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1) 일본의 차관공세

(1) 일본의 차관공세

일본의 도발로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중립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가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한국에 대한 침략방안을 세밀하게 수립하고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갔다. 러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 폐기하도록 한국 정부에 강요하였고, 한국 정부는 5월 18일 조약과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이어 일본은 한국의 내정을 개혁한다는 구실로 8월 22일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고문제를 설치하여 이른바 ‘顧問政治’가 시작되었다. 이때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한국내 재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재정정리사업에 착수하면서 일본의 차관공세는 본격화되었다. 메가타는 우선 1905년 1월에 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하기 위한 貨幣整理債 명목으로, 일본 第一銀行으로부터 300만원을 차입하였다. 차입조건은 海關稅 수입을 담보로 연 6푼의 이자로, 6년 거치 5년 상환으로 되어 있었다. 화폐정리채로 실시한 화폐개혁은 금융공황을 초래하여 한국 경제계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의 상인들은 漢城商業會議所를 설립하여 정부에 330만원을 貸下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까지 건너가서 공황을 야기한 것을 항의하는 등 자구책을 강구하였다.

반면에 화폐정리로 일본의 금융독점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래 설립된 朝鮮銀行·漢興銀行·帝國銀行·漢城銀行·大韓天一銀行·韓一銀行 등 민족계 은행들은 재정의 자립이 어려워지고 토착상인자본도 몰락하여 한국의 민족자본의 성장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편 메가타는 1905년 6월에 舊債償還 및 歲計不足補充費 명목으로 200만원의 國庫證券債를 발행하고, 이를 일본 정부의 지불보증으로 자국 내에서 모집해 들여왔다. 이 국고증권채는 국고금 수입을 담보로 하고 연 7푼 이자로, 3년 거치 5년 상환 조건이었다. 국고증권채도 일본의 식민지작업의 일단인 행정기구 개편을 위한 재정지출에 충당되었다.

이어 러일전쟁 이후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독점적 지배권을 장악한 일본은 1905년 11월에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질서를 본격화하였다.

1905년 12월에는 천일은행 및 한성은행의 창립 보조 대부와 지방 금융조합 창립자금 등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황 구제 및 민간금융 지원 명목으로 金融資金債 150만원을 담보없이 무이자로 일본 정부로부터 차입했다. 그러나 거치연한 없이 7개년 상환으로 된 금융자금채 역시 명목과는 달리 漢城共同倉庫株式會社와 어음조합 등 금융기관을 설치하여 토착 상인자본을 흡수하고 민족계 은행을 그 세력권 안에 예속시키는데 충당되었다. 결국 일본 차관을 통해 일본은 한국의 재정·화폐·금융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차관공세 목적은 한국재정을 일본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 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지작업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 한국의 경제적 독립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일제의 강요로 교육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도로·항만시설의 개수확충, 궁방전 정리, 일본인 관리 고용 등 각종 명목의 시정개선으로 재정 수요가 증가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부의 알선으로 일본에서 높은 이율의 차관을 도입하여 늘어나는 재정 수요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국채는 해마다 격증하였다.

3월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안전과 富源開發을 위하여 차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시정개선 및 기업자금 명목으로 일본 興業銀行에서 1,000만원의 차관을 도입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차관은 관세수입을 담보로 연 6푼 5리 이자에, 5년 거치 5년 상환 조건이었는데, 口文錢으로 100만원을 떼어 먹고 實受金 900만원을 1,000만원조로 차입하였다.

일본의 차관 공세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1907년 초에 원금만 1,650만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다. 그것은 재정고문으로 메가타가 취임한 이후 도입된 貨幣整理資金債 300만원, 國庫證券債 200만원, 金融資金債 150만원, 施政改善 및 企業資金條로 도입된 1,000만원 등 모두 1,650만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도입된 것은 1,150만원이었고, 150만원은 그 이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하였다. 1907년 2월에 당시 新債로 舊債 약 350만원을 정리하고도 남은 對日 부채는 1,300여 만원에 이르게 되었다. 1906년 한국의 세입총액이 1,318만 9,336환이고, 세출총액이 1,395만 523환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국채 1,300여 만원은 상당한 거액이었다.0352)崔 埈,≪韓國新聞史論攷≫(一潮閣, 1976), 116쪽.

이와 같이 통감부 설치 이후 대일 부채가 격증한 것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에 필요한 재원을 자국에서 도입한 차관으로 충당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약 5년 동안 한국의 대일 부채는 4,500여 만원에 이르게 되었다.0353)度支部,≪韓國財政施設綱要≫(1910), 159∼160쪽.
李松姬,<韓末 國債報償運動에 關한 一硏究>(≪梨大史苑≫15, 1978), 6쪽.

차관의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강요된 타율적인 것이었으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거의 모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사용한 차관의 상환 의무는 대한제국 정부가 고스란히 떠 안게 되었다. 그렇지만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대한제국 정부가 거액의 외채를 상환한다는 것은 요원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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