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1)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정부의 外交顧問인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張仁煥과 田明雲에 의해 射殺되었다. 일제의 한국침략에 앞장서 왔던 스티븐스는 당시 일본특사로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된 한국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이후 항일민족운동의 전개과정에서 ‘義烈鬪爭’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0432)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李德周,<스티븐스 암살사건>(≪韓國基督敎史硏究≫11, 1986).
金源模,<서울에서의 스티븐즈의 親日外交活動>(≪鄕土서울≫46, 1988).
―――,<張仁煥의 스티븐즈 射殺事件 硏究>(≪東洋學≫18, 1988).
尹炳奭,<歐美에서의 義烈鬪爭-李相卨의 遺文과 李儁·張仁煥·田明雲의 義烈>(≪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一潮閣, 1990).
Andrew C. Nahm, “Durham White Stevens and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 United States and Korea(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 1979).

스티븐스는 변호사 출신으로 1873년 8월에 주일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78년 10월부터 1879년 5월까지 빙햄(John A. Bingham) 주일공사가 휴가차 귀국했을 때, 스티븐스는 대리공사로 근무하면서 일본 관리로부터 유능한 외교관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일본이 외국과 맺은 불평등한 조약들을 개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1882년 10월 일본 정부의 고빙제의를 수락하여 주일미국공사관을 사임하고, 11월 1일 일본 외무성 관리로 고빙되었다. 이후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앞장서 대변하며 대미외교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스티븐스는 1884년 甲申政變의 수습과정에서 일본측에 외교적인 조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885년 1월 3일 일본의 特派全權大使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스티븐스를 대동하고 일본군 2개 대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울에 들어왔다. 스티븐스는 이노우에에게 갑신정변 때 군대를 동원한 일 등에 대해 사과하지 말도록 했다. 또 한국인은 겁이 많아서 군사적인 위협만 가하면 손쉽게 어떠한 요구 조건도 받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노우에는 스티븐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정부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고 배상금 15만원 지불을 강요하는 이른바 ‘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러시아세력을 완전히 구축하고, 한국을 지배한다는 對韓政策을 추진하면서 스티븐스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하게 되었다. 1900년 4월 1일에 외무성은 스티븐스와 雇續契約을 맺어, 월봉 700원에 1905년 3월 31일까지 雇續하기로 하였다. 그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외교 일선에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계획을 추진, 침략자의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0433)金源模,<서울에서의 스티븐즈의 親日外交活動>, 67∼73쪽.

일본은 러일교섭이 진행중이던 1903년 10월부터 비밀리에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매수공작금을 투입하면서 친일파 李址鎔·李根澤 등을 조종하여 韓日議定書 체결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영일동맹의 체결과 미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일본 각의는 1903년 12월 30일에 여하한 경우에도 실력으로 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무단적인 ‘對韓方針’을 결의하고 착수시기만을 노렸다.

일본은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1월에 체결하려다 실패한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다. 일본은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케 하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규정된 ‘內政改善’을 구실삼아 이른바 韓日協約, 즉<韓日外國人顧問 傭聘에 관한 協定書>를 강제로 체결케 하였다. 그 협정서의 내용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행정고문으로, 외국인 1명을 외교교문으로 하여 재무와 외교의 주요 사안에 대해 그의 의견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일본은 이 협정에 의하여 大藏省 主稅局長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에,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에 각각 취임시켰다. 일본은 이들을 통해 외교와 재정을 감독·정리한다는 이름 아래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침식해갔다. 일본은 이러한 임무를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傭聘契約書에서 부여하였다.0434)尹炳奭,<을사5조약의 신고찰>(≪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27∼40쪽.

외교고문의 임무는 세 가지로 규정하였다. 첫째, 한국 정부가 타국 정부 혹은 타국 인민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외교상 및 기타 안건에 관하여 심의·입안할 책임을 가진다. 둘째, 한국의 외교에 관한 일체의 왕복문서 및 모든 안건은 사전에 반드시 외교고문의 동의를 구하고 또한 의정회의에 참여하여 외교에 관한 제의를 할 수 있다. 셋째, 외교에 관하여 한국 황제를 알현하여 외교상 의견을 올릴 수 있다.0435)≪日本外交文書≫37-1, 374∼376쪽.

