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4. 국채보상운동
  • 1)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일본의 주도면밀한 정치·경제적 침략에 의한 식민지화 추진을 한국민은 국권상실이라는 중대한 위기로 인식하였다. 한국민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은 일본 차관의 증대와 경제적 침략으로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일본 차관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해결책을 모색, 대응한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권수호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를 국민의 모금으로 갚자는 거족적인 애국운동이었다.0354)崔 俊,<國債報償運動과 프레스·캠페인>(≪白山學報≫3, 1967).
―――,≪韓國新聞史論攷≫(一潮閣, 1976).
朴容玉,<國債報償運動에의 女性參與>(≪史叢≫12·13, 1968).
―――,<國債報償運動을 위한 女性團體의 組織과 活動>(≪韓國近代女性運動史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申載洪,<國債報償運動>(≪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8).
李松姬, 위의 글.
趙恒來,<國債報償運動>(≪한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7).
李尙根,<國債報償運動에 關한 硏究>(≪國史館論叢≫18, 1990).

국채는 국권의 상실 여부와 직결될 만큼 심각한 문제이므로 국채를 보상하려는 움직임이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국채보상 움직임은 대구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1월 29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대구의 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大東廣文會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는 특별회가 개최되었다. 도내 인사 200여 인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회원 徐相敦은 국채 1천 3백만원을 갚지 못한다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국고금으로 갚을 수 없는 국채를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할 것을 제의하고 자신부터 8백원을 내겠다고 하였다.

회의 참석 회원들은 서상돈의 제의에 찬동하였다. 광문사 사장 金光濟는 당장에 실시하겠다고 찬동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없애고 3개월 담배값 60전과 따로 10원을 더 내놓았다. 회장의 결심에 많은 사람들도 찬성하여 즉석에서 담배를 끊고 의연금으로 2천여 원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키로 한 후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대구 광문사의 국채보상취지서가 전국 각처에 널리 공포되고 각 신문에 게재되자, 각지에서 즉시 호응하였다. 처음에는 개별적으로 참여하였으나 곧 이어 광역의 지역별 조직이 이루어지고, 그 조직 안에 다시 직업별·지방별·가문별로 조직이 구성되었다.

2월 21일 大邱民議所에서 斷煙會를 조직하고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황성신문≫·≪만세보≫등을 통해 전해지자, 경향 각지의 각계각층 민중들이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켜 적극적인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서울의 金成喜·劉文相·吳英根 등은 2월 22일에 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국채보상운동을 서울에서 총괄하는 기구로 자부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회칙을 제정하여 합법적 운동으로서의 형식을 갖추었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국채를 갚지 못하면 속국이 되고 말 것이니, 2천만 민중이 담배를 끊고 의연금을 모집하여 국채를 깨끗이 완결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 收錢所로 7개소를 지정하여 의연금을 수합케 하였다.0355)≪皇城新聞≫, 1907년 2월 25일, 잡보<國債報償期成會趣旨書>.

이어 서울의 북촌에 사는 徐丙炎·尹興燮 등 59인은 전국 2천만 동포가 각각 의무금을 내어 1천 3백만환의 국채를 보상할 것을 목적으로 서울에 國債報償中央義務社를 조직하고, 전국 동포는 능력에 따라 다소를 불구하고 의금을 연출하여 수금소인 황성신문사로 보내면, 그 씨명과 금액을 신문에 게재하기로 하며, 收合金은 매월 말에 합계하여 신문에 포고하고 의금 저금소는 신용있는 은행으로 정할 것임을 발표하였다.0356)≪皇城新聞≫, 1907년 2월 27일, 잡보<義務社又起>·3월 2일, 잡보<國債報償告文>.

각 지방에서도 도, 군, 면 단위로 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하는 취지서를 발표하고 국채보상회를 발족하였다. 1907년 3월 말까지 전국에는 27개의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0357)조항래, 앞의 글, 74쪽.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고종황제는 2월 27일 우리 국민들이 국채를 보상하는 일로 담배를 끊고 그 대금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단연을 실천하고, 또 英親王의 吉禮를 7월(음력)로 연기하도록 명하였다.0358)≪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7일, 잡보<大哉皇言>·3월 7일, 잡보<聖意如天>.
≪帝國新聞≫, 1907년 2월 27일, 잡보<聖上斷烟>.

고종황제가 단연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현직 관료와 지도급 인사들도 단연을 결심하고 의연에 참여하였다. 전 참정대신 金聲根은 국채보상운동에 부응하여 舊貨 100원을 대한매일신보사에 전하고 일반 인민의 忠義에 감격하는 뜻을 표했으며, 閔泳韶·李鍾健·韓圭卨·沈相薰·趙東潤·李愚冕·趙同熙 등의 대관들은 국채를 보상하기 전에는 다시는 흡연하지 않겠다고 동맹하였다.

