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1) 초기의 계몽단체들
  • (4) 헌정연구회

(4) 헌정연구회

헌정연구회는0522)헌정연구회에 관한 연구로는 최기영,<헌정연구회에 관한 일고찰>(≪윤병석교수 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1990;≪1900年代의 愛國啓蒙運動硏究≫, 아세아문화사, 1993). 이 글은 후자를 참조함.
―――, 앞의 글(1992).
1905년 5월 중순에 李儁·尹孝定·梁漢黙·심의승 등이 발기하여 5월 24일에 창립되었다.0523)≪皇城新聞≫, 1905년 5월 25일, 잡보<憲會員選定>.
≪帝國新聞≫, 1905년 5월 27일, 잡보<憲政硏究會>.
중요 참여인사로는 발기인 외에 洪弼周·洪化基·李沂·李胤鍾·尹秉·金貞植·蔡基斗·宋鴻·徐丙轍·盧日壽·兪鎭衡·崔岡·金眞極·徐丙吉·金寧濟·金宇植·李源兢·韓啓昌 등이다.

이들 구성원들의 성격을 이전의 정치활동을 통해 분석하면, 이들은 대체로 독립협회-공진회 계열의 인사들이었으며 국민교육회의 관여자들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것은 이들과는 달리 정치현실에 불만을 지니고 있던 유학자들로서 주로 상소를 통하여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즉 홍필주·이기·이윤종·윤병·노일수·송홍 등 개신유학자들로서 전통적인 유학에 만족하지 않고 서양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인사들이었다.0524)구성원의 성격은 최기영, 앞의 글(1990), 3∼5쪽 참조.

헌정연구회의 설립 동기는 이준·윤효정 등 발기를 준비한 사람들이 국권을 수호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정치력이 집결된 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느껴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인사들을 규합하였는데 보부상과의 제휴를 끊고 일진회와 대립할 수 있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을 제휴의 대상으로 하여 당시 시국을 우려하였던 유학자들과 연결을 갖게 되었다.

헌정연구회의 설립 목적은 세계의 대세인 입헌체제를 갖추기 위한 헌법준비를 위해 헌정에 관한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입헌체제가 서구열강의 부강의 근원이므로 전제군주국인 우리 나라도 계절에 앞서 의복을 준비하듯이 대세의 변화를 예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0525)≪皇城新聞≫, 1905년 5월 16일, 잡보. 이는 이미 독립협회의 개화론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것으로 이를 다시 현실문제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헌정연구회의 활동은 헌법제정을 목표로 그 예비작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헌정연구회에서 준비하고자 했던 헌법은 어떤 형태의 것이었는가. 당시 헌정의 형태는 民約(공화국)·國約(군주국에서 군민 공동)·欽定(군주국)의 3가지로 이해되고 있었는데,0526)≪皇城新聞≫, 1905년 6월 15일, 기서<憲政鎖談>. 헌정연구회가 입헌이라고 주장하는 ‘君民立約之憲’은 대체로 국약의 형태를 의미하면서도 실제 흠정헌법의 추구가 보인다. 이 점은 헌정연구회의 강령에 잘 드러나 있다.0527)강령은 헌정연구회의 취지서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帝室權威之揭於欽定憲法者 期圖尊榮事, 一. 內閣職權之載於官制章程者 期圖責成事, 一. 國民義權之得於法律範圍者 期圖自由事.
이 강령에서 헌정연구회는 무엇보다 흠정헌법에 따른 군주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각의 시정권과 민권의 확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헌정연구회의 입장에 대해서, 일부의 학자들은 헌정연구회가 추구한 헌법이 이미 독립협회 단계에서부터 추구하여 온 입헌군주제, 즉 영국형의 입헌군주제라고 보고 있다.0528)독립협회 이래 의회설립을 추진하던 지식인들은 1905년 5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입헌정체의 연구와 민족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신용하,<19세기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문제와 입헌공화국 수립운동>,≪한국의 근대국가 형성과 민족문제≫, 1986, 94쪽).
김효전은 당시 계몽사상가들은 국가정체에서 전통적인 군주제를 타파하고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하였고 그것도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김효전,<한국 개화기의 국가이론>,≪동아법학≫2, 1986).
실제 강령에서 제시된 내각의 시정권과 민권의 확대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며, 강령의 세목으로 제시한 교육, 법률, 의회의 설치와 같은 내용도 민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헌정요의≫의 저술과 발표도 헌정연구회가 국약의 성격을 띤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음을 말하여 준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의 학자들은, 헌정연구회가 추구한 헌법은 외견적 입헌군주제, 즉 개명군주제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가 개명군주제였고, 1900년대의 개화자강파들 역시 유기체적 국가관의 강조와 맥을 같이 하여 외견적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고 보았다.0529)김도형의 경우는 헌정연구회만을 따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입헌군주론이 황제의 절대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민권도 일정하게 보장받는 형태인 외견적 입헌군주제 혹은 개명군주제라고 하였다(김도형,≪대한제국말기의 국권회복운동과 그 사상≫,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88, 63∼77쪽).
최덕수는 헌정연구회의 전신인 독립협회의 입헌군주론은 의회의 권한이 극히 보잘 것 없고 민권의 보장도 현저히 미약한 프러시아형의 입헌군주제라고 하였다(최덕수,<독립협회의 정체론과 외교론 연구>(≪민족문화연구≫13, 1978).

