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5) 애국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그 한계

이상에서 먼저 초기의 계몽단체들을 간략히 살펴보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자강회와 신민회를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그리고 대한협회, 지역 단위의 단체인 학회에 대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이렇게 무수히 설립되었던 계몽단체 활동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먼저 무엇보다도 계몽단체의 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 규모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대한자강회·신민회와 같은 전국 규모의 단체가 지회운영을 통하여 계몽운동을 광범한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갔고 학회와 같은 지역 단위의 단체가 설립, 운영되면서 운동이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리하여 계몽운동의 대중성을 확보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물론 계몽단체의 주도층과 참여층을 보면 지식층 등 시민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립협회 단계보다도 훨씬 광범한 지역에서 다양한 층까지 포섭하여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단체활동의 결과라고 하겠다.

셋째, 애국계몽운동이 교육운동과 대중계몽운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물론 이 때의 교육운동의 교육내용이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교육이 그 자체의 목적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소홀히 되고 지나치게 국권회복과 애국을 강조하여 국권주의적 인간을 길러내고 있었던 점 등이다. 그러나 이 때 민족교육을 통해 길러진 인재들이 이후 민족운동이 기본 역량이 되었던 것은 높히 평가할 수 있고, 이 때 계발된 대중들 역시 후의 민족운동의 주요역량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넷째, 신민회와 같은 강력한 단체의 출현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단순한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의 실력양성운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계몽단체들은 이에 못지 않은 한계점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계몽사상가들은 사회진화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자기시대를 인식하고 여기에서 현실극복의 논리를 찾아내고 있었는데, 일부의 인사들이 오히려 생존경쟁·약육강식의 인식에 기초하여 국권피탈의 원인을 내부로만 돌리는 자성론과 자책론에 빠져 패배주의로 흘렀다는 점이다.

그리고 1908년 이후 일제의 야욕이 본격화되면서 민족의식이 약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였던 계몽단체의 일부 인사들은 일제에 타협적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단체의 내부에 분열양상이 보이고 때로는 친일단체와의 제휴설이 나도는 등 국권회복에의 의지가 약화되어가고 있었던 점을 볼 수 있다. 특히 대한협회의 경우 출발부터 한계점을 갖고 있었지만 1908년 이후에는 지도층에서부터 그러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의병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면 국권회복에 대한 생각들이 편협하고 브르죠아 중심적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계몽단체들과 계몽사상가들 중 일부의 사람들은 의병운동을 현실에 맞지 않은 방법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계몽단체와 계몽사상가들의 현실인식이 극히 자기 계층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민을 강조하고 국민주권국가를 주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민중관을 갖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시각에서만 보고 해결하고자 했음을 말하여 준다.

<李松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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