고, 李敎魯가 會長이라고 공포하였다.0346)≪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20일, 잡보<사와션긔>.
≪皇城新聞≫, 1904년 8월 27일, 잡보<保安會續>.
황용성·이건석 등은 27일에 보안회를 다시 개회한다고 고시하였으나, 미비하여 29일 하오 1시로 회기를 연기하였다. 다시 보안회를 개회한 목적은 황실 안녕, 국체 존중, 독립 공고, 민지 발달, 정치상 방침 충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언로를 널리 열어 민정을 상달한다는 것이었다.

29일 하오 1시에 70여 명의 회원이 입전도가에서 개회를 준비하였다. 일본 헌병 4, 5명이 와서 회장 李建奭을 일본 사령부로 끌고갔다. 헌병들은 보안회의 문부와 규칙 그리고 방망이를 모두 수탐하여 가고 선전도가의 앞뒷문을 지켰다.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해산하였다.0347)≪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30일, 잡보<보회>·31일, 잡보<회쟝피착>.
≪皇城新聞≫, 1904년 8월 30일, 잡보<保會被招>.

일본사령관의 조사에서 이건석은 보안회의 主旨를 실상대로 설명하였다. 사령관은 회의 주지가 일진회보다 좋다고 찬성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일본을 배척하던 보안회란 이름을 고치고 일본군사령부에 설립 인허를 받으라고 강요하였다. 이건석은 다른 會는 비록 인허를 받았으나, 보안회는 자유로이 행동하겠다고 주장하고 돌아왔다. 보안회에서 의논하여 協同會라 개명하고, 곧 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0348)≪皇城新聞≫, 1904년 8월 31일, 잡보<改名設會>.
≪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31일, 잡보<갱회명>.
그리고 취지서를 정부에 보내 개회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사령부에서 회의 세칙서를 보고 군략상에 방해가 된다고 금지했다.0349)≪大韓每日申報≫, 1904년 9월 2일, 잡보<역피금>.

서울에서 보안회가 활동을 재개하려 하자,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春川에서는 金某가 9월 8일에 산림·천택과 人丁 모집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으로 통문을 발기하여 춘천향교에 돌리고, 뜻 있는 사람은 砲軍을 모집 인솔하고 10월 10일에 驪州에 모여서 서울로 가자고 권고하였다.0350)≪皇城新聞≫, 1904년 9월 15일, 잡보<匿名稱義>. 지방에서도 산림·천택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공론이 일어나고, 일본의 요구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언론도 일본이 황무지개척을 다시 요구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9월 29일자≪황성신문≫은 정부 대신들의 각오를 촉구하고,0351)≪皇城新聞≫, 1904년 9월 29일, 논설<荒蕪地案復起>. 삼천리 강토의 산림·원야를 차라리 우리가 개척하여 耕種케 할지언정, 결코 約券을 외인에게 내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공사는 궁내부의 玄暎運과 극비리에 개척권 문제를 협상하였다. 한국측은 대여기간은 30년으로 하고, 개척 주체자로는 韓日合資會社를 공동으로 설립하고, 개척에 종사할 인원은 한국인으로 한다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계획했던 척식 목적을 이러한 조건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이 제안을 외무대신을 통해 거절하였다.

결국 보안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거족적인 반대투쟁으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좌절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계기로 한국에 軍事警察制를 시행함으로써 武斷支配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국 토지의 강점은 일시 실패했으나, 마침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1907년 7월 4일에 법률 4호로서<國有未墾地利用法>이 공포·실시됨으로써, 이후 일제의 국유미간지 약탈이 본격화되었다. 국유미간지 약탈에 성공한 일제는 이미 그들이 장악한 미간지와 驛屯土를 기반으로 1908년에 국책회사인 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 본격적인 식민지경영을 추진하였다.

<崔昌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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