또 하나의 입장은 헌정연구회의 내부에 민권의 확대를 강조하는 입헌군주제와 군권에 강조점을 둔 입헌군주제 두 개의 입장이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민권의 확대를 염두에 두었지만 현실적으로 흠정을 추구하였다는 견해이다. 특히<憲政鎖談>의 발표는 이의 주요 증거이며, 그리고 실제 헌정연구회는 흠정헌법의 제정을 현실적 목표로 하여 그 예비작업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보았다.0530)최기영, 앞의 글(1990), 10∼24쪽.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헌정연구회는 자신들이 연구하고 준비한 입헌정치에 대한 소개를 그 주된 사업으로 하였다.≪황성신문≫에 연재한 기서<헌정쇄담>과<헌정요의>가 국민계몽활동의 구체적 예라고 하겠다. 헌정연구회에서 1905년 7월에≪헌정요의≫라는 소책자를 저술하여≪황성신문≫7월 15일자부터 8월 3일자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기서의 형태로 연재된 바가 있는데,≪헌정요의≫저술의 기본적인 입장은 입헌군주국에서의 군주권의 제약과 민권의 확대에 대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입헌정치의 형태는 군주와 국민의 협의에 의한 ‘군민입약지헌’으로 민권의 확대에 의한 입헌군주정이었다.0531)최기영, 위의 글, 20∼24쪽.
―――, 앞의 글(1992) 참조.
이는 국민교육회에서≪국민수지≫라는 책명으로 발간되었다.0532)≪국민수지≫는 이미 헌정연구회에서 발간한≪헌정요의≫의 자구를 몇자 바꾸어 간행한 것으로 이에 관한 내용은 헌정연구회의 설명에서 언급하겠다. 이에 관한 연구는 최기영,<한말≪國民須知≫의 刊行과 立憲君主論>(≪조항래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헌정연구회는≪황성신문≫, 1905년 6월 12일부터 6월 21일까지 6차례에 걸쳐 기서, 즉 투고 형식의 일본인 利龍子 談의<헌정쇄담>을 연재하였는데, 이는 헌정에 대한 소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글로, 군주의 독단과 전제를 불가한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주된 논의를 흠정헌법에 두었다. 利龍子는 군주가 덕의로 헌법을 제정하여야 하고 군주와 국민은 겸손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0533)≪皇城新聞≫, 1905년 6월 15일, 기서<헌정쇄담>.

그리고 1905년 11월에 즈음하여 일진회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를 각 단체와 신문사·학교 등에 보냈는데, 헌정연구회에서도 이 선언서를 반송하고 일진회를 비난하는 문서를 첨부하여 보냈다.0534)≪皇城新聞≫, 1905년 11월 11일, 잡보<憲會교서>.
≪大韓每日申報≫, 1905년 11월 15일, 잡보<却之廓如>.
그 후 11월 19일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윤효정은 이 조약을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박정양 등의 원로에게 칠성판을 보내어 보호조약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을 통렬히 비난하였는데, 이 일로 윤효정은 경무청에 체포되었다.0535)≪大韓每日申報≫, 1906년 2월 11일, 잡보<抗辨仍囚>. 윤병은 상소를 올려 보호조약을 조인한 반역배들의 주살을 청하였다.0536)≪大韓每日申報≫, 1905년 12월 1일 2일 3일, 잡보<前秘書丞尹秉氏疏本이 如左하니>. 이 후 헌정연구회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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