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5. 의사·열사의 항쟁
  • 1)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2)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사살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3일 일본에서 출발,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그는≪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The San Francisco Chronicle)지와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제목의 친일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한국을 모욕하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일제히 분개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하와이 사탕농장에 이민왔다 미주 본토에 들어온 노동자와 몇 명의 유학생, 우국망명자 등 150명 내외가 共立協會와 大同保國會를 설립하여 그들의 권익신장과 조국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날(3월 21일) 저녁 8시에 긴급히 共立館에서 두 단체를 중심으로 共同會를 개최하여 李學鉉·文讓穆·鄭在寬·崔有涉 등 總代 4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이 스티븐스에게 강경한 항의를 하기로 결정하고 숙소로 스티븐스를 찾아가 성명서 내용의 정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여전히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다행이다”는 망언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총대들은 주먹으로 스티븐스의 면상에 타격을 가하고, 그의 친일행적과 일본의 포학한 한국침략 만행을 규탄한 후 떠났다. 신변의 불안을 느낀 스티븐스는 3월 23일 급히 워싱턴을 향해 떠나려 하였다.

스티븐스 방문 이후 총대의 지도자 이학현은 즉각 스티븐스의 친일성명서를 반박하는 성명서를≪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기고하였으며, 총대들은 22일 공립회관에서 공동회를 개최하여 스티븐스를 방문한 경과를 보고하고 다음 대책을 숙의하였다. 이 자리에 대동보국회의 張仁煥과 공립협회의 田明雲도 총회에 참석하여 스티븐스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들은 회의가 끝난 후 각각 권총과 스티븐스 사진을 준비한 끝에 사살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워싱턴 행 대륙횡단철도를 타기 위하여 오클랜드 페리부두선창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거사 장소로 택하였다.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경 호텔 자동차가 부두에 도착하자 키가 작은 전명운이 재빨리 스티븐스에 접근, 손수건으로 감싼 권총을 꺼내어 그에게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당황한 전명운은 총자루로 그의 면상을 후려치고 달아났다. 스티븐스는 안면 왼쪽 볼에 심한 파열상을 입고 자동차 뒤쪽에 부딪쳐 넘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전명운을 추격하였다. 몇 발자국을 갔을 때 스티븐스 뒤쪽에서 장인환이 권총 3발을 발사했다. 제1발은 달아나는 전명운의 어깨 부분에 명중하고, 제2발은 스티븐스의 오른쪽 어깨뼈를 맞추고, 제3발은 스티븐스의 등 아래쪽 복부를 명중하였다. 장인환은 체포되고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항만응급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중앙구급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스티븐스는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이틀 뒤 25일 사망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서로 연행된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하게 된 동기를 한글성명서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발표되었다. 또한 암살기도혐의로 시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스티븐스를 사살하게 된 동기를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일본의 보호정치 이래로 완전 파멸 상태이다. 스티븐스는 일본을 도와 한국 覆滅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 外部 고문관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일본의 一大親友(great friend of Japan)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위해 봉사한다 해서 한국 정부로부터 후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위해 한국인에게 온갖 잔인한 일을 자행해 왔던 것이다. 그는 한국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 한국을 위해 일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 지금 일본은 세계열강의 制裁 때문에 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스티븐스를 한국통감부 미국인 고문관이란 직함을 빌어서 미국에 파견,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미국 국민에게 이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설득 연설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 나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만 우리 동포는 그의 謀陷으로 학살되고 있다. 그가 만약 이번의 美國使命을 완수하고 한국으로 되돌아 간다면 더 많은 동포가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 그를 쏜 것이다. 이미 학살된 한국 국민의 영혼을 위로하고, 스티븐스에게 더 이상의 학살을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 국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는 그를 저격한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죽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내가 그 자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 나라의 영광이요, 우리 국민의 행복이 될 것이다(The San Francisco Chronicle, March 25, 1908).

장인환은 스티븐스 사살에 대하여 조국을 구하기 위한 거사로서 한국 정부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일본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은 정당한 애국행위라고 역설하였다.

스티븐스 사살은 미국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면을 목격한 한 미국인 부인은 “이 사람이 비록 연소한 황인종이나 애국지사요 의기로운 남자로다. 자기 나라를 위하여 身命을 희생같이 여기고 있으니, 물론 누구든지 국민된 자는 제 나라를 위하여 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여야 되겠다는 것이다”0439)≪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 29일.라고 장인환의 애국독립정신을 크게 찬양하였다. 그리고≪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여러 신문은 장인환과 전명운을 애국자, 스티븐스를 ‘公敵’으로 규정하면서 사건 전말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사진은 물론 장인환의 저격장면과 전명운의 타격장면을 묘사한 몇 가지 큰 삽화까지 그려 함께 게재하였다. 언론보도의 대부분 논조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의거를 정당하고 애국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기사까지 등장하였다. 이 의거가 때마침 미국 하층민들 사이에서 일본인 노동자 배척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국 시민들로부터 큰 이해와 동정을 살 수 있었다.0440)尹炳奭, 앞의 글(1990), 371∼373쪽.

사건 발생 후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는 한인공동회를 개최하고 장인환재판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재판에 대비하여 문양목·백일규·정재관 등 7명을 판사 전담위원으로 선임하고 40여 명의 참석자들로부터 즉석에서 7백여 달러를 의연금으로 수금하였다. 이어 두 의사의 공판투쟁을 위한 의연금은 미주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은 물론이고 국내와 멕시코·러시아·중국·일본 등지의 한인들로부터도 계속 답지한 결과 총 1,135명으로부터 모은 의연금 총액이 8,568원 41전에 달했다.0441)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1965), 594쪽. 이것으로 변호사와 통역 비용 등 공판에 소요되는 일체의 경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전명운은 어깨 부분에 입은 총상이 치명상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치료를 받고 회복, 퇴원해서 4월 3일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검찰은 살인사건의 공범을 강조하였지만 변호인은 공모사실을 완강히 반박하고 오히려 전명운 역시 총을 맞은 피해자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구속기소된 지 97일만인 1908년 6월 27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보석으로 석방된 전명운은 장인환 재판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악영향을 끼칠 것을 염려하여 극비리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장인환 재판이 완료된 후 1909년 7월까지 블라디보스톡에 체재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0442)金源模,<張仁煥의 스티븐즈 射殺事件 硏究>.

장인환은 3월 27일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혐의로 공식 기소되어, 약 8개월간 재판투쟁을 벌였다. 일제가 고용한 원고측 변호사와 검사는 장인환을 계획적인 일급 살인혐의로 사형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측 무료 변호인단은 애국충정의 발로로 일종의 정당행위로서 무죄석방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09년 1월 2일 장인환은 사형을 면하고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네 차례의 가석방청원서를 제출한 끝에 장인환은 1919년 1월 10일 가출옥하였다.0443)金源模,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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