3월 2일에는 輔國 閔泳徽가 국채보상에 10만환을 捐助하기로 결정하였고, 한규설도 많은 의연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0359)≪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7일, 잡보<老宰義捐>·<大官斷烟>.
≪皇城新聞≫, 1907년 3월 2일, 잡보<閔氏斷烟>·<閔輔國愛國大義>및 1907년 3월 5일, 잡보<韓參政愛國出義>.
掌禮院 主事 李俊秀는 한 달 봉급이 15환에 불과한데, 그 중에 官報債와 儲蓄金 한 달치를 제하고, 나머지 14환 20전을 모두 황성신문사로 보냈다.0360)≪皇城新聞≫, 1907년 3월 2일, 잡보<義哉李氏>.

3월 5일에는 太僕司 主事 徐廷弼·李揆同이 각 부에 통첩하여, 일반 백성이나 어린이·노인까지 국채보상을 위해 몇 십 전이나 몇 원을 각각 의무로 捐補하는데, 관인으로서 연조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니 일반 관리가 월봉 중에서 몇 환씩 저축금으로 떼어둔 금액을 추심 연보하는 것이 사리에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0361)≪皇城新聞≫, 1907년 3월 5일, 잡보<貯金義助>.

또한 官立英語學校에서도 교장 이하 학생과 사환까지 일제히 담배를 끊고, 그 대금을 국채보상에 쓰기로 동맹하고, 학업에 방해가 되는 흡연을 영원히 없애기로 하였다.0362)≪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7일, 잡보<同盟斷烟>. 3월 4일에는 桂洞 普興學校 학도 가운데 11, 12세 된 생도들이 몇 십 전씩 갹출한 금액이 30원이나 되었는데 그 부형들이 아름다운 상황을 보고 담뱃대를 모두 없앴다.0363)≪皇城新聞≫, 1907년 3월 4일, 잡보<父感子義>. 侍從武官府의 사환병 30명도 단연을 동맹하고 담배값 6원 20전을 모아서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냈으며, 陸軍硏成學校의 敎成隊 81명이 45원 52전 5리의 성금을 기성회로 보냈다.0364)≪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8일, 잡보<斷烟同盟>·16일, 잡보<軍人出義>.

서민층과 하층민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서울 양반집의 床奴와 針工들이 품값을 몽땅 의연금으로 바쳤다. 의지할 집도 없어 官人 집 內房에서 기숙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는 大安洞의 姜召史는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품삯에서 한화 4원을 의연하였다.0365)≪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6일, 잡보<窮婦忠義>. 奴僕도 술을 끊고 의연금 5원을 普成館 수전소로 보냈다.0366)조항래, 앞의 글, 77쪽. 3월 20일에는 楊根 分院의 樵童들이 땔나무와 짚신을 팔아 3원을 수합하여 의연금을 기성회로 보냈고, 그 마을의 백정 金三用도 40전을 보냈다.0367)≪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0일, 잡보<樵童出義>.

2월 24일에는 서울의 屛門 노동자들이 국채보상금으로 담배값을 다투어 거두고, 27일에는 북촌 인력거꾼이 4원을 의연하였으며, 23일에는 中署 생선전 인력거 인부 23명이 5원 75전을 모으고, 4월 6일에는 西十字閣 屛門의 인력거 인부 17명이 3원 40전을 모아 기성회에 전달하였다.0368)≪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4일, 잡보<靑坪一曲>·2월 27일, 잡보<是母是子>·3월 23일, 잡보<車夫擧義>·4월 6일, 잡보<車夫出義>. 아이들은 세뱃돈을 내놓고, 고아원 학도들도 심부름값 등을 의연금으로 바쳤다. 新門 밖 柳海宗 노인은 82세의 나이로 노병을 무릅쓰고 짚신을 삼아서 처와 함께 비지를 사서 연명하면서도 신화 2원을 기성회에 바쳤다.0369)≪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4일, 잡보<忠義所激>·3월 1일, 잡보<奇哉此童>·5일, 잡보<梱履出義>·6일, 잡보<孤兒出義>·7일, 잡보<元童嘉愛>·15일, 잡보<兩兒可尙>·16일, 잡보<童捐可讚>.

이와 같이 운동이 점차 확산되면서 의연 참가자는 일반 서민대중 중심으로 옮겨졌다. 정부의 고관이나 부유층들보다 일반 민중의 참여가 더 적극적이었다.

3월 3일에는 동문 밖의 永楓亭 佛敎硏究會에서 통상회를 개최하고 각 사찰에 통지를 보내, 일반 승려는 제 힘에 맞게 의연할 것을 결의하였다. 14일에는 終南山 彌陀寺 여승 40명이 의연금을 갹출하여 기성회에 보냈다. 승려 致海는 은사의 망령을 위하여 의연하였다.0370)≪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7일, 잡보<釋家愛國>·14일, 잡보<僧尼出義>.

