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1) 보안회

(1) 보안회

일제는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0493)의정서의 내용은 대한제국의 독립 및 황실의 안녕과 동양평화의 확립을 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한국의 시설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허용, 군용토지수용권의 침탈과 한국인의 항일활동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과 치안권 침탈 등 대한제국의 국가주권을 크게 침탈한 것이었다.에 이어서 한국주찰군을 편성하여 한국을 무력으로 관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러일전쟁 중 대한제국으로부터 반드시 획득하여야 할 가장 수익 높은 이권으로서 한국의 전국 未耕地 개간 점유권을 획득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이 이권의 허가를 강요하였다.

이에 정부가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애국적 지식인과 시민들은 보안회0494)보안회 관련 글은 다음과 같다.
신용하,<구한말 보안회의 창립과 민족운동>(≪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44, 1994).
윤병석,<일본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하여>(≪역사학보≫22, 1964).
를 창립하여 맹렬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안회는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전에서 宋秀萬·元世性·宋寅燮·沈相震·梁漢黙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서울 시민들에 의해 매우 자발적인 방식과 과정으로 창립되었다.0495)≪皇城新聞≫, 1904년 7월 15일, 잡보<宋氏演說>. 보안회 창립 당시의 주도층은 독립협회 계열의 개화자강파, 육의전의 상업자본가, 황국협회 계열의 부상, 기독교 교인 등 다양한 세력들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국민의 정치적 발언이나 활동을 칙령에 의하여 엄금하고 있었기에, 보안회는 회의 목적을 “일본 미경지 개간권 요구 저지”로 명백히 한정하여 설정하고, 목적이 달성되는 날 즉시 단체를 해산하며, 운동방법은 집회 개최와 공한 발송으로 하고, 이를 관장하는 회장과 부회장만 두어 극히 한시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해산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보안회가 창립되어 일제의 미경지 침탈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시작하자 회원은 곧 3,000명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격렬한 집회 시위와 가두 투쟁을 전개할 때는 약 5,000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이에 참가하여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전국적 배일운동으로 확대되기 전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마침내 미경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이같이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일본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일부 각료들을 굴복시켜 일제의 전국 미경지 침탈을 저지하고 실질적으로 국토와 국권의 일부를 지킨 것은 민족운동사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이는 그 후의 애국계몽단체의 결성과 애국계몽운동의 효시가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의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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