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2) 대한자강회
  • (1)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조직

가. 대한자강회의 설립

대한자강회0537)대한자강회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李鉉淙,<大韓自强會에 대하여>(≪震檀學報≫29·30, 1966).
權熙英,<大韓自强會의社會思想과民族運動>(≪논문집≫, 해군제2사관학교, 1980).
鄭 灌,<舊韓末 愛國啓蒙團體의 活動과 性格>(≪대구사학≫20·21, 대구사학회, 1982).
―――,<大韓自强會月報에 관한 一考察>(≪역사교육논집≫1, 경북대, 1980).
―――,≪구한말기 민족계몽운동연구≫(형설출판사, 1995).
李志雨,<大韓自强會의 활동에 대하여>(≪경희사학≫9·10, 1982).
―――,<大韓自强會의 時代認識에 대하여>(≪慶大史論≫3, 1987).
柳永烈,<大韓自强會의 愛國啓蒙運動>(≪1900年代의 愛國啓蒙運動硏究≫, 아세아문화사, 1993).
―――,<大韓自强會와 신민회의 민족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7).
李尙根,<愛國啓蒙團體의 敎育救國運動-大韓自强會와 新民會를 중심으로>(≪朴永錫敎授 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1992).
는 1906년 3월 31일 張志淵·尹孝定·沈宜性·林珍洙·金相範 등 5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자강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국권회복을 위해 자강에 힘쓰자”는 기본입장에서 발기되어 4월 14일에 임시회를 개최하고 회칙에 의한 임원진을 구성함으로써 정식 발족을 보았다.0538)≪大韓自强會月報≫제1호,<본회회보>, 13∼17쪽.

당시의 상황은 앞서의 단체들과는 달리 이미 을사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의한 보호국체제가 이루어진 후의 시기였다. 미·영의 후원에 힘입어 러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힌 일본은 1905년 7월의 태프트-가츠라 조약과 8월의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며 9월의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을 통하여 러시아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와 보호, 監理의 권리를 인정받고 11월에는 강제로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자강회는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고(1906. 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감취임(1906. 3)이 있은 후 어려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설립된 대한자강회의 설립주체는 누구였는가. 주축이 되었던 인물을 보면 5인의 발기인 외에 尹致昊·林炳恒·南宮薰·李源兢·朴勝鳳·李相天·韓永福·崔在學·安秉瓚·金英圭·李明健·姜漢熙·金碩桓·吳周爀·鄭雲復·白象圭·呂炳鉉·洪弼周·李沂·柳瑾 등과 일본인 오가키 타케오(大垣丈夫) 등이었다.0539)≪大韓自强會月報≫제1호, 14∼15쪽. 발기인 외 최초의 임원으로 선출된 평의원 10인과 간사원 10인, 일본인 고문을 창립주체로 보았다.

이러한 인물 구성을 보면 대한자강회는 헌정연구회를 모체로 하면서,0540)헌정연구회가 대한자강회의 모체였다는 것은 이현종의 앞의 글(157쪽)에서 처음 언급하였고, 유영렬의 앞의 글(1993, 44쪽)에서도 이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와도 일정하게 관련하고 있었고, 황성신문·제국신문 등 언론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즉 대한자강회는 독립협회와 그 후의 애국계몽단체들이 전개한 민족운동의 맥락을 이은 애국계몽단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설립주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일본인 고문 오가키 타케오에 관한 것이다. 그는 한일합방 이후 회고담을 통하여 그 자신이 “경성에 있어서의 일류 인물들인 윤치호·윤효정·여규현·홍필주·장지연·이원긍·이기·유근 등과 협상담합하여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고 하였고,0541)李鉉淙, 앞의 글, 164쪽. 오가키의의 회고담에 따르면 “자기는 고문으로서 시국수습과 아울러 會로서의 활동방침의 결정 등에는 실권을 장악하여 회원을 지휘하며 檄을 13도에 보내어 排日派의 통일에 노력하였다”고 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대한자강회의 인도자는 韓人 2인과 日本人 1인이라고0542)≪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11일, 논설<新成社會>. 했던 것으로 볼 때 오가키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대한자강회에 대한 평가문제와 관련을 갖는 것으로 대한자강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면 왜 윤효정·장지연은 일인과 제휴하여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을까.

이 점에 대하여 대한자강회측이나 오가키측이나 모두 동상이몽을 꿈꾼 것이고 상승작용의 일환으로 상호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능통한 특히 법률 정치에 정통한 오가키를 자강회의 고문으로 추대하였기에 자강회의 근본 목적이나 본래의 사명이 성과를 거두고 排日活動을 하는데 제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0543)李鉉淙, 앞의 글, 165쪽.

이에 반하여 이 문제를 두 가지 점에서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0544)柳永烈, 앞의 글(1993), 47∼48쪽. 첫째, 대한자강회 발기인들은 보호국체제하에서 자강회의 설립과 그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일인고문의 초빙이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발기인들은 일인 오가키가 자신들과 시국관에 있어 일치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당시 오가키는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동일하게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한국의 자강독립론을 역설했고 한국의 자강독립에 기초한 동양 3국의 정족평화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종의 아시아 동맹론으로 당시 일제의 보호국체제하에서 한국의 국권회복론자들이 합병론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동맹자들을 동지로 간주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있었다고 강조하였다. 요컨대 대한자강회의 창립에 오가키가 깊이 관여했고 일제가 반일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자강회를 이용코자 했다고 해서, 대한자강회가 일제의 조종하에 창립되고 일제의 조종을 받은 단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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