3월 13일에는 원산 臥牛洞 기독교회당에서 국채보상을 위하여 斷煙을 일치결심하고 권연 대금을 연조하기로 작정하고 수금위원을 선정하였다. 28일에는 의주의 기독교인들이 취지를 열렬히 연설하자, 방청자들이 20, 30전에서부터 2, 3원씩을 자원하여 출연하였다. 4월 5일에는 덕천군 기독교인 김문근이 일장 연설을 하고 신화 10원을 출연하자, 한 군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의연하였다.0371)≪皇城新聞≫, 1907년 3월 13일, 잡보<斷烟決心>·28일, 잡보<義府多義>.
≪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5일, 잡보<德民義捐>.

3월 17일 수원에서는 영국인 신부 夫在烈과 전교사 金萬俊이 성당에서 기도회를 갖고 남녀 교인이 일제히 출의하여 구화 120원 40전을 대한매일신보사에 보냈으며, 3월 18일에는 천도교에서도 거액을 의연하기로 하였다. 또한 3월 17일 康世允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2개월 봉급 10원을, 26일에는 昌陵의 書員 및 陵軍 41명이 11원 20전과 취지서를 각각 기성회로 보냈다.0372)≪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17일, 잡보<奉侍義捐>·21일, 잡보<姑爲領收>·26일, 잡보<陵軍義捐>.
≪皇城新聞≫, 1907년 3월 18일, 잡보<天敎愛國>.

3월 20일에는 각 약방에서도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일치하여 단연동맹을 하고 178명이 의연금 603원 75전을 수합하여 기성회로 보냈다. 28일에는 醫學校에서 千秋節을 맞이하여 교장이 교관과 학도들에게 ‘흡연이 위생과 경제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고 단연동맹가를 불렀다.0373)≪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0일, 잡보<藥鋪義捐>·28일, 잡보<醫徒請願>·18일, 잡보<斷烟有歌>.

한편 3월 16일에 성환 鶴巢洞의 崔斗卿은 어려운 생계에도 불구하고 집을 팔아 50원을 연조하였고, 그의 어린 아들은 2원, 부인 서씨는 은가락지 2냥 5전중 한 쌍, 장모는 은비녀 1냥 3전중 한 벌을 의연하였으며, 고용하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1원 10전을 출연하였다. 한 집안의 온 식구가 의연을 하자, 군내의 인사들이 모두 최두경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0374)≪皇城新聞≫, 1907년 3월 16일, 잡보<渾家義捐>.

27일에는 故 판서 金永穆의 부인이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작은 집을 마련하고 1천 냥을 의연하였으며,0375)≪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7일, 잡보<賣舍捐金>. 4월 10일에는 淮陽郡 金應壽가 농우를 팔아 10원을 출의하였다.0376)≪皇城新聞≫, 1907년 4월 10일, 잡보<賣牛義捐>.

3월 7일 선천군민들은 국채보상을 위해 단연은 물론 담배를 팔지 않음이 옳다고 齊聲同盟하고 가게에서 권련 소매를 금지하였다. 28일에는 용천군 士民들이 단연동맹을 한 후에, 돈을 거두어 상점에 있는 담배를 사서 불살라 버리고, 이후 영구토록 담배를 팔지 말라고 상민을 효유하였다. 31일에는 재령읍의 유지 신사들이 국채보상을 각 동리에 권고하고, 장날에는 대중들에게 나라의 형편을 설명하여 출연한 금액이 거액에 달하였다. 특히 梁成玉은 자기 農葉草도 피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팔지도 않고 담배 40把를 불태우고 2원을 출연하였다.0377)≪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7일, 잡보<宣市撤烟>·28일, 잡보<龍市焚草>·31일, 잡보<焚草捐金>.

국채보상운동이 단연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담배판매 금지, 焚草, 義捐 등으로 전개되면서, 4월 초 평안남도 23개 군의 各學徒春期大運動會에 참석한 학생과 관람자가 2천여 명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의 흡연자도 없었다고 한다.0378)≪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9일, 잡보<密啞欽歎>.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 회장 李承熙는 국가 안위가 국채보상에 달려있다며 이 운동에 열중하였는데, 그가 아들과 조카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회갑연 비용 20환을 출연하자 감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 일문의 부인 중에서 은가락지를 의연한 이가 있는가 하면, 그의 종질 基澈은 가사를 포기하고 오직 국채보상운동에만 전념하였다.0379)≪皇城新聞≫, 1907년 4월 11일, 잡보<李氏愛國誠>.

