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3) 신민회
  • (1) 신민회의 창건과 목적

가. 신민회의 창건

신민회0592)신민회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재순,<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이대사원≫14, 1977).
신용하,<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일조각, 1985).
강재언,<신민회의 활동과 105인사건>(≪한국의 개화사상≫, 비봉출판사, 1981).
윤경로,≪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일지사, 1990).
―――,<신민회활동의 경제적 기반>(≪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柳永烈, 앞의 글(1987).
李尙根, 앞의 글.
는 안창호의 발기에 의해 1907년 4월 초0593)이재순은 신민회가 양기탁을 중심으로 안창호가 귀국하기 전인 1906년에 창립되었다고 하고, 신용하는 1907년 4월초에 창립되었다고 하며, 윤경로는 안창호가 귀국한 2달후인 1907년 4월 20일에 창립되었다고 한다. 梁起鐸·全德基·李東輝·李東寧·李甲·柳東說·安昌浩 등 7인을 창간위원으로 하여, 이들과 함께 盧伯麟·李昇薰·安泰國·崔光玉·李會榮·李商在·尹致昊·李剛·曺成煥·金九·申采浩·林蚩正·李鍾浩·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신민회를 창건한 세력은 당시 활동하고 있었던 다섯개의 비공식 집단의 연합세력이었다. 즉 양기탁·신채호·玉觀彬·張道斌·임치정 등 대한매일신보계열과 전덕기·鄭淳萬·이준·이동녕·崔在學·桂明陸·金仁敢·李承吉·車炳修·申尙敏·金泰淵·조성환·徐相八·김구 등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세력, 이동휘·이갑·유동열·노백린·조성환·金羲善 등의 무관 출신들, 이승훈·안태국·崔應斗 등 민족자본가 집단, 미주에 있던 안창호·이강·林俊基·金成武·宋錫俊·申達元·朴永順·李在洙 등 공립협회집단 등이 연합한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다섯개 집단이 모여서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였다.0594)이것은 신용하의 견해에 따른 것인데(신용하, 앞의 글(1985), 18∼19쪽), 윤경로의 경우 신민회가 기존의 상동파 조직 위에서 창립될 수 있었다고 하고 있다(윤경로, 앞의 책, 180∼181쪽).

신민회 창건의 구상과 발기는 1907년 초 미국에 있었던 안창호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안창호는 이 뜻을 갖고서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후 평안도 일대를 돌면서 강연을 하고 그 지역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체화시켜 나갈 준비를 하였는데 4월 초 비밀결사의 창립을 양기탁에게 제의하였다.0595)≪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1일, 논설<共立協會의 詳報>·1907년 4월 11일, 광고. 당시 많은 단체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었는데 안창호는 왜 이와 같이 비밀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려고 했을까. 이는 기존의 합법적인 단체와 학회가 다하지 못한 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투쟁적으로 전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 초 양기탁의 주재로 다섯개 집단의 대표격인 양기탁·이동휘·전덕기·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이 극비리에 회합하여 창건위원회를 열고 신민회를 창건하였다.0596)안창호는 검사의 심문에 대해 신민회의 조직자로 이 7인을 거명하고 있다(도산기념사업회,≪속편 도산안창호≫(1954), 86∼87쪽).

신민회의 창건위원회에서는 두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 먼저 신민회의 회칙에 관한 것인데 이는 안창호 등이 미국에서 초안한<신민회취지서>와<신민회통용장정>이 대체로 초안대로 통과되었다. 단 본부의 설치조항만을 수정하여 본부는 서울에 두고 미주에는 다른 도와 같이 감독을 두기로 하였다. 또 하나는 조직기구와 그 책임자의 선임인데, 양기탁이 총감독을, 이동녕이 총서기를 맡고 안창호는 집행원을 담당하기로 하였다.0597)도산기념사업회, 위의 책,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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