특히 고문의 권한은, 한국 정부가 자의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부수조건을 조약문에 명시하였다. 이 용빙계약에 의하여 한국의 주권은 한일의정서보다 더욱 가중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두 고문의 용빙을 전후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고문을 두게 하여 이른바 ‘고문정치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일본이 스티븐스를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선임한 것은 스티븐스가 20여 년간 일본에 고용되어 충성을 바친 인물이므로, 그들의 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알맞은 인물이었으며, 친일정책을 고수하던 미국 루즈벨트의 對韓정책과도 합치되었다. 또한 한국의 親美감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외상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워싱턴에서 친일외교 행각을 벌이던 스티븐스에게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이를 수락한 스티븐스는 10월 14일에 동경에 도착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勳1等 瑞寶章을 수여받았다. 일본외무성은 한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스티븐스 傭聘契約草案을 작성하면서, 그를 한국 외교고문으로 추천하는 이유를, “제국 정부는 20년간 계속 제국을 위해 진력을 다한 귀하의 재능과 충실함을 십분 신용하고 있으며, …”라고 설명하였다.0436)金源模,<서울에서의 스티븐즈의 親日外交活動>, 82∼84쪽.

일본은 스티븐스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외교첩자로 만들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계약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스티븐스의 月俸을 1,000원으로 하고 한국 정부가 800원을 지급하게 하였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작성한 용빙계약안을 가지고 12월 11일에 서울에 도착, 24일에 고종을 알현하고 27일에 외부대신 李夏榮과 정식으로 외교고문 용빙계약을 체결하였다.

1904년 한국 정부의 외부고문으로 선임된 스티븐스는 한국 외부의 모든 왕복외교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것은 스티븐스가 한국 외부대신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스티븐스는 의정부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언제든지 고종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결국 스티븐스가 한국정치의 최고 감독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스티븐스의 권위에 대해 헐버트(H. B. Hulbert)는 “한국의 대외관계는 스티븐스에 의해 전적으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요리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0437)Hulbert, The Passing of Korea, p. 212.

한국 정부는 스티븐스를 고빙하면서 그에게 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특히 고종은 스티븐스를 만날 때마다, 朝美條約의 거중조정 공약을 들어 미국이 한국을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신임을 이용하여, 한국 정부가 거중조정에 바탕을 두고 서울 주재 구미열강의 외교대표들에게 벌이고 있는 구원호소 비밀계획을 사전에 봉쇄하는데 주력했다. 고종이 미국·러시아·프랑스에 밀서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일본 첩자와 스티븐스의 친일 외교활동으로 좌절되었다. 이와 같은 스티븐스의 친일행위는 在韓 미국 실업인들도 “스티븐스는 일본 관리 자신들보다도 더 친일적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고 혹평했을 정도였다.0438)Lee Houchins and Chang-su Houchins, “The Korean Experience in America, 1903∼1924," Pacific Historical Review, 43(November, 1974), pp. 556∼558.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거액의 봉급을 받으면서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대한침략을 위해 친일외교를 감행했으며, 첩자비밀외교를 통해 일본의 보호국 수립계획을 적극 추진하였다. 1905년 강제적인 을사조약 이후 스티븐스는 한국 외부고문에서 통감부고문이 되었고, 1906년 의정부고문으로서 일제의 통감정치를 도왔다.

이후 일본은 만주에서 군사점령정책을 시행하면서 英·美 실업인의 활동을 제한하는 등 영·미 두 나라와 공약한 아시아 문호개방정책을 폐기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으로부터 엄중한 외교적 항의를 받았다. 미국에서는 일본인 배척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반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스티븐스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즉 스티븐스의 미국행 임무는 문호개방문제의 해명과 일본인 배척운동을 해결하고 또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미국에 널리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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