4월 14일에는 桂山學校의 11, 12세의 학동들이 국채보상회를 발기 조직하고 동조자들에게 수합한 15환 25전을 황성신문사에 보내고 계속 모금에 노력하였다. 아동들의 이러한 일에 비하여 부호들이 재물을 쌓아 놓고 인색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물의가 일어났다.0380)≪皇城新聞≫, 1907년 4월 15일, 잡보<兒童奮義>. 같은 날 충주군 경무서 죄수 등이 짚신을 삼고 혹은 節食을 하여 6원 60전을 대한매일신보사에 보냈고, 해주 경무감옥서 죄수 윤학서·안영원 등이 가죽신을 만들어 판 돈 3원 45전을 의연하였다.0381)≪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4일, 잡보<罪囚義捐>·19일, 잡보<海囚義捐>.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각계각층의 국민이 의연에 참여하였다. 애국계몽단체, 학회, 언론기관들은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를 보도하고 보상소를 설립하여 이 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大韓自强會·基督敎靑年會·西友學會·漢北興學會 등은 대개 기독교 청년회관을 이용하여 국민의 의무와 단연에 관한 토론회·연설회 등을 자주 열어,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하고 절용 보국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朴治勳은 ‘단연의 이해’, 池錫永은 ‘흡연의 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으며, 尹孝定·劉猛·金宅鎭·兪承兼·石鎭衡 등이 청년회관에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0382)趙恒來, 앞의 글, 81∼82.

한국민의 열렬한 국채보상운동 전개와 참여를 보고 외국인들도 감탄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국내에 있던 어느 서양인은 4월 14일 국채를 보상하기 위하여 국민이 의연금을 내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고 4원을 의연하였다.0383)≪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6일, 잡보<藏名義捐>. 5월 26일에는 프랑스 선교사 明若日도 의연금으로 10원을 내었으며, 평안북도 永柔郡 梨花學校의 일본인 교사 正柳好彬도 감격하여 2원을 의연하였다.0384)≪大韓每日申報≫, 1907년 5월 26일, 잡보<外國敎師義捐>.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국외의 한인사회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은 대구에서 보낸 국채보상 취지문을 받고, 3월 18일에 1백여 명이 회동하여 斷煙同盟을 발기하고 토론회를 개최하자 일본인들이 구름같이 모여와서 축하를 하고, 일본에 체류하는 서양 각국 사람들도 각기 出義를 말하였다.0385)≪皇城新聞≫, 광무 11년 3월 21일, 잡보<兩客同函>.

일본 유학생들이 설립한 太極學會 회원 등 800여 명은 국채보상운동이 적극적인 구국운동이라고 환영하고 단연과 금주를 실천하여 국채를 보상하자고 주장하고, 3월 9일 개최된 유학생총회에서 단연하여 절약된 담배값으로 국채를 보상할 것을 결의하고 수금위원 3인을 선정하였다.0386)金祥起,<韓末 太極學會의 思想과 活動>(≪嶠南史學≫1, 嶺南大, 1985), 457쪽.
≪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13일, 잡보<學生斷烟>.
일본유학생들은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4월 7일에는 수금한 18원 56전을, 5월에는 29원 49전을 황성신문사로 보냈다.0387)≪皇城新聞≫, 1907년 4월 13일, 잡보<留學生斷烟>.
≪西友≫제6호(1907년 5월), 31∼33쪽.

미주 한인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共立協會는 김성무·임치정·이교담의 명의로 3월 25일에<국채보상의연발기서>를 발표하고 미주 교포들의 의연을 당부했다. 이 발기서에서는 일본 국채 1천 3백만원을 만일 부패한 정부에만 맡겨두고 우리 국민이 보상할 방책을 강구치 아니하면, 마침내 종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본국에서 유지인사들이 국채보상할 것을 발기함에 전국 인민이 일층 격앙하여 다투어 의연금을 모집하니, 해외에 있는 동포도 만 분의 일이라도 돕는 것이 당연하므로 이를 발기하니, 미주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힘을 다하여 보조할 것을 바라며, 수전하는 곳은 공립신보사로 정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3월 28일에 박형모·남궁염·신봉희·염달욱 등이 ‘國債報償趣旨書’를 발표하고 동포들의 의연을 촉구하였다.

5월 7일에는 하와이 등지에 있는 교포 김성환 등이 34원을 모금하여 의연의 뜻을 표하였으며,0388)≪帝國新聞≫, 1907년 5월 7일, 잡보<海外義助>·27일, 잡보<在外婦人義捐書>. 23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 20명이 미화 42달러(한화 83원 63전)를 모아 황성신문사로 보내왔다.0389)≪皇城新聞≫, 1907년 5월 23일,<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또한 4월 20일에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거류하는 교포 36명이 국채보상금으로 55원을 거두어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냈다.0390)≪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0일, 잡보<居留民出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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